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늘 아홉을 뺏고도 하나를 더 달라고 조르는데 부모는 열을 주고도 하나가 더 없는 게 가슴 아프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중에서
자식을 낳아 키우지만 부족한 엄마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함께 울고 웃고 성장했고, 처음엔 도저히 모르겠던 ‘모성애’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들은 또래에 비해 덩치도 컸고 건강했으며, 잘 먹고 잘 자고 무난했던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온순하고 차분한 편이어서 키우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늘 기관 적응이 무난했던 아이였고 친구들도 많아서 학교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초1 학교에 등교한 지 3일도 안되어서 짝꿍이 손등을 긁고 꼬집어서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생각이 정리가 되면 말을 하는 성격이기에, 정말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 거구나 라는 것을 느끼고 나는 학교와 반 분위기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들어간 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들이 겪은 일들 비롯 반 아이들 엄마들에게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사고들로 인해 나도 아이도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몇몇 장난꾸러기 친구들을 휘어잡지 못한 담임선생님은 스트레스로 인해 아프시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바로잡지 못하는 선생님을 원망했지만 나중에는 선생님도 안쓰럽고 일부 아이들로 인해 본의 아니게 힘들어하던 나머지 아이들도 안쓰러웠다.
아들은 키가 큰 편이라 체급이 비슷한 반 친구가 장난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평소 폭력에 대한 교육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내 상식 선에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덩치가 크니 누굴 때리거나 밀면 상대 아이는 넘어지거나 다칠 수 있어. 폭력은 나쁜 거고 똑같이 따라 하면 똑같은 사람이니 말로 하고 그래도 안되면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해보자.”
하지만 이 말은 통하지 않았다. 아이가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해도 그때뿐, 아이는 점점 말문을 닫기 시작했다. 싸우고 꼬집고 욕하는 상황들을 겪어보지 못해서인지, 이런 상황들을 힘들어했다.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이런 일을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고, 1학년 말까지 별 일들을 다 겪은 후 학폭위까지 생각하고 남편까지 나서서 아이를 보호했다.
1학년을 파란만장하게 보낸 후 나와 남편은 아이에게 늘 가르쳤던 말에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 선생님께 요청해도 해결이 안 된다면 엄마 아빠에게 말해주렴. 엄마 아빠는 언제든 네 곁에 있고 너를 지켜줄 테니까. “
선생님께 말을 해도 해결이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아이는 1학년 때 이미 알아버렸다.
나는 방관자 같은 학부모로 조용히 지내려다가 1학년을 이렇게 보낸 이상, 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학교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저 엄마 예민한 엄마야, 외동아들 키워서 뭘 모르네. 뒤에서 욕을 한다 해도 괜찮았다. 내가 손가락질받더라도 나는 내 아이를 보호해야 했다. 동네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 아들이 아파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2학년 때 좋은 선생님과 무난한 반 구성원 아이들을 만났고, 나는 반대표엄마를 맡으면서 내 아이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솔직히 아이를 위해 나서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가 1학년 때 겪은 아픔으로 인해 나 역시도 갈기갈기 찢어졌기에, 다시는 그런 일을 내 아이도, 다른 아이들도 겪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름답고 행복해도 모자랄 초등학교 1학년을 힘들게 보낸 내 아들에게 그 이후 남은 가슴 아픈 교훈이 있다.
“누가 건드리면 거절하고 무시해.”였다.
여전히 폭력을 쓰라고 가르치진 않는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엄마 아빠에게 이야기하라고. 엄마 아빠가 너를 지켜줄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새겨준다.
아이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몰랐던 세상을 만나게 된다. 앞으로 더 독한 세상을 만나게 될 텐데 지나고 보니 그 훈련이었다고 편히 생각하자 했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 적어도 상식이 통하는 세상, 상식이 통하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