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Love and

이방인

by 안종현
DSC_3125.jpg

가족들과 전화를 할 때마다 묻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나저나 넌 한국은 이제 아예 안들어올 생각이니?"


늙은 부모는 늙은 아들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에는 들어내지 못하는 걱정이 서려있다. 어감에 살포시 묻어나는 그 걱정이나 못내 활짝 표현 못 할 그리움을 잘 알면서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몹시도 꺼려진다. 나는 늘 대답을 얼버무리고 만다. 딱 잘라 말하기엔 늙은 부모의 마음이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부모는 알고 있다.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아들을 잡아 놓았던 지난 날의 경험을 말이다. 아들의 눈은 총기를 잃어가고 점점 시들어가던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늘 말을 꺼내기가 머뭇거려진다. 부모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아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잡힐 것을 두려워하고, 부모는 그런 아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행복하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가끔 나에게 묻는다.

'나는 왜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을까??'

누가 쓴 책의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것은 아니다. '싫다'라기 보다는 '두렵다'라는 말이 더 이유에 가깝다. 물론 두려워서 싫은 것일 수도 있지만, 두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그렇게 연결을 지을 수는 없다.

또한 한국을 떠나 온 것도 아니다. 사실 스웨덴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세상 어느 곳이던 한 곳에 머물고 싶다라는 생각은 늘 마음 한 켠에 해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기울어진 우연이었다. 스웨덴이 그렇게 살기에 나쁘지 않았고 더 이상 떠돌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저냥 그 때의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다.

여행을 좋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보다 넓은 세상이 궁금했던 젊은 시절, 그땐 궁금증으로 머리가 가득찼고 뭔지 모를 뜰든 기운이 가슴을 데웠으며,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던 용기로 가득했던 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밖의 세상보다는 나 자신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건 이제 젊음이 한풀 꺽인 나이에 접어들면서 신체적으로 점점 부슬어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나 자신이라는 하나의 우주를 모르는데 어찌 밖의 세상을 탐할까?, 라는 자조적인 질문이 기인하기도 한다. 더욱이 그 동안 타인을 위해 애쓴 삶을 살았으니 이젠 나에게 더 신경을 좀 더 기울이자는 약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오고가지만 그냥 이렇게 말하고 만다.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이리저리 설명을 하기가 귀찮다. 들어줄 사람이 진지하게 들을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방인이다. 여기 스웨덴에서도 이방인이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다.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녹아서 들어가는 평범한 시민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방인로서의 삶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다만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국적의 소속감은 별로 없다. 물론 오랜 세월 당한 세뇌로 인해 한국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타 한국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을 무작정 애정애정하는 건 아니다. 그저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한국이 좋다.


누군가는 나에게 묻는다. 한국이 그립지 않냐고 말이다. 딱히 향수병은 없다. 이건 스리랑카에서 2년을 살 때에도 비슷했다. 나는 어딜가나 잘 적응하는 그런 성격이다. 음식을 그렇게 가리는 편도 아니고, 기후에도 잘 적응하는 편이다. 사람을 딱히 가리지도 않는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아무런 거리낌없이 다가가고 친구가 된다. 문화 충격도 잘 정리해서 이겨내는 편이다. 이런 문제들이 들이닥치면 가만히 이렇게 되새기면 된다.

"나는 이곳에서 주류가 아니라 이방인일 뿐이다."

이방인, 나는 이방인이 되어 다른 사람의 관심에서 벗어난 삶이 더 좋다. 아마 누군가가 나에게 아주 유명한 셀럽이 될 기회를 준다면 나는 거절하겠다. 부유한 삶도 좋지만, 어딜가나 나를 알아봐서 개인의 삶이 없는 건 딱 질색이다.

예전에 TV나 라디오에 몇 번 출연한 적이 있다. 그 후 길거리를 걷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이가 간혹 있었다. 나는 모르는데 누군가가 나를 안다는 건 즐겁지만은 않다. 이건 뭔가 불공평하다.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나를 안다니 말이다. 뭔가 불공평한 사회적 입장에 놓이게 된다. 유명세라는 건 사람을 시건방지게 만든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그 유명세에 한번 맛을 들리면 오래지 않아 그 사람의 인격 또한 변질되고 만다.

친구들 중에 힘들 때에만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속성을 뭐라고 설명해야할 지는 모르겠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그렇게 못나 보여서 나랑 이야기하면 자신이 위로가 되는 걸까? 라고 말이다. 그들이 힘들 때 들어주던 고민들 모두 그들이 다시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 승승장구하면 나에게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대나무 숲도 아닌데, 자꾸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고 간다.


나는 여기저기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기에 뭔가 구속되지 않는 편안함이 있는 것도 같다. 그래서 주변의 마이너리티들에게 끌리고 끌어 당기는 매력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방인이기에 주목을 받는 건 얼굴일 빨개지도록 싫고, 적당히 멀리서 남의 삶을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Det ordnar s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