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가택연금 생활 1일 차

비가 내리는 오늘 새벽 남편은 시댁으로 김장을 하러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일어나지 못했고 어젯밤에 미리 준비해 놓은 가방을 들고 그는 갔다. 만약 남편을 제외한 우리 중 누군가 같은 시간에 어딜 가야 했다면 남편은 일어나서 미리 차를 덥혀 놓았을 텐데 우리는 그에게 받기만 하고 같은 양으로 돌려주질 못한다.


버스를 타고 이른 시간의 기차를 타고 갔어도 시댁까지 들어가기까지 4시간은 걸렸을 테니 만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5년도 넘은 남편의 중요한 일과가 된 '김장봉사'는 변함없이 3일을 써야 끝나게 되어 있다.


뽑고-절이고-씻고, 전국적으로 배추 파동이 일어나도 어떻게든 배추를 구해서 김장을 담그고야 마는 불굴의 시부모님이 계시는 한 시댁의 김장이 멈추는 날은 두 분이 돌아가셔야 끝나는 행사일 것이다.

올해도 밭에서 기른 배추로 부족해서 20 포기를 농협에서 샀는데 30 포기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장에 내가 간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계산이냐며, 하나로마트에 다시 열 포기를 반납했겠지만 이제 시댁 김장에서 나는 빨간 줄 친 인간, 관여할 입장이 아니다. 열 포기를 더 하거나 말거나 내 일이 아니다 이 말씀.


나: 살아있는지 전화했어?

남편: 응,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절여놓으셨더라. 이따 뒤집기만 하면 될 거야.

나: 춥지 않아. 따뜻하게 하고 자.

남편: 그런데 아버지가 이따 잘 때 전기장판 한 칸만 키고 자라고 벌써 말씀하셨어.

나: 그래, 김장 잘하고 살아서 돌아와.


웃자고 하는 말들이 아닌 진지한 대화를 남편과 나눈 후 하루 세 번의 전화로 그의 안부를 묻고 나는 남편이 없는 홀가분한 저녁이라 샌드위치로 저녁을 먹고 늦게까지 안 자고 돌아다녀도 되니 커피까지 마시고 저녁 시간을 보내며 글을 쓰고 있다.


김장이 싫어진 이유에는 시댁만 있는 게 아니다. 김장이 중요한 행사이기로 치면 우리 엄마도 만만치가 않다. 텃밭이 있는 사람만 배추를 절이는 게 아니라 우리 엄마처럼 남이 절인 배추를 믿지 못하는 사람도 배추 절이기부터 직접 하기 때문에 친정의 김장도 무서운 행사이긴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는 엄마가 김장을 담그고 보름 정도 후에 돌아가셨다.


2014년 12월 15일 새벽에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 울음도 안 나왔다. 쓰러지시고 일주일은 일반 병실에서, 일주일은 중환자실이 인생의 마지막 순례였던 아버지는 급한 성격만큼 생명줄도 확 놓고 가버리셨다.

아버지는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다녀올게'라는 네 음절 중에 두 음절 '다녀'소리만 우리 귀에 들렸고 '올게'라는 두 음절은 멀리 골목 밖에서 들리던 분이셨다.

그렇게 급하고 불같은 성격답게 중환자실에서 엄마를 오랫동안 힘들게 하지 않고 불꽃처럼 사라지셨다.


살아계셨을 때는 우리들보다 엄마 속을 더 썩였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청한 마지막 화해는 중환자실에서 잠깐 정신이 드셨을 때 엄마의 손을 포개어 잡아 주신 것이다


정해진 면회 시간에 엄마가 아버지의 손을 잡자 아버지가 엄마 손을 빼서 엄마의 손등을 한 번 더 잡아 주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그걸 몇 번이고 말하면서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했다는 건 굉장한 일처럼 말씀하셨고 아름다운 화해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은 넘게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때로는 분노에 차 올라 아버지를 소환했다.


저 정도의 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째서 방에 걸려 있는 약혼 사진과 결혼사진을 떼지 않는지가 이상할 정도였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지 작년이 딱 10년, 올해 11년 차지만 아직도 사진은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긴 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버지 흉을 덜 본다는 거, 십 년이면 어느 정도 사그라드는 모양이다.


엄마가 네 살 아래라고 해도 누가 봐도 누님처럼 보이는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진짜 누님처럼 아버지가 사고 치면 뒷수습 다 해 주고 어디서 싸울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만 큰소리칠 줄 알지 남한테는 제대로 한 방 먹이지도 못하는 무른 아버지 대신 싸움도 해가면서 그렇게 사셨다.


그렇게 산 것 치고는 아버지가 포개어 손등 한 번 잡아 준 걸 극적인 화해로 감격스러워하는 엄마가 싸게 합의를 봐준 거지만 엄마의 김장 직후 급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두고 엄마는 "김장해서 맛있게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셨고 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슬펐던 나는 엄마의 김장 이야기가 그렇게 듣기 싫었다.


우연히 맞물린 김장과 아버지의 죽음의 인과관계에서 나는 무언가 내 마음의 분풀이가 필요했고 앞으로 시댁 김장이고 친정 김장이고 안 갖다 먹고 알아서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깍두기도 못 담그는 내가 김치 독립 선언을 하고 알아서 살겠다고 폭탄을 양쪽집에 터뜨리고 그런대로 약속을 잘 지키면서 살고 있다. 어제는 생협에서 완성 김치 10킬로를 사다 냉장고에 넣어 두고 마치 내가 한 김장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하루 세 번 전화로 남편의 생사는 확인됐고 내일은 배추를 씻고 속을 만드는 일이 남았고 그건 남편과 어머니의 일이 될 것이다. 본인 말로 오늘부터 수감 생활이라고 했으니 3일이 지나야 출소해서 집으로 올 것이다.


수감생활 1일 차, 시어머니로부터 들기름을 하사 받았다고 사진을 보냈다.


김장으로 마음이 빠지직했던 시작은 시어머니로부터였지만 김장으로부터 진짜 손절을 하게 된 것은 엄마가 김장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김장의 노동에서 스스로 손절했다는 거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중요한 가치이지만, 남편이 시부모님에게 하는 마지막 효도는 아마도 '김장'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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