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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Sep 12. 2020

인생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누군가가 또 세상을 달리했다. 유명한 여행 커뮤니티를 소셜 네트워크에 만들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이의 죽음이다. 여행을 다닌 사람들은 한 번쯤은 들어 봄직한 타이틀, 여행에 미치다. 한때 <미치다>는 정말 <미치도록> 유행했던 카피였다. 공부에 미치다. 결혼에 미치다. 음식에 미치다 등등 우리가 뭐에 미치길 바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책들이 서점가를 점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 그 시절에 그 여행 커뮤니티도 같이 유명세를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치 미치지 않고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살 수 없는 것처럼 외쳐되는 것도 싫었고, 뭔가에 미치지 않으면 열정이 없는 것처럼 설파하는 그 자극적인 어감도 탐탁지 않았다.

그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사고 소식을 뉴스에서 듣고는 이런 생각을 했다.

'유명세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구나.'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그는 죽음으로 기다림을 중단했구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인생이 시간을 만나면서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생명체의 숙명이다. 무언가를 하고 시간을 가지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당연한 수순이다. 무언가에 정성을 쏟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도 기다림이고,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일어나고 그게 사라지는 데도 우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작은 상처도 큰 상처도 치유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그 대상의 크고 작음에 따라 기다림이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 우리에겐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이다.

철부지 어린 시절, 뭣도 모르고 날뛰던 시절의 나에게 어떤 직장의 선배는 이런 말을 했었다.

"이봐. 거기 젊은이. 시간을 가지게."

시간을 가질 것. 그 당시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뜨거웠던 첫사랑의 섬세한 감정도, 날카로웠던 고통의 아픔도,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았던 우울한 절망도, 더 이상의 답을 얻지 못할 것만 같았던 실패의 경험도... 모두 다 시간을 만나 기다리면, 그 사건의 골도 감정의 골도 무뎌져 간다. 어쨌든 저쨌든 인생이란 포기하지 않고 살아만 간다면 굴러가는 게 또한 인생이다. 이게, 내가 살아오면서 알게 된 인생의 단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삶>이다. 그 말은 다르게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삶>이다.


우리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가? 결국 시간이 다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결국 죽음을 기다리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생명이 주어졌고, 언젠가는 생명이 다할 운명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아내고 가치를 찾아가는 것은 각자의 역할이고 주어진 숙제이다.

각자의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자신의 우주를 끝내는 방법은 죽음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죽음으로 인생의 기다림을 끝내려고 한다.

이게 옳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에 대해 판단하기는 어렵다. 사회적으로 그게 나쁘다고 한다지만, 그 참을 수 없는 찰나의 고통을 인내하지 못한다면 그렇게라도 인생의 기다림을 끝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져다주는 힘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때론 너무 지쳐 힘들 때는 그냥 넋 놓고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시간표가 정해진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정류장에서 앉아 있는 것과 어쩌면 동일하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이 없다. 다만, 시간에 맞춰 그곳에 도달했다는 정성을 쏟았다면, 그저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쉬운 인생을 살고, 누군가는 어려운 인생을 살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살 수가 없다. 그렇기에 누가 쉬운 인생을 진짜로 살아가는지 알기는 어렵다. 누구나 자기네 인생이 어려울 뿐이다. 남이 하면 쉬워 보이는 일도 내가 하니 힘들지 않은가? 그처럼 우리네 인생은 내가 조정하는 것이기에 어렵다.


언젠가, 길을 걷다 누군가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 물론 현장의 모습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죽은 이의 손을 꼭 잡은 한 늙은 어머니가 넋을 놓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슬픔도 놀라움도 경악함도 없었다. 마치 육체만 남겨두고 다른 세상으로 떠난 버린 사람처럼 표정을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자식의 시간은 멈추었고, 어미의 시간은 고통으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강제적으로 끝내버린 인생의 시간은 안타깝고 누군가에겐 큰 아픔이 된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강제 종료한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타인의 삶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듯이 타인이 겪은 고통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인생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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