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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Love and

몰라서 평화로웠던 정원

by 안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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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정원에서 가꾼 야채나 과일들 사진을 SNS에 올리면, 몇 친구들이 '스웨덴에서 농부 육성과정'을 배우고 있냐고 물어보는 친구가 있다. 그럼, '맞아. 나 얼마 전에 시작했어.'라고 장난으로 댓글을 달았다.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친구들은 지금도 내가 스웨덴에서 농부가 된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가끔 물어본다.

"월급은 받는 거야?"

유학을 간다더니 농부가 된 이상한 친구, 그게 바로 그들이 바라보는 나였다. 그런데, 여기서 농부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사실,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농부가 된다면 아주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국내 모 IT 기업에 취직을 했을 때, 건축과를 나온 걸 아는 친구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건축과 출신이 IT기업에서 할 일이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난으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공장에 취직했다'라고 말했다. 농담이었다고 고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친구는 2년이 지나고 난 까마득하게 그 일을 잊어버린 뒤에 나에게 '공장에서 하는 일은 할 만 해?'라고 물어봐야 했다.

친구들에게 나란 사람이란 그런 종류의 사람인가 보다. 공장에서 일을 하든, 스웨덴까지 가서 농부가 되든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친구, 그런 이상한 친구.


우리가 빌린 정원은 컬렉티브 정원이다. 보통 철도길 옆에 있어서 집을 지을 수 없는 공간이다. 타운에서 정원 단지로 조성해 일반 시민들에게 대여를 해준다. 그래서 가격도 저렴하게 적당한 크기의 정원을 가질 수가 있다. 이 정원은 10여 명 가량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은퇴한 연금생활자들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 1년 전에 불쑥 나타나서 우리가 정원을 구한다고 말했을 때, 웬 아가들이 왔나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직업이 없나?'라고 돌려 물어보기도 했다. 또한 회장님이라고 하시는 연세가 많으신 분은 조금 근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음... 젊은이들... 정원을 구하게 되면 말이야... 가끔은 나와서 정원에서 일을 해야 하는 건 알지?"

그는 웬 젊은이가 와서 정원에서 파티만 할 거라고 생각한 듯 걱정하신 모양이었다. 여러 명이서 운영되는 정원이기에 한 부분이 풀만 무성하게 자라면 전체 정원의 분위기가 망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이 조금 넘게 지난 지금의 그 회장님은 이런 말을 하신다.

"이 봐, 젊은이들...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손가락이나 굴리는 것도 좋은 일이야." 손가락을 굴린다는 표현은 스웨덴어로 빈둥거리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란 딱 점심을 먹는 시간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한 숨도 쉬지 않고 흙을 파거나 뭔가를 뚝딱뚝딱 고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주인이 아무래도 나이가 점점 들다가 더 이상 정원을 가꿀 육체적 힘이 없어서 우리에게 넘긴 해였기 때문에 정원은 이리저리 손 볼 곳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칠이 벗겨진 오두막, 구멍 난 펜스, 무너진 경계들까지 모두 손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아가'라고 부르는데, 사실 우리가 아가라고 불릴 나이는 훌쩍 지났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들은 '내 나이에 비하면 아가 아냐?' 하는 표정을 짓기 때문에 우리를 지칭하는 단어는 그렇게 고정되어 버렸다.

상대적으로 많이 젊기에 가끔 반은 명령, 반은 부탁으로 주어지는 머슴 역할도 마저 하지 않는다. 80이 넘은 사람들이 다수였기에 이제 하나둘씩 움직임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치 않은 팔로 무거운 걸 들고 가는 그들을 보고 그냥 쳐다만 보며 인사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끔 나에게 돌덩이를 옮겨달라거나, 구석에 있는 풀을 좀 깎아달라고도 부탁했다.

"우리 영감이 3년 전에 죽었잖아. 그리고 내 팔이 또 말썽이야. 당최 움직이기가 힘들어. 옆집 이웃은 85세인데도 저렇게 정정한데 나는 아직 79살인데 이러니..."

이런 말을 들으면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참 이곳을 좋아한다. 스웨덴에서 스웨덴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대다수의 이민자들은 이런 어려움을 토로한다. 친구도 어려운데 연인을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연인을 만나려면 첫 데이트 때, 섹스를 할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가짐을 먹고도 데이트가 성공적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인 게 문제지만 말이다. 물론 당신이 섹스를 아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서의 데이트 생활이 아주 즐거울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스웨덴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이민자를 본 적이 별로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스웨덴에서는 스몰 토크 (Small Talk)라는 걸 잘 안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다 할 가벼운 대화를 안 하기에 새로운 친구가 생기는 일이 우연히 생기질 않는다. 스웨덴에서 친구를 사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그룹에 소속이 되어 무엇이든 같이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조기 축구회나 산악회 등이 좋은 예이다. 이렇게 한 그룹에 소속이 되면 친구를 만들기가 수월해진다.


