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없으니 아쉽다.

시댁과 친정의 김장은 내일로 끝이 나고 남편은 스스로 가택연금 3일 차인 내일 집으로 올 것이다. 어머님이 주신 통깨와 들기름, 내일 김장하고 겉절이나 한 봉투 가져오라고 했는데 가져오면 고맙고 안 가져와도 사다 놓았을망정 나에게도 김장 김치가 있으니 아쉬울 것은 없다.


아쉬운 게 있다면 남편이 없다는 거다. 남편이 없으니 아침에 커피 내려줄 커피 집사가 없어서 답답했고 빨래를 개고 널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할 일이 하나 늘어서 바빴다. 늘 집에서 무언가를 쏠쏠하게 해 주던 남편의 빈자리는 가깝게는 빨래와 커피에서 구멍이 컸다.


반면에^^ 늦게까지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어슬렁거리는 자유가 있었으니 시댁의 김장은 나에게 3일의 휴가를 줬다. 남편 말이 내년부터는 각자 집에서 알아서 김장 담가 먹으라는 시아버지 말씀이 있었다니 길고 길었던 시댁 김장의 애증의 역사는 올 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고 역사의 마지막 장까지 함께 하고 있는 남편이야 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왕고집에 다른 사람의 말은 전혀 듣지 않는 막귀를 갖고 있는 시아버지에게 그래도 말이 먹히는 유일한 자식이 남편이고 큰아들이라서 아니라 내 남편이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면을 그나마 인정해 주시느라 자식들 중 남편의 말은 듣는 시아버지가 그나마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삼 년을 슬퍼한 게 아니라 십 년을 소환해서 상황 별 맞춤으로 아버지의 흉을 봤는데 나는 아마 남편이 죽어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남편이 이걸 보면 어쩌나 할 정도로 시댁 김장에서 학을 띤 이야기를 써 놨어도 오히려 그걸 보니 당신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더 미안해지더라는 말에 1994년과 1995년의 김장 수난이 잊힐 정도였으니 진심을 담아 건네는 말 한마디는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다.


내가 쓴 글을 남편이 안 볼 수가 없다. 그도 내 브런치의 독자이니 새 글을 쓰면 알림이 뜨고 남편은 빼놓지 않고 읽는 충실한 독자이니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소환해서 야무지게 분풀이를 하는 내 글은 남편에게도 아플 수 있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량이 그에게 있으니 나보다는 나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어제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 주랑이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줌마는 애들이 셋 있었는데 큰애와 둘째의 이름을 붙여서 아줌마를 부르지 않고 우리 엄마부터 셋째 딸 이름을 붙여서 '주랑아' 하고 불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랑이 아줌마'라고 불렀다.


친정집 작은 방에서 세를 살던 아줌마는 엄마를 언니처럼 따르며 모든 것을 우리 엄마와 함께 하던 영혼의 단짝이었다. 우리 집에서 몇 년을 세 들어 살다가 집을 사서 이사 나갔어도 같은 동네에 살았고 인천으로 이사를 갈 때는 엄마랑 아줌마는 부둥켜안고 우느라 트럭이 출발을 못 했었다.


내가 중학생 때 아줌마네 셋째 주랑이가 네 살이었고 위로 두 아이들은 내 동생 둘과 나이가 비슷해서 골목에서 넷이서 아방구를 하면서 놀거나 자전거를 타고 놀았는데 내 동생이 자전거를 잃어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랑이 아줌마네 둘째도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주랑이 오빠가 울면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서 우리 엄마에게 "아줌마, 저 땡땡인데요. (흑흑흑) 우리 집 전화번호가 뭐예요?" 하면서 엉엉 울었을 때 자전거 잃어버려서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우리 엄마는 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어린애가 당황해서 자기 집 전화번호가 기억이 안 나고 매일 들락거리면서 놀던 우리 집 전화번호는 기억이 난 거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아줌마 우리 집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사건은 오랫동안 주랑이네 오빠를 놀려 먹던 일이 되었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네 살 때 우리 집으로 이사 왔던 주랑이는 마흔이 넘고 자전거 잃어버리고 자기 집 전화번호도 잊어버렸던 꼬맹이는 경찰관이 되었다. 그랬으니 아저씨가 돌아가실 때도 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죽음은 슬픈 일이라서 나는 잠시 주랑이 아버지를 생각했다.


사우디에서 일했던 주랑이네 아빠가 벌어온 돈으로 우리 집 작은 셋방을 나가서 동네에 집도 사고 인천으로 이사도 갔어도 엄마랑 아줌마는 계속 연락하고 지냈던 사이라서 그러기도 쉽지 않은 남남 관계여서 아저씨 돌아가셨다는 말이 나에게는 친척 아저씨 돌아가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 말이 아저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교통사고로 몇 년을 누워계셨는데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서 돈도 못 쓰게 하고 움켜쥐고만 있어서 아줌마가 힘들어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도 돈을 움켜쥐고 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아줌마도 몰랐던 돈이 아저씨 통장에 사천만 원이나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갑자기든 예고된 죽음이든 정리가 보통 힘이 드는게 아니다. 우리집도 그랬다. 아버지 통장에서 예금을 찾을려고 해도 절차가 필요했고 고생은 엄마가 해서 샀고 이름만 아버지 이름인 땅들도 엄마 이름으로 돌리는데 여간 애를 먹은게 아니었다.

절차라는게 그런거였다.


엄마 말이, 자전거 잃어버리고 울면서 우리집에 전화했던 둘째가 일주일 연가를 내고 일 처리를 다 했다고 주랑이 아줌마가 말해줬다고 했다.


아버지가 의식없이 누워계실때 큰 아이는 군인이었고 고등학생이었던 둘째와 중학교 3학년이었던 셋째를 데리고 전북대 병원에 가서 넷이서 아버지를 위해 가톨릭식의 기도를 통성으로 바친 것이 아버지가 살아 계실 떄 내가 해 드린 마지막 언어전달이었다.


할 수 있는게, 산 사람이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다, 아버지가 도서관에서 빌려서 연체중이었던 책을 반납하는 것은 우리 몫이었나보다.


없으니 아쉽고 있으면 신경 쓸 게 많은 남편이지만 고집불통 시아버지를 공경하는 남편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가 돌아오면 우리는 아침마다 홀빈을 갈아서 바로 내려 주는 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옥상에 널어 칼각으로 개어놓은 빨래를 볼 수 있다. 남편이 없는 이틀째, 남편이 없으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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