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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족이 된다.

そして家族になる

일본 영화  "そしてになる"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제목에서

브런치 제목을 가져왔다. 아이가 바뀐 걸 6년만에 알게 두 가족의 이야기다.

두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이 군마현과 도쿄라는 설정부터 확 꽂히는게 있다

군마현은 관동지방에 있으면서도 낙후된 이미지가 있고 도쿄는 말 그대로 서울이니

우리나라식의 비유를 하자면 서울 목동쯤에서 교육에 핏대 올리면서 살고 있던

가정의 아이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던 산포리 읍내 느낌의 작은 소도시에 살던 

집의 자식과 바뀐 이야기다. 제목 빌려 오느라 사설이 길었다.


가족을 선택해서 태어나라고 하면 지금 부모를 선택할 자식들은 몇이나 될까

형제를 선택해서 태어나라고 해도 지금 형제 자매를 선택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까

마트에서 품질좋은 물건을 고르듯 부모도 퀄리티 높은 부모를 골라서 그런 부모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아마 태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들 괜찮은 집 앞에 가서 줄서있을테니 언제 태어날 차례가 오겠는가!


형제 자매도 마찬가지다.

선택권을 줄테니 골라봐 한다면 나랑 맞는 사람, 나를 더욱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골라서 

그들과 형제 자매가 되지

까칠한 언니나 동생을 만나 스트레스 받아가며 평생 혈육이라 끊어내지 못하고 애증의 관계가 되어버리는 일은 없을테니, 어쩌면 우리들에게 애초에 부모나 형제 자매를 고를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부모를 부모로 형제 자매를 형제 자매로 가질 수 있었던 거다.



우리 가족도 그렇게 형제 자매가 되었다.

피를 나눈 자들끼리만 1박 2일 서울투어

 1남 4녀의 아들과 딸들은 엄마 나이부터 막내 남동생 나이까지 합쳐 327살이 돼서

1박 2일 여행을 했다. 선택에 의해 형제 자매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툭 떨어져 피로 맺어진 사이

선택과 결정으로 맺어진 며느리나 사위들은 함께 할 수 없는 여행


국민학교 6학년 때까지 살았던 마을은 고씨들의 집성촌이었다.

제주 고씨 대빵 할아버지가 일가친척들을 데리고 달밤에 마을에 들어왔다해서 마을이 월하리(월하리)

한자로 하면 월하리지만 한글 풀이를 하자면 달빛 마을 아닌가

고씨들로 똘똘 뭉쳐진 동네라 우리나라의 흔한 성씨들 김, 이, 박은 없던 동네여서 어렸을 때 내 친구들은

그냥 두 종류였다. 고씨냐, 고씨가 아니냐

밖에 나가면 오촌아저씨, 오촌 아지매, 사촌 언니 온 동네가 핏줄로 끈끈했던 동네였다.

고씨들이 마을 안에 살던 메이저리거들이었다면 마을 살짝 밖으로 타성받이 집이 있었다.

흔하지 않았던 노씨 아저씨네 초가집이 산 아래 있어서 어린 눈에도 저 집은 노씨라 안쪽에 못사나 했었다.

노씨 아저씨네 아들은 천재여서 서울대 물리학과를 갔는데 공부말고는 내가 알기로 잘하는게

하나도 없는 오빠였었다. 

내 어린 눈에도 그렇게 눈치없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집만 유일하게 1970년대에 시골 마을에서 어린이 잡지를 보던 집이었다.

소년중앙과 어깨동무를 한 달에 한 권씩 읽었다. 아버지는 그걸 오년 이상은 사다 주셨다.

엄마가 소년중앙이든 어깨동무든 하나만 사오라고 했어도 아버지는 한 달에 두 권씩 읽혔다.

아빠 오실 때 줄줄이, 엄마 오실 때 줄줄이 우리들은 줄줄이 사탕도 아버지는 부지런히 사오셨고

동네 애들이 백숙도 편하게 먹지 못할 때 우리집은 전기구이 통닭을 먹었다.

한 달에 두 권, 일년이면 스물 네권을 읽었던 서울 어린이들의 어린이 잡지 덕분에 

시골에 살았지만 소년중앙과 어깨동무를 보면서 서울의 국민학교 아이들은 지금 뭐가 유행인지

내 친구들은 동막골 소녀처럼 살았어도 나는 아카시아 줄기로 파마를 말 망정 머리는 서울에 있었다.


우리 엄마는 요술쟁이

우리가 먹고 버린 요구르트병

깨끗이 씻어서 칫솔꽂이로 쓰는

우리 엄마는 알뜰한 요술쟁이


뭐 그런 말도 안되는 유치한 동시로 소년중앙에서 동시 상을 탄 서울 어린이의 동시 작품을

전라북도 시골의 어린 내가 베껴서 동생 숙제로 냈다가 방학숙제 상을 타기도했다.

