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나경오바짱교토유학이야기 May 16. 2020
오십을 넘게 살았으니 누구에게 평가받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크게 요행이랄 게 없는 삶을 살았다.
나한테 크게 운이 작용하는 게 없구나 라고 정말 뼈저리게 느낀 건 학력고사를 봤을 때였다.
보통은 자기가 봐왔던 모의고사에서 점수를 이십 점 운이 좋으면 삼십 점 정도 더 올려서 받을 수 있는 게
학력고사 점수인데 나는 딱 모의고사 점수만큼만 받았다.
87학번인 내가 고3이었을 때는 다른 학교에서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우리 학교에서는
대성 모의 학력평가지가 가장 어려웠고 애들이 대성 거만 봤다 하면 점수가 안 나와서 싫어했었다.
대성(大成) 이름은 얼마나 멋있어! 하지만 대성이 아니라 쪽박 모의 고사지가 대성이어서 우리 반에서 공부
잘 하 던 애들도 대성만 봤다 하면 쪽박을 찼다.
하지만 나는 예외였다.
대성을 보고도 평상시 보던 모의고사 점수를 유지했기 때문에 나는 대성 모의 고사지를 보고 난 후
우리 반에서 2등을 한 적도 있었다.
1등을 제외한 나머지 애들의 점수가 쑤욱 내려갔고 나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현상유지를 했던 내가
유리했던 것이다.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담임과 입시상담이 있었다.
번호순대로 입시상담을 하고 와서 우리 반의 어떤 애가 나한테 와서 그랬다.
"선생님이 너 같은 애가 진짜 실력 자래. 대성 거 보고도 점수 기복이 없다고"
점수의 기복은 학력고사를 보고도 그대로여서 실력자는 개가 뿔 난 소리고 죽 쑤고 마감하 게
학력고사다.
딱히 무슨 과를 가고 싶다는 것도 없었다.
우리 때의 정서는 서울로 갈 수 있는 집안의 재력과 실력이 없으면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의 도청소재지
국립대학교 진학이 정답이었다.
인정머리없는 점수를 받고 모범답안같은 진학의 길!
내가 살고 있던 도시의 도청소재지에 있던 국립대학교 일어일문과에 진학했고 87학번을 달았지만 공부가 싫고 짜증이 나는
1987년이었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공부를 안 했으면서도 1994년에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중간고사 보는 꿈을 많이 꿨다. 일본어 중간고사 보는 꿈을 가끔 꾸고 꿈속에서도
"이건 꿈이야, 나는 지금 결혼했어, 시험 안 봐도 된다고" 안심하고 꿈에서 깼다.
우리 과였던 애들이 내가 그런 꿈을 꾼 줄 알면, 나이 먹어 교토에 유학 간 줄 알면 모두
"그렇게 공부도 안 하고 뺀질거렸던 애가 진짜야. 헐" 할 일이지만 나는 공포의 중간고사 시험을 많이 꿨고
유학도 다녀왔으니 모두 실화다.
그뿐인가!
학교 다닐 때 가장 싫어했던 교수의 성이 유(柳)였기 때문에 나는 유 씨들도 싫어했었는데 결혼을 유 씨랑 해서
유 씨를 세 명이나 더 만들어 놨으니 세상은 진짜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살아온 날들의 경험치로 비추어보아 나는 내가 가진 것 그대로 결과로 나오는 인생 캐릭터다.
그래서 남들보다 120으로 노력해야 70이나 될까
노력하지도 않고 좋은 결과를 바랄 수는 없는 캐릭터라는 얘기다.
2018년 4월 학기 교토 유학을 위해서 2017년 7월부터 일본어 학원에 다시 다녔다.
일본 대학교 입시를 위한 준비반이었기 때문에 고등학생들과 한 반이 되어 일주일에 세 번 학원에 나가 수업을 받았다.
한 시간 반씩 일주일에 세 번 나가는 학원 수업도 쉬운 건 아니었다.
해보면 알겠지만 항상 머리와 가슴 사이의 거리는 멀어서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게 공부면 더하다.
기억력이 이미 오래전에 없어진 나의 하얗고 청순해진 뇌의 상태로 다시 공부를 한다는 건
남들보다 세배 네 배 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
4월 입학식 후에 알바를 4월 16일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교토에 무사히 안착했던 4월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일단 열심히 성의 있게 하면 길은 보인다고 생각한다.
교토 보로니아에 제출할 이력서를 쓸 때도 로손 편의점에서 170엔에 산 이력서를 거의 한통 버려가면서
신중하게 정자로 써 간 이력서 덕분에 1차 면접에 오라고 콜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이력서는 알바용이 따로 있고 알바용 이력서는 A4 한 장이 아니라 책처럼 펼쳐지게 되어 있고
간략하게 자기소개도 쓸 수 있는 란이 있었는데 나는 그 부분을 잘 공략했다.
보로니아 제출용 이력서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출하부의 책임자급이었던 하마 다상이 이력서를 꼼꼼히 보면서 질문을 했을 때
답변의 포인트가 되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오봉이나 축일에도 근무할 수 있는지?
