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반도주

그날 밤의 기억

by 여비

눈발이 느릿느릿 내렸다. 교실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신작로 길에 회색빛 눈이 질척대고 푹푹 빠져 엉망이 되어버린 털부츠를 털어 신발장에 구겨 넣었다. 먼발치에 스치듯이 하나 둘 아이들이 들어서고 내 주번 짝인 효수는 보이질 않는다.

주번인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언 손을 녹여가며 주전자에 수돗물을 받아놓고 청소도구함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꽃무늬가 그려진 양은 쟁반과 플라스틱 컵을 씻어 나란하게 포개 놓았다. 교실 정중앙에 위치한 무쇠난로에 조개탄을 배급받으러 가야 하는데 효수는 오지 않는다. 나는 중무장을 하고 장갑을 꼈다. 난로 옆에 놓인 양철통을 들고 교사 뒤쪽으로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무거운 조개탄은 내 발걸음을 마냥 더디게 했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효수가 걱정도 되고 원망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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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수 엄마는 우리 동네에서 미장원을 했다. 엄마는 거기서 꼭 머리를 했기 때문에 하굣길에 미장원 안쪽을 기웃거렸다. 고대기로 머리를 만지는 모습에 의기양양하고 세련됨이 내 눈에 보였다. 서 너 명의 손님들은 소반에 담긴 무엇인가를 먹으며 깔깔대는 소리가 나무 철을 댄 문틈으로 들렸다. 동네 사랑방처럼 한가한 풍경들은 화기애애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들른다는 효수 아빠는 효수에게 새 옷을, 새 책가방을, 새 학용품을 선물로 가져오셨다. 새 옷을 입고 학교에 오고 가죽 책가방을 메고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한데 효수는 밝은 내색이 없다. 어둑한 얼굴에서 보는 집안 분위기는 내 마음에 야릇한 심지를 돋우고, 단지 주번 짝으로서만이 아닌 그 어떤 불빛도 반짝였다.

어스름한 불빛을 받고 있는 허름한 이불 보따리와 모양을 구분 못하는 헝클어진 빨간 석유난 로위엔 고데기가 널브러져 있다. 가죽끈이 도드라진 새 책가방과 버려진 책 가지 들은 주인을 잃었다. 당당하고 세련된 효수 엄마의 계가 깨지고 야반도주를 했다는 엄마의 얘기는 밝은 내색 없는 효수에게 야릇한 심지를 돋우었던 내 마음도 깨뜨렸다. 허공으로 부서진 엄마의 곗돈은 허망한 나의 야릇한 마음에는 못 다았다. 뜻도 모르는 그, 놈의 야반도주는 나쁜 놈인가 보다.

몸이 약해 집에만 계시는 내 아버지는 새 옷도, 가죽끈이 달린 책가방도, 예쁜 상자갑에 담긴 쿠키도 내게 선물로 가져오지 않는 것이 마냥 못 마땅한 철없는 나는, 국민학교 2학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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