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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커피는 위로다.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헤이안 진구 스타벅스를 추억하면서...

2018년 4월의 교토는 낮에는 더웠고, 이미 초여름 날씨였다.

4월에 이미 활짝 피어서 더러는 꽃이 진 나무 아래에서 입학 사진을 찍는 도시샤 대학교의 학생들이

인상적이었다.


새벽 비행기를 타느라 겨울옷 비슷하게 입고 갔던 내 옷차림과 남편의 옷차림은 교토 날씨에

나가떨어졌다.

땀이 뒷덜미에서 죽죽 났고, 만나기로 했던 부동산의 쓰시마상은 점심식사 중이라서 아직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도시샤 대학교의 정문 앞에서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이미 지불한 보증금과 집에 관한 이런저런 돈들, 과연 교토에서 오늘 밤 잠을 잘 수 있을까


웃고 있는 도시샤 대학교의 신입생들과 대학교의 입학 식에 따라온 부모들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불과 한 달 전에 서울대학교 입학식에서 나도 저렇게 웃었었는데 라는 행복한 기억은

땅에 떨어진 벚꽃잎이 되어 버렸고, 교토의 내 방 한 칸의 열쇠를 쥐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2018년 서울대학교 입학식 "도시샤 꺼져버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흰색 소형차를 타고 도시샤 대학교 정문 앞에 나타난 쓰시마상은 그전까지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만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인간이 그동안 나랑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집을 알선해준 부동산의 쓰시마상이로구나!


데마치 야나기에 있는 부동산 사무실에서 나머지 잔금과 수속을 마치고 히가시야 마구에 있는 원룸까지만

차로 데려다주고 201호로 올라가세요 라는 말만 남기고 부동산 사무실 직원은 돌아갔다.


우리나라처럼 함께 올라가서 문도 열어주고 구조도 설명해주는 친절한 시스템은 없었다.

집 구조에 대해서는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방구조를 미리 봤었기 때문에 크게 궁금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밟으면 삐걱거려서 아래가 텅 빈 것 같았던 마룻바닥과 네모반듯하지 않고 꺾인 형태의 방 모양은

이상했으며, 남향 이랬으면서 햇빛 한 주먹 들어오지 않아 말뿐인 2층은 실망스럽기는 했다.



그래도, 교토에 월세를 내는 방이 있어서 우리 가족들도 마음 놓고 교토에 놀러 왔었고

좁은 방에서 딸 친구도 재워주고, 지인도 재워주고, 일본인 지인도 재워 주면서 방이 있는 것을

유용하게 잘 써먹었다.


하지만, 문제는 공간의 분리 없이 통짜로 된 원룸에서 지낼 때 인간은 답답함을 느끼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랬다.

방에 들어가면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얼른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갇혀있는 기분이 들었고 하여간 잠자는 시간 말고는 집에 있기가 싫었다.


아마 좁은 탓보다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낮에도 불을 켜고 앉아 있는 그 답답함이 싫었고

바닥난방이 되지 않아 늘 서늘했던 마룻바닥도 한몫했을 것이다.


학교와 알바로 바빴던 평일에는 그럭저럭 저 방에서 버텼고 알바가 쉬는 날에는 혼자서 가보고 싶었던 곳을

돌아다니다가 나만의 휴식장소로 가장 많이 간 곳은 헤이안 진구 앞 츠타야 서점과 붙어 있던 스타벅스였다.

츠타야 서점의 2층에는 비싼 레스토랑이 있었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나츠 미상과 그곳에서 식사를 했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붐볐던 스타벅스였다.

서점 구경도 하고, 무거운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블로그도 쓰고 한국 인터넷 소식으로 기사도 실컷 읽고

다음 날 수업 준비까지 착실히 하던, 헤이안 진구의 스타벅스는 내게는 해방구였다.

밤 10시면 문을 닫았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있다가 4월의 쌀쌀한 밤공기에 오들오들 떨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 교토의 사람들은 일찍 집에 들어가는지 골목에는 사람이 없어서 무서웠었다.


내가 가 본 스타벅스 매니저 중에 가장 얼굴이 예뻤던 매니저가 그곳에 있었다.


전 날 사 마신 스타벅스 종이컵을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서 다음 날 학교 갈 때 커피 한 잔을 내려 학교까지 들고 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진상스러운 아줌마였다. 심지어 커피를 시키지 않고 눌러앉아서 공부한 적도 있었던 헤이안 진구 앞 스타벅스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웠다"


유 씨들 밥해주다가 내 인생 쫑 날것 같아서, 일흔두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나도 일찍 죽을 것 같아서

아이들 예체능 뒷바라지에 영혼과 돈까지 탈탈 털려서 더 이상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선택했던 1년간의 교토 생활에 커피는 진정한 동반 유학자였다.


교토는 가장 일본스러운 도시였음에도 빵과 커피에 있어서는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교토 3대 커피 중 하나라는 이노다 커피는 본점이 학교 옆에 있어서 눈 구경 실컷 하고 다니던 곳이었다.




빵집 아줌마들도 커피를 좋아했었다.

오전 부터 풀타임으로 일했던 한카이상은 새벽부터 나와서 일을 하고도 점심 시간이면

커피 한 잔에 우리가 빵의 귀라고 불렀던 식빵 귀퉁이 몇 쪽을 먹는 것이 점심 식사였었다.


어쩜 우리는 커피의 향기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노란색 커피 중독자셨다.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커피를 타라고 재촉을 해서 엄마가 늘 버럭했었던 아버지의 커피는

노란색 커피믹스였다.


커피믹스가 나오기 전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하나로 커피를 탔을 때부터 커피를 좋아하셨는데

나는 그 비율을 늘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내가 타다 드리는 커피는 맛이 없다고 하셨다.

그럼 내가 화를 벌컥 내면서 "그럼 아빠가 타서 마시든지"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중환자실에 계실 때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남편이 친정에서 식사 후에 커피를 한 잔 마신다고 했을 때

도끼눈을 뜨고 결사적으로 말렸었다.

"마시지마,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는데 아버지가 젤로 좋아하는 커피 정도는 참아야 되는 거 아냐"

진심으로 정색하면서 싫은 티를 냈지만 남편은 커피를 마셨고, 남편도 그 커피가 내 앞에서 당당하게 마시던

마지막 커피 믹스가 된 것 같다.


그때까지 나도 커피믹스를 좋아했으나, 아버지가 중환자실로 들어 가신 날부터 끊었고

지금은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커피믹스나 아메리카노나 사람으로 따지만 그 놈이 그 놈일지 몰라도 아버지 좋아하시던

커피믹스라도 끊어야 내가 그나마 자식으로서 의리를 지키는 기분일 것 같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커피믹스 봉지도 쳐다보기 싫어서 집에 남아 있던 커피도 버렸다.


죽음 앞에서 아무 의미없는 것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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