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서 부자다
내가 담당한 건축 제도반에는 장난기 많은 프라밧이란 학생이 있다. 프라밧은 정이 많고 나서길 좋아하며 성격이 밝은 학생이다. 프라밧은 이 반에서 본의 아니게 반장역할을 하고 있는데, 네가 반장이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런저런 자제 구레한 일과 약간의 통솔이 필요한 일이 발생하면 여지없이 어디선가 프라밧이 나타나서 해결하고 사라진다. 한마디로 오지랖만 쓸데없이 넓은 녀석이었다.
어느 날 물었다.
“프라밧, 여자 친구 있어?”
그리고 슬픈 얼굴의 프라밧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선생님. 저한테 여자 친구가 어디 있어요. 여자들은 저처럼 가난한 남자를 싫어해요. 선생님처럼 돈이 많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이 녀석은 내가 가진 오래된 아디다스 신발과 싸구려 스와치 시계를 보고 나를 부자로 판단해버린 지 오래다. 우리들의 대화는 대충 이렇게 자신은 가난하고 나는 부자라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난 여기서 부자다. 아, 물론 진짜 부자는 아니다. 아니, 부자가 맞나? 이제는 나도 부자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여하튼 한국에서는 결코 누구를 도와주고 있을 처지가 아닌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여기 오니 순식간에 난 부자가 되어있었다.
가난은 상대적인 감정이다
진짜 진심으로 나는 부자로 행동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가난을 측정하는 것은 물론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가난하다는 걸 느끼는 건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해 가진 것이 적으면 가난한 것이 된다. 그렇게 한국의 주변 사람들에 비해서 가진 것이 상당히 적었던 나는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스리랑카의 주변 사람들에 비해 가진 것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이 되어버린 지금의 변화된 환경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는 상류층이나 취득할 수 있는 대학원 학위가 있고, 스리랑카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브랜드의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싸구려 브랜드일 뿐이었다. 나이키 운동화와 아디다스 운동화를 번갈아 가며 신고 다니는 동네 유일한 패셔니스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운동화들은 수선을 할 정도로 낡고 오래된 것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찢어진 곳을 꿰매어 새로 고친 흔적이 보일 정도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스리랑카 유일의 백화점에서 가서 쇼핑할 금전적인 여유도 내게 있었다. 그러나 그 백화점은 사실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 정도도 못한 수준이다. 가끔은 점심값의 4배에 달하는 커피도 한잔할 여유도 있다. 콜롬보의 국제화 흐름에 맞춰 얼마 전에 커피빈이 생겼기 때문이다. 때로는 호기롭게 동네 아이들에게 초코바를 쥐어주고, 더운 날은 부담 없이 학생들에게 음료를 대접할 돈도 있으며, 같은 반 동료 선생들을 다 모아 홍차를 마시고 계산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항상 주머니에 있다.
어떤가? 이 정도면 부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 않을까?
세상에는 이렇게 몇 시간의 공간이동으로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손쉬운 방법이 존재한다.
나는 조금 더 조심해야 했다
물론 내가 루이비통이나 구찌 백을 들고 다닌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더욱 섬세하게 조심해서 행동을 해야 했었다. 그들에게 상대적 빈곤의 박탈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 사소한 차 한 잔을 사는 행동에도, 그 사소한 아이스바를 하나 쥐어 주는 행동에서도 그들은 어쩌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KOICA는 왜 나에게 이런 섬세한 도덕적 행동원칙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왜 그들은 우리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에만 집중했을까?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어 이제는 남을 돕게 되었다는 고귀한 행동에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KOICA의 가르침에는 어쩌면 우리가 개도국에서 ‘가난한 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의 감정을 부추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을 돕는 일이란 조심스러워야 한다. 남을 돕는 일이란 조금 더 섬세해야 한다. 그들의 감정이 다치지 않도록 말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가난할 뿐이지,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