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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일요일이 가는 소리

Don't worry, be happy

돈 워리, 비 해피


스물일곱에 결혼해서 여덟에 큰 애를 낳고 보니 앞으로 얼마든지 수취인이 내 앞일 게 분명할

인생의 고난들이 조금씩 보였는지, 내 발로 성당에 나가서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다고

교리반에 등록을 했다.

대부분 누군가의 권유로 시작하는 영세자 교리반에 나는 나를 권유해서 자발적 의지로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댁에 말씀을 드렸더니 아직 결혼 전이었던 남편의 막내 남동생이 

"형수, 제사 지내기 싫어서 그런 거 아녀"

속에서 저런 싸가지 소리가 저절로 방언처럼 터질 즈음

한 번도 내 편은 안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시어머니가 조용히 개소리를 잠재워 주셨다.

"너는 큰 집에서 여태 제사 지내는 거 보고도 그런 소리 하냐"


우리 시댁은 작은 집이고, 큰 댁은 천주교 집안이라 큰 아버지 큰 어머니 모두 성당에 열심히 다니시는 분이셨고

물론 큰 댁에서 지내는 조상 제사도 자식들 편리하자고 묶음으로 지내지도 않고 일 년에 몇 번씩 지내는걸

직접 그 제사에 남편보다 참석률이 좋았던 시동생이 나한테 했던 소리치고는, 성공률이 꽝인

공격성 발언이었지만, 큰 며느리라는 위치는 그렇게 오해받을 수도 있겠구나 싶긴 했었다.


"똑똑, 세례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노크 영세자로 입문해서 의욕은 넘쳤으나 대학교 입시에서도 재수를 안 했는데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는 일은 재수는 기본에 삼수까지 했다.

전주 송천동 성당에서 시작한 교리반을, 남편의 대전 발령으로 중간에 대전 옥계동 성당에서

중간 과정을 마쳤고, 결국 셋째를 출산하기 전 만삭이었을 때 대구의 칠곡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예쁜 세례명이 로망이었던 나는 신부님들조차 내 세례명을 듣자마자

"이런 세례명은 처음 들어봅니다. 자매님"이라고 말하는 "안투사"

"안투사"가 세례명이다.


안투사를 말하려면 내 친구 혜숙이

지금은 살레지오 수도회 소속 수녀님이 되신 중학교 일 학년 때부터 친구 혜숙이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혜숙이의 세례명이 안투사였고, 종신 서원을 받기 전 새로운 세례명을 받는 혜숙이의 원래 세례명인

안투사를 내가 쓰기로 했다.


"이런 세례명은 처음 들어봅니다. 자매님"이라고 말하는 "안투사"

덕분에, 세상에서 하나뿐일 것 같은 예쁜 천주교 세례명에 대한 로망은 깨 박살이 났지만

언제나 그리운 혜숙이의 세례명을 내가 쓰고 있고, 남들이 나를 안투사 자매님이라고 불러 주는 동안은

혜숙이는 언제나 나와 함께 일 것 같아서 지금은 볼 수 없는 혜숙이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라도 삭히고 있다.

그리고 신부님들조차 처음 들어본다는 흔하지 않은 세례명을 갖게 되었다.

처음부터 내 종교가 천주교였냐, 그건 아니다.


원래의 내 종교는 원불교였다.

초등학교 이 삼 학년 때부터 큰 집 언니 오빠 따라서 나갔던 원불교 교당에서 윤기가 잘잘 흐르던 쪽진 머리에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으신 교무님의 법회를 방석도 없이 바닥에 앉아 다리가 저리게 듣고

다리가 저려 코에 침을 바르면서 일어났지만, 간식으로 사탕 하나도 주지 않았던 원불교 교당을

고등학교 때까지 어림 계산해봐도 십 년도 넘게 다녔었다.


법회를 듣다가  따분해서 다시는 나가고 싶지 않다가도 가끔은 어린 마음에도

콕 박히는 한 줄 글이 있어서 마음을 잡고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였을 때 원불교 어린이 법전에 있던 말씀을 보고 심쿵했었다.

"열매가 씨앗이 되고, 씨앗이 열매가 된다"

열매는 원래 씨앗이었으며, 잘났다고 달려 있는 열매도 언젠가는 땅에 떨어져

씨앗이 될 거라는, 구절을 보면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처럼

나도 어린 게 뭘 안다고 한 줄 말씀에 심쿵해서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 때까지 원불교를 다녔고

천주교 세례명 같은 원불교 식 이름도 나름 정결한 의식 후에 받았다.


"법선" 法善

법 선이라는 이름이 나의 원불교 이름이지만, 저 이름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원불교 다니기를 그만뒀으니

교당에서 법 선이라고 불려졌던 것은 열 번도 안될 것 같지만 어쨌든 원불교 교적에는 아직도 남아 있을

이름 "법선"이다.


덕선이도 아니고 법 선이

법선이와 안투사

이중 국적도 아니고 아니 이중 교적, 아니 이중 국적 맞네


부처님 나라와 하느님 나라 두나라 여권을 가지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니 죽어서 지옥 갈 일은 없을 듯 하지만 인생에 큰 변화가 없는 한 죽을 때는 고나경 안 투사 자매님으로 마감할 것 같다.

1999년에 대구 칠곡 성당에서 신자들도 무서워하던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고

(키가 보통 사람 이상으로 크셔서 수단 자락 휘날리며 걷는 모습이 그림자도 무서웠었다)

셋째는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고, 둘째와 큰 애도 유아 세례를 받게 했다.

