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

by 여비

일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남편보다 한 시간 일찍 들어와 저녁 준비를 한다. 부산하게 손과 냉장고 문이 열고 닫힌다. 정확한 시간에 저녁밥상은 차려져야 한다. 어릴 때 젖배를 골아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남편이 정한 규칙이다. 밥뿐이 아닌 청소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우리 집은 정확해야 한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뒹굴 때다. 나와는 달리 바로 밑의 여동생은 고3 실습생을 이어 취업이 졸업과 함께 되었다. 중소기업의 경리 자리는 우리 집 식구 여섯을 먹여야만 했다. 동생의 알량한 수입으로는 살림이 쪼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술타령은 해가 뜨고 달이 지도록 멈추지는 않았다. 뒹굴고 있는 나도 별 도리없이 밥만 축내는 식충이고 지존인 막내도 대학생의 겉멋은 고혈을 짜내는데 보태기만을 했다.

세 들어 사는 진희 엄마 소개로 가죽 공장엘 들어갔다. 생전 해보지 않은 허접한 일을 맡았다. 커다란 컨베이어 벨트 위로 집채만 한 가죽이 얼굴을 보인다. 흰 장갑을 끼고 롤을 타고 들어가는 모양이 기차가 터널을 들어가는 것 같다. 나는 둥근 봉을 들고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는 가를 감시하는 일처럼 가죽의 탈선을 지키는 일을 했다. 귀청을 깨는 소음에 머리가 흔들렸다. 다리는 천근만근 추운 날에 입김은 코를 타고 나왔지만 등줄기는 땀이 내려왔다. 식은 죽 같은 일이란 생각은 멀리 도망갔다.

집을 떠나 기숙을 하는 곳으로 옮겼다. 번듯한 일은 아니었지만 전자제품 조립은 손에 금방 익었다. 부지런함은 통장의 배를 불렸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혼자 자취방을 깔고 앉게 되고 중단했던 학업도 이어갔다. 뚜렷하게 잘하는 것은 없었지만 덜자고 덜먹고 대신 책은 열심히 읽었다.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날에는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읽고 눈물을 찍었다.

"사람이란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정해진 길을 가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노트에 적어두었다. 고3 실습도 마치기 전에 집 걱정으로 하고 싶은 공부를 접은 동생을 생각했다. 코끼리 몸만 한 가난의 옷을 메고 출근을 하는 하얀 얼굴이 보인다. 식구 입을 나 하나 라도 덜기 위해 거친 바람을 맞고 달동네를 뒤로 했다.

잉여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정해진 길 위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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