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집 딸애가 놀자 하면 싫은 내색하지 말고 냉큼 놀아줘!"
인왕산 꼭대기 산동네에 쪽방촌 위에 엄마는 집을 샀다. 널찍한 앞마당은 부처님 손바닥처럼 아늑하다. 안방을 내어준 우리는 앞마당을 돌아 찌그러진 사각형의 방에 들었다. 그나마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을 수 있는 쪽마루는 우리 세 식구가 밥상을 앞에 놓고 잠깐의 시름을 나눈다.
돌작 마당 위엔 아장거리며 걷는 아가보다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엄마는 흰머리 수건을 쓰고 여름의 한 낮을 땀 흘리며 보냈다. 도란도란 익어가는 간장 항아리, 된장, 고추장 단지가 아버지의 약탕기와 마주 앉은 장독대. 그 옆으로 줄 세워진 장대위엔 고실하게 잘 말라가는 빨래가 산바람에 펄럭댄다.
산 구릉에 빨간 홍시 같은 노을이 걸리고 어스름 저녁이 찾아오면 나는 무 말랭이가 담긴 채 바구니를 부엌으로 들인다.
안채에선 연탄 화덕 위에 꽁치를 굽나 보다. 엄마의 가느다란 실눈에 나는 그만 일일 공부 학습지를 더듬대면 어느새 따스한 손이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 듬었다.
산 꼭대기에 어두운 밤이 아주 많이 숨어들어도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았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렇게 깊고도 무심한 밤들이 산동네에 눈이 쌓여 녹지 않는 그늘지고도 외진 엄마의 집에 들어앉았다.
안채에 기와지붕을 갈던 날에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누런 회 포대 봉지엔 방 2칸의 안방을 차지한, 주인집 아닌, 그 집이 이사를 나갈 돈뭉치가 들어있다.
픽션입니다... 내일은 이후에 글이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