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개발이 포함하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 하다못해,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적인 개발, 즉 <자기 개발>에도 경제부터 일반상식, 연애를 다 포함해서 다루고 있다는 걸 상기해 본다면 국제라는 단어가 붙으면서 그 범위가 막대하게 늘어나게 된다는 걸 짐작하게 된다.
한 개인을 개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한 나라를 넘어 국제를 개발한다고 생각하면, 그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개발에는 광대한 범위의 이슈가 늘 존재한다. 유엔의 부속기관이 그렇게 많은 이유도 그와 같다. 또한 국제개발이 뭐하는 거냐고 물으면, 명쾌하게 답하기가 어려워 우물쭈물 넘어가고 만다. 그래서 난 늘 이렇게 대답한다.
"그 왜, UN이 하는 일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 국제개발이에요."
이 복잡한 범위를 가진 국제개발(International Development)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간단히 <자유, freedom>라는 단어를 가져와서 같이 생각해 보자. 국제개발은 어떠한 상태로부터 자유를 얻어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억압된 정치적 상황으로부터의 자유, 잘못된 사회적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등등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비자유로운 상황이 존재한다. 인간다운 기본적인 삶을 위한 자유를 만들어 나가는 건, 국제개발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물론, '과연 어디까지가 기본적인 인간의 삶이냐?'라는 공통된 기준을 정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일반적으로 국제개발과 자유라는 관점은 크게 3가지로,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 사회적 자유>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를 이뤘다고 한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가 주어졌다고 보기는 상당히 어렵다.
계급이 낳은 비극적 사랑의 결말
지난 주(2020.05.24), 네팔에는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이 언론에 알려졌다. 네팔에는 인도와 같이 카스트 계급이 아직 존재한다. 달리트(Dalits)는 카스트 제도에서 맨 하위 계급인데, 인도 문화권에서는 달리트 계급에 속하는 사람을 만져서도 안된다고 해서 언터쳐블(Untouchables)이라고도 부른다. 이들 계급은 주로 일반 사람들이 하지 않는 아주 어려운 직업(하수도 청소 등)을 보수도 거의 없이 수행한다. 사회적 암묵에서 일어나는 강요에 의한 노동이다. 또한 종종 강간과 살인의 대상이 대기도 한다. 손도 대지 말라고 하면서도 강간은 왜 하는지..조금 의문이지만, 이들이 당해온 역사는 길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비극의 개략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네팔의 달리트 소년 나와라지(Nawaraj, 21살)는 자신 보다 카스트 계급이 높은 소녀 슈쉬마(Sushma, 17살)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들의 사랑이 들통나자, 여자 친구의 가족은 소년과 그의 친구들을 수차례 협박을 가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소녀를 계급이 같은 다른 남자와 결혼시킬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소녀는 자신의 사랑을 업악하는 가족에서 벗어나 소년과 사랑을 이루길 바랬다. 그리고 소녀는 같이 도망가자는 제안을 했고, 그렇게 소년은 자신의 여자친구와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리고 바로 뒷날 그 소년과 친구들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총 5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가해자는 돌로 피해자가 죽을 때가지 폭력을 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한 피해자 소년이 말했다.
"나와라지는 한 무리에 의해 처참하게 집단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돌로 그의 머리를 포함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는 심하게 다쳤고, 도저히 도망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 친구를 강에 버렸습니다. 나와라지는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고, 경찰은 소녀의 아버지와 마을의 헤드(마을의 실질적 관리자, Head), 그리고 관련된 주민들을 체포했다.
개발학적 관점에서의 네팔 젊은 연인의 비극
여기서 발생한 계급을 바라보면, 왜 이런 일이 최첨단 기술 속에 살아가는 지금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국제개발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네팔에서는 진작에 카스트 계급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헌법에 반영했다. 그럼에도 암묵적으로 이런 차별의 관습이 많이 남아 있다. 중동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명예살인도 사실상 불법이나 암묵적으로 자주 행해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위에서 말한, 어쩌면 정치적 자유는 네팔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충분히 그리고 완벽한 장치를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카스트 차별에 따른 관습)는 실현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또한 그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처럼 정지척(헌법의 개정)으로 이 문제는 푼 듯해 보이나,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자유는 존재한다. 또한 경제적 불완전한 자유와도 이 문제는 연결되어 있다. 즉, 개발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인의 업악된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한 가지 의문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타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이래라 저래라 관여할 권리가 있느냐?" 라는 것이다.
네팔에서 발생한 사건을 타국가가 나서서 시정하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여러가지 논의가 있겠지만, 그리고 안타깝지만 '비난은 가능하겠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라는 게 개인적인 입장이다.
사실 그렇게 (타국에 가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 하려고, 국제개발이라는 개념이 탄생했지만 실상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물론, 어떤 이는 이건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혹은 범죄)이기에 당연히 다른 국가가 네팔의 문제를 비난을 넘어서 시정할 권리 조차 있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도 사실상 선을 그어 잘잘못을 가리기엔 모호한 측면이 많다. 그리고 죄질의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도 국가마다 상이하다.) 그러나 그건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라가 스스로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 외부 세력에 의해 변화를 꽤하는 개발은 부작용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국제개발은 국경을 넘어, 업압된 상황에 처한 이들을 자유(freedom)롭게 하자는데 그 의의가 있지만, 사실상 각국의 국경 안에는 자국의 통치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국제개발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실상, 선진국이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세계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도 일리에 맞지 않다.
이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국제개발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 돕는데, 어떤 방법을 가리고 앉아 있을 것인가? 무조건 돕고 봐야지."
일부 맞는 말이나, 잘못된 방법으로 행해지는 국제개발은 많은 부작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혹은 지나친 외세의 관섭으로 비취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