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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クラシック(클래식)

베토벤과 성순이네 이발소

코로나로 타격을 입지 않은 곳이 드물지만, 우리 아이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세상이 모두 자기만의 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세상이 되었고

우리 아이들의 폭탄이란!!

음악 하는 두 아이는 연주회와 레슨이 줄어들어 돈 벌 기회와 어딘가에 응시조차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고, 운동하는 셋째도 작년부터 시합이 줄거나, 없어져서 올해 4학년 성적을 잘 내서 

실업팀에 가야 되는데 평가받을 무대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연주회를 언제 보고 안 봤는지, 그런 게 다 옛날 일처럼 돼버렸고

코로나가 덮친 시간은 먹고살아야 하는 근본적이고 본능적인 부분도 손해를 입혔지만

정서적인 부분에도 많은 손실을 입혔다.


음악회가 없는 시간들

연주가 없어진 밤


우리 아이들은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전공이라서 클래식 음악 연주회에 주로 다녔지만

성당 성가대 알토 10년이 넘은 나는 합창도 좋아하고 소박한 연주회도 좋아하고

음악이 주는 감동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게 클래식 음악이 가지고 있는 한 방이라

일본어 표기로 클래식은 クラシック(크라싯꾸), 음악회를 많이 다녔다.




클래식을 주제로 했던 일드 중에 재미있게 본 것은 のだめ カンタビレ(노다메 칸타빌레)였다.

원작이 만화여서 그런지 드라마를 만화로 보는 것 같은 고민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유명한 연주자의 연주에서만 감동을 받는 건 아니다.

제주도 한림성당에서 봤던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의 연주에서 초등학교 2학년과 유치원생이었던

우리 아이들은 졸지도 않고 피아노 연주를 듣고 함께 손뼉 치고, 한림에서 소길리로 돌아오는 동안

이희아가 쳤던 터키 행진곡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사람이 못하는 일은 없구나, 손가락이 부족하면 바삐 움직여서 부족한 화음을 메꾸면 되는 거고

좋아하는 마음에 의무감 같은 책임감이 얹어지면 해낼 수 있다는 걸 이희아의 독주회에서 배웠다.


그래서 나도, 다시 들어간 음악대학에서 4학기 동안 머리 쥐어짜가면서 악보 외우고

조카 나이쯤 되는 아이들 앞에서 흰 블라우스 입고 검정 치마 질질 끌어가면서 베토벤의 월광 3악장을

졸업 연주회 곡으로 치고 졸업을 했다.

내가 향상 음악회에 나가기 전 떨리는 마음을 우황청심환을 원샷하며 가라앉힐 때, 조카 같은 현역 아이들은

화장실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무대에서 소나타곡을 쳤다.

"담배는 왜 피우니? 끊어라"

꼰대 아줌마 잔소리를 하면, "우황청심환 보다 이게 더 잘 들어요" 하던 수지가 생각난다.


우리 엄마 황여사 말에 의하면 멀쩡하게 4년제 대학교 졸업해놓고 초등학교 2학년, 유치원 둘

애가 셋이나 되는 아줌마가 뭐하러 다시 2년제 대학교에 들어가냐고

합이 6년, 의대 공부하냐고 고생스럽게 뭐하는 짓이냐고 하셨지만

공부 다시 시작했을 때 엄마가 한약 지어 준 일을 엄마도, 남편도, 돌아가신 아버지도

기억하지 못하실지도 모른다.

나만 기억한다. 엄마가 지어줬던 한약


손톱 끝이 찢어지게 연습을 해서 지도교수인 안혜정 교수가 그만 연습하라고, 레슨 오지 말라고

안타깝게 말씀하셨을 만큼 무식하게 연습했어도, 지금은 그 악보를 도대체 내가 어떻게 외워서

쳤었는지 남일 같기만 하다.


잠시 미쳤었던 2002년 3월부터 2005년 2월까지의 일이다.


하지만 그때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음악을 전공하는 아이들이 되었다.

리포트 제출이나, 교수님의 연주회를 봐야 되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

장르 불문 음악회를 보러 우리 아이들과 나는 열심히 소길리 해발 400 고지에서

제주 구 시가지를 운전하면서 누비고 다녔었다.


유치원생이었던 딸은 그때 자기가 본 연주회가 너무 다양하고 많았기 때문에

(합창, 관악 페스티벌, 동굴 음악제, 제주 시향 정기 공연, 이희아 연주회, 정트리오 연주회, 오페라)

연주회라면 정말 지긋지긋하게 많이 본 게 제주도 살 때였다.


그래서 딸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다른 아이들도 다 그러고 산 줄 알았었는데, 서울에 살았으면서도

제주도 시골에서 살았던 자기보다도 음악회를 더 안 보러 다녔던 아이들이 바로 음악대학

자기 동기들이었다며, 소길리가 서울을 이겼다고 했다.




