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선생님이다. 꼼꼼하고 소심하시다. 나와는 정반대로 덜렁이고, 뭐든 대충대충이다. 일본으로 유학도 하고 인텔리지만 경제는 모른다. 자기 식솔도 간수하지 못했으니깐... 할머니가 우릴 보살피지 않았으면 나와 두 동생은 고아원행이었다고 귀에 딱정이 앉을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책과 음악을 좋아해 툇마루 끝쪽에 카세트가 울리고 서재엔 동네 작은 도서관 규모에 버금가는 많은 책들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술로 인생을 절단 내지만 않으셨으면 하는 아쉬움만 아니면 이 세상 유일의 멋과 낭만의 종결자 되시겠다.
까무룩 낮잠과 친구 할 때면 마룻바닥에 쏟아진 햇살로 나의 눈살이 시렸던 날
아버지는 학교에서 쫓겨 나와 고무줄처럼 늘어진 시간을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후암동 골짜기 위에 남산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셨다. 직장생활로 바쁜 어느 날에 나는 P와 남산에 데이트를 갔다. 소월길을 타박타박 걸었다. 양갈래의 숲 기슭을 황홀한 기분으로 감싸며 에로틱한 분위기가 한참이었다.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풍경과 더불어 초로의 신사 분과 마주쳤다. 아버지였다! 나는 P를 보이면 안 된다 생각해 되짚어 오던 길로 달음박질쳤다. 머리를 방망이로 맞은 것 같고 가슴은 두 방망이질을 해댔다. 무서웠고 엄격한 아버지를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후로 우리의 데이트는 남산도서관 근처는 얼씬도 안 했다. 그 밤, 우뚝 솟은 남산타워를 중앙에 싸고 둘려 쳐진 단풍잎은 내 맘에 앉았다. 노랗고 빨간 물감을 풀어 가을 한 장에 담고 P와 나의 잡은 손은 책갈피에 숨겨 놓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리운 아버지.
책 속에 빠져 우주를 넘나들며 사색에 잠긴 나의 아버지는 소월길 따라 지금도 남산도서관에서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