베이킹이 일이 되기 전에는 나에게 있어 행복한 취미 그 자체였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정성껏 만들어서 선물하는 기쁨. 선물 받은 이가 맛있다고, 고맙다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뿌듯하고 기쁘고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때 느꼈던 그 행복감이 좋아서, 꾸준히 오랫동안 베이킹을 하고 싶어 졌었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기에 소질이 있다고들 하여, 꾸준히 화실을 다녔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좋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만 하기로 마음을 먹고, 결국 외국어를 전공하고 모 기업체에 입사하고 전공을 살려 해외 관련 업무들을 하면서 좋아하던 여행을 출장을 핑계로 다닐 수 있어서, 직장생활도 어느 정도 만족하고 다녔다. 그냥 그렇게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아가던 나였다.
나는 어떤 상황들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었고, 뭔가 해야 한다며 전전긍긍해하던 나를 보며 남편은 취미생활을 하면서 좀 쉬라고 권유했다. 쉬어 본 적도 없고 쉬는 법도 몰랐던 나는 뭔가 배우기 위해 기웃거렸다. 마침 신혼 때 산 광파오븐으로 소소하게 해 보던 취미였던 베이킹이 생각났다. 퇴사 후 1년간 부지런히 베이킹 관련 강의를 찾아다니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개인 공방 홈베이킹 클래스를 비롯하여, 제과제빵 자격증 과정, 이태리 브런치 과정, 초콜릿 케이크 양과자 과정까지 부지런히 배웠다.
베이킹이 너무 재미있고 즐거워서 밤을 새워 열심히 구워 주변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나눠주고 하던 때가 있었다. 오로지 취미였는데 먹어본 지인들이 하나둘씩, 팔라고 하기 시작했다. 수지타산을 따지는 것을 잘 못 하는 나에게, 남편이 살짝 볼멘소리를 건네었을 때가 되어서야 느꼈다. 이걸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까? 그 후 집에서 홈베이킹 클래스를 시작하고, 베이킹 공방을 열고, 판매에 외부 강의 출강을 나가거나 방송 촬영, 신문 인터뷰, 플리마켓 등 다양한 활동들을 하며 차근차근 역량을 쌓아나갔다. 바쁜 와중에도 더 발전하고 싶어서 멀리 유명한 선생님을 찾아가 플라워 케이크를 배우기도 했고, 베이킹에 나만의 색깔을 넣어 보려고 부단히 도 노력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베이킹으로 성장해가는 시간 동안 나의 사랑하는 아들도 함께 성장해 주었고, 어느새 11살이 되었다.
나는 아들을 뱃속에 품었던 임신 기간 내내 베이킹을 했다. 책을 읽어주거나 음악을 듣거나 다양한 태교들을 했지만 아마 나의 아들은 배 근처에서 윙윙거리는 핸드믹서 돌리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 소리가 시끄러워 정신없는 아이가 나오면 어쩌지 걱정도 했지만, 아이에게는 엄마 배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기계음 소리와 비슷해서 우려할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행히도 나의 아들은, 걱정과는 다르게 굉장히 얌전하고 순했고, 차분했다. 돌 전부터 보낸 어린이집에서도 잘 적응해 주어 고맙게도 엄마가 베이킹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 당시에는 아이가 아프면 어떡하지, 가까이에는 아이를 잠깐 맡길 가족도 없는데 내 일을 못 하게 될까 봐 늘 노심초사 아등바등, 헐레벌떡 그렇게 지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는 엄마의 허둥댐과 대조적으로 주위 환경에 차분하게 잘 적응해 주면서 성장해주었다.
내가 운영하던 베이킹 스튜디오는 아이에게 제2의 집이자 놀이터였다. 아들은 일이 늦어지는 엄마를 기다리며 작업실 한쪽 테이블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공방에 있는 귀여운 소품들을 가지고 놀이를 하기도 하고, 반죽 덩어리를 쥐여주면 혼자서 한참 동안 조물조물 쿠키를 만들며 엄마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들 생일 때에는 공방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베이킹 수업을 해주고, 맛있는 디저트와 음식들을 차려 근사한 생일파티를 해주기도 했었다. 늘 특별한 행사 때나 명절 때에는 다양한 디저트들을 구워 아이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선물하면서 아이가 속한 사회 속에서 나는 베이킹 선생님, 쿠키 만드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엄마의 직업을 소개할 때 우리 엄마는 베이킹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니 반 친구들이 대부분이 엄마를 알고 있었다며 엄마 유명해 기분이 좋았어,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늘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빼빼로데이 때에는 아이 손에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쿠키를 들려 보냈었는데, 쿠키를 나눠주고 돌아와 “친구들이 엄마 쿠키를 좋아해서 기분이 좋았어요.”라고 말해주었다. 내 아이가 기뻐한다면, 바빠서 늘 미안했지만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뭐든지 해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퇴근이 늦어지는 날도 있었고, 밤을 새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남편은 늘 야근이 많았고, 아이를 급히 늦은 밤 맡길만한 가족도 없었기에, 나는 일과를 마친 아이를 공방으로 데려와 놀리고 먹이고 졸려하는 아이를 작업실 안쪽 공간 바닥에 박스를 깔고 이불을 깔아 재우기도 부지기수였다. 남편이 늦은 시간 공방으로 퇴근해서 잠든 아이를 안고 집에 데려가면 나는 또 밤새 일을 하곤 했었다.
언젠가 아들이 열이 나서 유치원에 보내지 못했던 날, 해열제를 먹고 죽은 듯이 공방 구석에서 잠만 자던 아들을 보며 안쓰러워 눈물짓던 날들도 있었다. 고객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므로 내 손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신은 아들에게 쏠려있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이를 이렇게 고생시키나 하며 울면서 작업했었던 시간도 있었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서, 이를 악물고 버텨내려고 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는 엄마에게 떼를 쓰거나 불평불만도 없었고, 늘 차분했다. 부끄럽게도 엄마만 버둥대고 있는 것 같았다.
재작년 말, 이사를 오면서 오랫동안 운영하던 베이킹 스튜디오를 정리했고, 동시에 코로나로 인해 팬더믹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하루빨리 새로운 동네에서 공방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들이 맞지 않았고, 학교에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는 아들도 걱정이었다. 당장 공방을 낼 수 없는 이유 중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아들의 의견도 중요해서 물어보았었다.
“아들, 엄마가 예전처럼 공방을 다시 시작하면 어떨 거 같아? “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엄마 생각이 중요하잖아요.”
“엄마는 하고 싶기도 한데 너에게 신경을 많이 못써줄 거 같아서 걱정도 되고, 아들의 의견이 궁금해.”
“그러면 나는 엄마가 너무 바쁘고 힘든 게 싫어요, 가게 안 하고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 어쩌면, 아들의 어린 시절, 공방에서 견뎌냈던 시간들이 혹시나 엄마의 눈치를 보며 인내하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거 어렸던 아들이 매사 잘 적응해줘서 고마웠지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것은 사실이다.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가도 어긋나기도 하고 또 갑자기 속도를 내기도 한다. 내가 베이킹을 하는 삶을 선택했던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약 13년 동안 갈고닦았던 많은 시간들과 이를 이해해 준 가족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늘 일하는 엄마로 버둥대던 모자란 엄마라 미안했는데, 그래도 아들에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