정원도 몇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그룹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스웨덴 친구가 이곳에서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들이 대부분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노인들이라는 게 문제이다. (이걸 문제라고 말하기엔 조금 문제성 발언이지만, 이 문제가 그 문제가 아니라 이슈에 가까운 단어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우리는 생각했다. 정원을 가꾸길 잘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곳은 참 평화로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며칠 전에 발생한 사건을 빼곤 말이다.

얼마 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컬렉티브 정원의 그룹 부회장님의 다급한 전화였는데 주말에 걸려온 아침 식사 전의 전화였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간밤에 누군가 정원에 침입해 오두막이며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빨리 가서 피해가 있는지 살펴보라는 권유의 전화였다.

이런 이른 1년에 한두 번은 꼭 있다. 우리는 불량한 십 대의 아이들이 아무도 없는 밤에, (연금생활자들은 당연하게도 밤에 이곳에서 파티를 할 일이 없으니...) 칩입해 오두막의 자물쇠를 망가뜨리고 들어와 돈이 되는 게 있는지 이곳저곳을 뒤집어 놓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에 값이 나갈만한 물건이 없다는 게 문제다. 여기에 금이 있을 리도 없고, 아이폰이 있을 리도 만무하지 않은가?

우리는 종종, '당최 이놈들이 이 허름한 정원에서 찾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솔직히 잡아다 이것이라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한 번 열어보고 없으면 다음 해에는 제발 안 왔으면 하지만, 매번 되풀이되는 이벤트이다. 그래서 우리 오두막은 아주 쉽게 부서지는 약하고 작은 자물쇠만 걸어 놓았고, 다른 집들은 아예 문을 잠그지 않고 열오 둔다. 어떤 이는 편지를 써 놓고 친절이 '열고 들어와 보면 알겠지만, 여기에는 당신이 들고 갈 것이 아무것도 없소.'라고 적힌 쪽지를 손편지로 써서 붙여 놓았다.

그들은 그냥 정원을 헤집고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고, 그냥 말썽만 부린다.

우리는 그냥 우리가 정성 들여 심어 놓은 야채와 화초, 경계를 똑바로 세운 펜스 등이 이번 난입으로 망쳐지지 않았길 바라는 심정으로 서둘러 사건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정원은 다행히, 부서진 자물쇠가 다였다. 아무것도 사라진 흔적이 없었다. 그래고 가져가면 돈이 될 잔디 깎는 기계마저 멀쩡히 있었다. 정원도 다행히 멀쩡했다. 밝은 흔적이 몇 군데 보였지만, 그래도 작물 위를 밟고 지나가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이웃 정원도 돌아다니며 물어보니, 큰 피해는 없었다. 그리고 주말 아침부터 난리법석을 뜰게 된 범인인 한 할머니, 마이켄에 대한 불평이 쏟아졌다. 우리는 그녀를 정말 좋아했다. 늘 유쾌하고 늘 행복했다. 뭐가 그렇게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까? 궁금할 정도였는데, 그건 정말 마이켄에게 배우고 싶은 점이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녀를 작년 크리스마스 저녁에 초대를 했을 것이다. 그녀는 백신을 2회 접종을 끝낸 엊그제 우리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아가야. 이젠 너에게 포옹도 할 수 있어."라고 심한 사투리를 써서 말한 뒤 크게 웃었다.

너무나 좋아하는 마이켄이 이번 일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정원을 찾았고 범죄의 현장을 발견한 뒤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과장 되게 상황을 전달한 것이다. 부회장은 또 전해 들은 이야기를 각 회원들에게 전화로 전달되었고 걱정이 되어 찾아온 사람들은 피해는 있었지만 엉망은 아닌 것을 보고 한숨을 돌리고는 마이켄의 이번 난리법석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마이켄을 비난했다.

"난 마이켄이 정말 정말 싫어. 내 정원에 찾아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내가 하는 모든 방법이 죄다 틀렸대."

그는 정말 마이켄을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마이켄의 남동생이 찾아왔는데, 그가 옆집 할멈을 아주 두들겨 패는 바람에 경찰까지 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지. 그 할멈은 병원 신세까지 져야 했다니까... 그 후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마이켄 옆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말하고 정원을 팔고는 다시는 이곳을 찾아오지 않아."

이밖에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그녀에 대한 험담은 신기할 정도로 봇물이 쏟아지듯 계속되었다.

우리는 너무 뜻밖의 증언들에 잠깐 멍해진 기분까지 들었다. 우리가 그토록 애정 하는 그녀가 사실은 공공의 적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 사건으로 그녀를 차갑게 대하진 않겠지만, 그녀를 저녁에 초대하는 일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한 사건은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지만, 이번 건을 마이켄에게 물어볼 성격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토록 평화로워 보였던 우리 정원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확실히 깨졌다. 그동안 우리가 정원이 멤버들이 전부 착하고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그들도 갈등이 있었고 어두운 사연들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정원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이곳을 평화롭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겉만 보면 평화로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살면서 평화로움을 느꼈던 수많은 여행지도 어쩌면 몰랐기에 평화로워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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