제주도 한림성당에서 이희아의 피아노 독주회를 보면서 가슴이 애리는 듯한 슬픔과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제주 국제 컨벤션센터 개관 기념으로 정트리오의 연주회가 있었을 때

남편이 받아 온 R석의 티켓은 찢어버리고 싶었을 만큼 '벌' 석도 되는 게 연주회 티켓이 되기도 한다.


살면서 정경화 씨와 그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쳐 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R석이었다.

아직 초등학생, 유치원생이던 아이들은 정트리오고 나발이고 자기들이 모르는 음악의 세계에

졸음으로 보답할 뿐, 남편도 없이 혼자 아이들 데리고 갔었는지 조느라 정신없는 두 아이들의

머리통을 받치고 양 팔이 쥐가 날 만큼 아팠던 기억밖에 나질 않던 제주 국제 컨벤션센터 개관 음악회였다.


아니,남편도 갔던 것 같다.

안그랬음,내가 둘의 머리통을 받치고 있었을 때 어디선가 호박 떨어지는 소리가 쿵 하고 났을텐데

남편이 한 놈 머리통을 책임졌었지 싶다.



몹시 오랜만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갔다.

비가 하루 종일 와서 밖은 습했지만, 예술의 전당 로비는 화려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절제된 옷차림의 사람들, 곳곳에 보이는 꽃 들, 커피를 들고 있는 사람들

베토벤의 전곡 시리즈에 도전하는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의 베토벤 황제와 영웅 두 곡의 연주회였다.



클라리넷 자리에 앉아 있을 딸을 기다리며 사진을 찍고 음악회를 기다리는 잠깐의 긴장감

딸이 앉아서 연주를 하겠지만, 이제는 딸이 아닌 연주자로서의 딸을 보려고 한다.

자식과 거리를 두는 연습 중이다.


바이올린 케이스만 들고 지나가는 아이들만 봐도 내 아들 같아서 뒤돌아보게 되고, 관악기 가방 들고

가는 아이들은 딸 같아서 돌아보게 되던 그런 때도 있었다.

이젠 그러지 않으려고, 그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부모로서 거리두기를 하려고 한다.


남편의 비상금만 날아가는 돈이 아니라, 렛슨비도 그랬었다.

돈뿐 아니라, 우리 부부의 생활도 아이들의 레슨과 맞물려서 돌아가던 시절을 십 년 정도 보냈나 보다.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해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왜냐고? 힘들었으니까


베토벤의 영웅은 현악기가 반주를 쉬지 않고 하고 관악기가 포인트가 되는 곡이었다.

함께 봤던 승범이가 자기도 영웅 반주해봤었는데, 활이 쉬지 않고 움직여서 바이올린 하는 애들끼리

십 원짜리 활이라고 한다고 했다.


한 번 긋는데 십 원짜리가 모여져서 연주회 티켓 한 장갑이나 될까 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다.



베토벤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봤던 음악가였다.

이발소 집 딸 성순이는 키도 컸고, 얼굴도 시골 아이 치고는 흰 편에 가장 특이했던 점은

우리 모두 상고머리를 하고 다닐 때 성순이는 곱슬머리 단발이었었다.


성순이네 이발소에 놀러 가면, 벽에 베토벤 아저씨 사진인지, 그림인지 걸려 있었다.

베토벤이 누군지 모를 때, 그림으로 베토벤을 배웠다.



성순이네 이발소에서 베토벤 사진을 처음 봤을 때의 사진이 바로 저 그림이었던 것 같다.

어디나 돌아다니는 베토벤의 증명사진 같은 저 얼굴과 성순이는 많이 닮아 있어서

띨빵 했던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베토벤이 성순이네 친척인 줄 알았다.


선생님이 국어 책을 읽으라고 시키면 성순이는 두음법칙 무시하고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고

음가 그대로 읽는 아이였다.

예를 들어 "독립신문"을 읽을 때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독 닙 신문"이 되지만 성순이는

독. 립. 신. 문

리을에 힘을 꽉 주고 음가 그대로 읽었고, 그래서 성순이가 책을 읽을 때는 어린 내가 들어도 부자연스러웠지만

선생님도 그렇게 읽지 마라 하지 않으셨고, 성순이도 말해도 들을 아이도 아니었다.


이발소 집 딸 성순이는 그래서 머리가 상고머리가 아니었을까

베토벤도 한 고집했었을 음악가였다.

선배 작곡가들이 귀족에게 고용되어 연주회를 했을 때, 베토벤은 귀족에게 후원을 받았고, 후원을 받았으나

귀족에게 종속되는 일은 없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줬어도 베토벤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관계가 지속되지 않았다.


베토벤이 작곡했던 명곡들을 편하게 앉아서 듣는 것만 해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저녁이었다.

시간이 가면 지금의 상황들도 나아지고 우리 아이들도 연주에 바쁜 날도 올 거라도 생각한다.


살아보니

지나가지 않는 시간이란 없었으니

연주회를 골라가면서 다닐 날이 또 올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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