일본에는 얼마큼 있을 예정인지?
연휴에도 일을 할 수 있으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인 거고 내 입장에서는 그날은 풀로 일을 할 수 있으니
생활비도 벌 수 있고 서로 좋은 일이기 때문에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네 물론 일 할 수 있지요. 그렇게 대답하면 되는 거고
일본에 얼마큼 있을 예정이냐고 물었을 때 달랑 1년요 라고 대답하는 거 보다는 일단 비자를 2년 3개월 받았기 때문에 비자가 증명을 해주는 2년이라고 답을 하면 된다.
1년 있다가 올 예정이기는 했지만 비자는 2년 3개월을 취득했고 나도 공부하다 보면 맘이 바뀔 수도 있는 거라
딱 잘라서 1년요 할 필요는 없었고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일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1년이라고 답하는 것보다는 2년이 더 유리한 것이고 실제로 9월쯤에 알바 면접 한 곳을 더 봤을 때도
같은 질문을 들었었다.
"일본에 얼마큼 있을 예정이세요?"
면접에도 포인트가 있다.
하마 다상이 내 이력서를 보면서 글씨를 참 잘 썼다는 칭찬을 했었고 영어는 좀 하시냐고 물었었는데
영어는 별로지만 한국말을 잘한다는 80년도식 유머 1번지 개그를 날려서 하마다를 웃게 만든 것도
긴장감을 없애 줬다.
특히 나와 나이가 같았던 하마 다상은 용기가 있는 한국 아줌마라고 멋지다고 해주면서 내가 앞으로
보로니아에서 일하게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팍팍 주었다.
나중에 일을 해보니 하마다가 나를 뽑아 준 거 참 고마운 일이었다.
출하부의 일이라는 게 두 사람의 조합으로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교토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과 짝으로
일을 한 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학교의 선생님들은 표준어를 쓰기 때문에 학교 수업은 그런대로 알아들었지만 빵집 출하부의 아줌마들은
교토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후지모토 상부터 대부분 교토 사투리나 칸사이벤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계를 다뤄야 되는 일도 힘들었지만 아줌마들 말을 알아듣는 게 더 힘들었었다.
하마다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냥 사람 하나 보고 뽑아준 것이다.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고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오기 전 하마다와 맥주 한 잔 했을 때
자기 비밀 한 가지를 털어놔 준 하마다를 보면서 나를 친구처럼 생각해준 것 같아 고마웠다.
일본에 갈 때 20만 엔쯤 미리 환전을 해갔고 1학기 학비 35만 엔은 한국에서 미리 보냈고 4월 방세도 미리
지불했기 때문에 돈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할 일은 없었지만 남편에게 미리 말을 했었다.
"어떻게 하든 혼자 벌어서 해 볼 테니까 당신은 한국돈으로 50만 원만 내 통장에 넣어 놔"
방세가 3만 9천 엔에 관리비가 5천 엔이었다.학교까지 걸어 다녔고 알바가 쉬는 날 혼자 놀러 다닐 때는
1일버스 이용권을 사서 맘껏 타고 돌아 다녔기 때문에 교통비는 많이 들지 않았다.
의료보험료가 2천엔, 전화비가 평균 2천 엔에서 3천엔 사이였고 에어컨과 히터를 썼던 계절에는 전기료가
5천엔 정도 나왔고 도시가스요금이 2천 엔에서 3천엔 나왔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도 기본 비용이 발생하는데
아끼고 아끼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이 의식주 포함 최소한
8만 엔에서 10만엔
한국돈으로 최소한 80만은 있어야 되는데 남편에게 50만 원만 통장으로 입금하라고 한 이유는
혼자서 해보고 싶었다.
보로니아의 급여일은 매월 말일이었고 4월 16일부터 일한 급여는 5월 31일에 지급이 되었기 때문에
5월 31일 받은 74,175엔은 나의 최초 급여가 되었고 그걸로 나는 6월 1일에 방값도 보내고
자립적인 생활을 꾸려 갈 수 있었다.
교토중앙신용금고 급여 통장
내 생계를 책임져줬던 소중한 급여 통장
남편이 보내 준 한국 돈은 따로 환전해서 인출할 일도 없이 보로니아 급여 통장으로 잘먹고 잘 살았다.
엄마가 없어서 비록 아이들은 고생을 했고 남편도 힘들었을테지만 자립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나도
내가 자랑스러웠던 1년이었다.
물론 저 통장으로 돈이 들어가기 까지 쉽지 않은 하루하루 알바생활이었고 통장을 발급받는 과정도
급여 입금을 증명하기 위해서 취업증명서를 떼오라는 은행 측의 요구가 있어서 바쁜 보로니아 사장의
도장을 받고 다시 은행에 가서 통장을 받은 과정이 있었지만 일한만큼 정직하게 입금되었던
알바생활 덕분에 혼자 벌어 유학생활도 할 수 있었고 열심히 살아낸 표시같아서 저 통장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크게 요행이랄게 없는 삶을 산 것 같아도 하마다상이 출하부의 책임자였던 것과 보로니아 근처에 방을
얻었던 것은 행운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