그때 아이들의 세례명을 수녀님이 된 혜숙이가 편지에 써서 보내줬다.


핸드폰으로 소통을 하던 때가 아닐 때라서 대구 살 때까지는 혜숙이랑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직원 관사에 살 때라서 집집마다 가구 위치까지 뻔히 알던 사이들이었는데

일요일에 성당을 간다고 허둥대면서 집을 나서면 관사 마당에 나와서 놀던 직원 부인 중 한 명이

"성당 갈라 말고 집이나 쫌 치우소"

돌직구를 날렸었다.


애가 셋인 우리 집에 한 번 올라왔다가 정신 사납게 어질러졌던 모습에 질렸던지 다시는 놀러 오지 않던

일층 주영이 엄마가 대구 아지매답게 핵심만 뭉쳐서 날린 돌직구에 대가리가 깨졌지만

꿋꿋하게 대구에서 세례 받고 법 선 이를 버리고 안 투사로서 묵주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십이 년째 안투사로 살고 있는 중이다.


교토에 있는 동안은 카와라마치에 있는 성당에 나갔다.

물론 나갈 수 있을 때만 관광객 마인드로 말이다.

일요일 알바를 매주마다 여덟 시간을 해 줘야 급여가 어느 정도 채워지기 때문에

자급자족 아르바이트생으로 살았던 2018년은 무늬만 천주교 신자로 살았지만

2018년 4월에 교토에서 첫 미사를 드리러 갔을 때 고해성사실에서 신부님에게 일본어로

고해성사를 하다가 오히려 신부님이 나에게 "저 한국 사람입니다"라는 고해를 해서, 급히 한국말로

고해를 하고 죄를 용서받은 특별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가톨릭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극히 적기 때문에 주변에서

교회를 찾아보기도, 성당을 보기도 어려웠다.

빵집 아줌마들 중에서도 아무도 교회를 다닌다거나 천주교 신자인 사람들이 없었다.

동네에 흔하게 있는 신사나 절은 찾아다녀도 따로 교회를 가거나 성당을 가는 사람은 드문 것이

종교에 대한 일본인들의 특징이다.


절이나 신사나 모양은 비슷하지만 종을 땡 하고 흔들어서 친 다음 손뼉을 두 번 탁탁 치는 곳은 신사이고 

그냥 합장하고 절을 하는 곳은 절이다.


2019년도에 나까무라 아줌마와 한카이 아줌마가 한국에 놀러 왔을 때 함께 명동성당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한카이 아줌마가 손녀들에게 おまもり (오마모리) (부적)으로 주려고 한다면서 묵주를 샀었다.

묵주가 부적이 될 수도 있는 게 일본 사람들이다.


부적을 특히나 좋아하는 게 일본 사람들이라서 절에서 파는 교통사고 방지 부적이나, 입시 합격 기원 부적들을

사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데 우리나라 부적처럼 종이에 빨간 글씨로 써져 있는 게 아니라

열쇠고리 형태로 되어 있는 게 많아서 장식처럼 가방에 달고 다닌다.


금각사의 부적은 특히나 효과가 좋았는지, 교토에 있을 때 놀러 왔던 지인은 함께 놀러 갔던 금각사에서

입시 합격 부적을 사서 돌아 간 후에 딸이 삼수를 끊어내고 좋은 대학교에 합격을 했었다.


천주교 신자지만, 나도 코로나 끝나면 금각사로 부적 하나 사러 가고 싶다.

아들 취업성공 부적도 하나 사서 바이올린 가방에 달아 주고 싶고, 막내도 아프지 말고 올해 좋은 기록 내라고

운동 가방에 열쇠고리로 끼워 주고 싶다.


원불교와 천주교 양다리를 뛰어넘어 교토의 금각사까지 세 다리를 걸치는 바람둥이가 되더라도

금각사 부적 하나씩 자식들에게 주고 싶은 게 천주교 신자인 엄마의 솔직한 마음이다.




1. 세탁기에 빨래 넣고 돌려서 널기

2. 일요일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에는 성당에 가기


단순했던 일상이었던 두가지 일들이 교토에서 혼자 살 때는 굉장히 하고 싶은 일이었다.


일본 드라마에서 세상에서 청소하기가 가장 싫다는 딸에게 엄마가 이런 말을 한다.

"지진으로 집을 잃은 여자들이 집안 청소를 얼마나 하고 싶어하는 줄 알아"


세탁기 없이 빨래방에서 감질나게 빨래를 해 오던 생활을 일년 동안 하다보니 세탁기에 마음대로

빨래 한 번 해봤으면 하던 게 그때 내 바램이었고, 일요일 여덟시간 알바에 빵집 노예처럼 살 때라서

성당 한 번 편하게 가봤으면 싶었다.


지금은 빨래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미사도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도 나갈 수 있지만

더 모았다가 다음에 해야지, 애들 밥 차려 줘야 되니까 교중 미사 잠시 빠지지

지금은 또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래도 Don't worry, be happy 

돈 워리 비 해피하고 싶어서 묵주 알을 굴리고 일요일이면 성당에 나가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면서

미사를 드린다.


일요일 오후에 글을 쓰다가 마무리는 목요일 오전이 됐다.

오늘도, Don't worry, be happy돈 워리, 비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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