1970년대 우리 동네에서는 요구르트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많았을 때였는데

아마 나도 몰랐을것이다.

요구르트 병의 정체를 알았더라면 쓸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칫솔을 그 병에 넣은들 몇 개나 넣겠는가! 다들 형제 자매가 기본 다섯씩은 됐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그저 1970년대라는 시대 상황이 교과서에는 우리나라 어린이는 영희와 철수였지만

북한군 머리는 늑대로 나왔고 (나는 늑대 북한군을 교과서에서 본 세대다), 

도시락 검사를 해서 쌀밥만 싸왔으면 손바닥을 맞던 시절이었고, 육성회비를 4학년 때까지 냈으며

엄마가 준 촌지를 담임이 대놓고 봉투 안을 열어보던 시절이었다.

아끼고 쥐어짜는 엄마들이 1970년대 대한민국이 바라던 어머니상이었으니

요구르트병 동시는 정책적으로 뽑혀 마땅한 국민학생의 동시였다.


그래도 우리집은 냉장고가 있었고 텔레비젼이 있어서 타잔을 보러 동네 어지간한 애들은 우리집에 모여

윗방 아랫방 꽉 차게 앉아 텔레비젼을 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영화관처럼 꽉 차 있다가 아이들이 빠진 방을 빗자루로 쓸면서 투덜대던 걸 기억한다.

양말도 안신고 왼 종일 밖에서 놀았을 시골 아이들이 흙바람으로 있다가 빠진 자리는 마당쓰는 것처럼

엄마의 빗자루 끝에 흙이 수북했었다.

노씨 오빠도 그렇게 우리집에 텔레비젼 보러 산 아래에서 평지인 우리집으로 왔다가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의 정체를 알게됐다.

글자처럼 생긴 건 모든 것이 좋았을 천재오빠에게 우리집은 롯데월드였을것이다.

문제는 눈치없던 오빠는 자기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서 잡지를 읽었던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눈치를 줘도, 가라고 해도 안가던 그 오빠는 내가 봐도 답답했고

욕이 나올 지경이었으니 우리 아버지 엄마는 오죽했을까

눈치큐가 0이었으니 아이큐로 몰아서 주고 얼굴이 0이었으니 또 아이큐로 몰아서 주신 공평하신

하느님 덕분으로 모든걸 머리로 받아서 결국 대를 이어 살아온 고씨 집성촌에서

타성받이 노씨가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일은 비록 동네에 이런 경사가 없다고 잔치를 벌였을망정

고씨들에게 얼마나 쓰라린 소금이었을지, 어른이 되니 짐작이 간다.


월하리, 달빛마을 태생이라 그런가! 아버지는 감성적인 분이셨고 유머가 있었으며 왼손잡이셨다.



엄마의 소원인 피는 물보다 진하다 투어는 내가 기획했다.

나경투어

청와대 관람 후 서울 야경투어버스, 다음 날은 설렁탕을 먹고 태극당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정이었다.

엄마의 자본에 나의 기획력이 합쳐졌다.

엄마의 백만원과 나경투어가 손을 잡고, 비오는 청와대 구경을 하고 한강 야경을 보면서 이층버스가

다리밑을 통과할 때는 소리를 질렀다.

여행은 수학여행이 가장 바람직하듯, 여럿이 모이는 여행은 가장 교과서적인 기획이 옳다.

나경투어는 옳았고 조식이 없음과 쇼핑이 빠졌음을 콕 찝은 남동생의 지적질에도

우리는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며 자축하고 끝냈다.


아버지는 왼손잡이셨다.

동생들 셋은 오른손이 왼손보다 편한 인간들이고

나는 큰 딸이라 손은 부모에게서 손등을 맞아가면서 고쳐졌을터이나

발은 부모의 눈 밖 관리 영역이라 왼발을 쓴다.

제기도 왼발로 스무개 이상을 차올리고, 족구도 왼발로 한다.


사료회사 영업왕 출신인 남동생의 전국 돼지농장 사장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고

엄마가 들려준 천재 물리학도 노씨 오빠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듣느라 여행이 더 재미있었다.


"언니, 회사 차려라. 가이드하면 잘하겠어"

엄마가 한마디로 교통정리를 해주셨다.

"주방장이 솜씨좋다고 나가서 자기 가게차렸다가 결국엔 망하고 남의 집 주방으로 기어들어간단다"

가족이 되는 건 쉽게 됐을 지 몰라도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은 쉽지는 않은 일이다.

이번에 우리도 영화 한 편 찍은 셈이다.

그렇게 가족이 된다. そ して家族になる

그렇게, 가족이 된다.

그렇그게, 가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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