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가져다 준 웃음
오랜만에 떠난 여행길이다. 떠올려보니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이 작년(2023년) 2학기 2차 고사를 마친 뒤였다. 예비고등학생인 강물이와 마이산은 겨울방학 동안 기숙학원에 다녀왔고 봄방학 동안에는 컨디션 조절을 이유로 여행길에 오르지 못했다. 정식으로 대입수험생은 아니지만 ‘예비고등’이라는 무거운 타이틀을 가진 아이들의 입학 준비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부담감을 가족 모두에게 안겨주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일 년 동안 네 번의 시험 준비기간을 갖고 시험이 끝나면 주말이나 운 좋게 연휴가 더해지면 1박 2일 또는 2박 3일의 여행을 했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는 학원 방학 기간을 총 동원해서 조금 긴 여행길에 올랐다.
입학하고 정식으로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의 일과는 무척이나 단조롭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겹다. 고등학교 생활에 조금이나마 적응할 무렵 3월 모의고사를 치렀고 4월 말에는 1차 고사를 치렀다. 고등학교 내신성적은 대입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에 아이들의 긴장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엄마, 시험이 끝나면 이틀 동안은 동물처럼 살 거야. 본능에만 충실할 거야.”
시험공부에 지친 마이산의 마음이 100퍼센트 표현된 절규였다. 나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얼마든지 그러라고 대답했다.
“엄마, 어디라도 다녀오자. 우리 몇 밤 자고 올 수 있을까?”
시험을 끝낸 마이산이 제안했다. 그동안 생활루틴이 깨질까 우려해서 여행을 보류했었는데 아이가 먼저 한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
우리에게는 긴 연휴가 없었기에 여행기간은 1박 2일, 여행 후의 피로를 최소화해야 하는 여행지를 찾아야 했다. 문득 아이들이 어렸을 때 다녀온 내장산 아래쪽의 산책길이 떠올랐다. 너무 멀지도 않고 시험과 긴장도에 찌든 마음을 치유할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가족의 여행계획 짜기. 일단 가고 싶은 장소를 하나 정하면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이번에는 내장산이 그 시작이다. 내장산이 정읍에 위치하고 있으니 숙소는 당연히 정읍에 정하고 이제부터 정읍에서 둘러볼만한 장소를 더 찾는다.
작은 도시인데도 정읍에는 큰 시장인 샘고을 시장이 있고, 시립박물관과 시립미술관이 있다. 어릴 때부터 여행길에 박물관이 있으면 무조건 여행코스에 포함시켰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구석기 관련 부분만 좋아했었고 역사를 배우면서 관람 범위가 점차 넓어졌다. 물론 내 나름의 당근도 있었는데 관람을 잘 마치면 박물관에 있는 기념품샵에서 원하는 선물을 사주었다. 그럼 아이들은 그 선물로 다녀온 박물관을 떠올리기도 한다.
미술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규모였기에 아이들도 더 집중력을 가지고 관람할 수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어린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밑그림이 그려진 종이에 색연필로 색칠하고 스캐너에 스캔을 하면 벽에 설치된 화면에 내 그림이 떠오른다. 강물이와 마이산도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놀이처럼 경험했던 것인데 이번에는 아이들 아버님의 장난이 커다란 웃음을 자아냈다.
정읍 시립미술관에 설치된 화면에는 ‘animal Kingdom’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여러 동물들이 있었다. 우리가 예전에 경험했던 화면에서의 동물들을 위치를 조금씩 움직이는 게 다였는데 이곳에서는 화면 속의 동물을 터치하면 동물마다 고유의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기린, 아이들 아버님은 타조, 마이산은 하이에나를 색칠했다. 내가 제일 늦게까지 색칠하고 있는 동안 화면 앞에 있던 마이산과 강물이는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색칠한 그림을 아이들 아버님에게 넘기고 화면으로 다가간 나는 웃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은 색칠한 동물 그림을 여러 번 스캔해서 우리가 색칠한 동물들이 무리 지어 화면에 등장했고 그 동물들을 모두 터치하면서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순간 ‘이게 뭐지?’하면서 나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별다른 기술도 필요치 않았고 마침 미술관에 어린이들이 없었기에 우리는 화면을 독점하고 놀았다. 놀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지난겨울부터 강물이와 마이산은 ‘예비고등, 모의고사, 야간자율학습, 내신성적’이 주는 압박감과 그에 따른 부담감으로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와 아버님도 마찬가지고 힘겨웠다.
마치 아이들이 대여섯 살 무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떠한 결과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소한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는 너무 컸다. 한바탕 웃고 난 후 어린이 가족이 다가와 우리는 화면 앞에서 벗어났다.
“이번 여행에서 뭐가 제일 재밌었어?”
시장 구경, 미술관, 풍경이 예쁜 카페, 벚꽃은 졌지만 벚꽃길 드라이브, 박물관, 우화정에서 다슬기 구경, 물수제비 띄우기 등등의 여러 일정에서 우리 가족이 동시에 외친 것을 바로 “미술관”이었다. 커다랗게 웃으면서. 그 순간 우리는 동시에 미술관의 화면 앞으로 돌아갔다. 기쁨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각자가 마음속으로 느낄 뿐이다. 40대의 부부,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기쁨을 느낄 객관적인 장소로는 부적합할 수도 있는 곳에서 우리는 행복했고 지난 몇 개월 동안의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