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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May 30. 2021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천국, 스웨덴

평화로운 지하 세탁실에서 찾는 스웨덴식 시스템


곧 어두워질 시간이었다. 오후 3시가 되기도 전에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스웨덴의 겨울 길을 걸었다. 아주 큰 도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타운임에도 길거리는 한적했다. 늘 사람들로 북적대는 아시아의 뒷골목만 돌아다녔던 나는 이런 곳이 여전히 생경하다. 어느 곳을 가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살다가 이제는 어디를 가도 사람 만나기 힘든 곳에서 살고 있다. 서울에서는 ‘이 많고 많은 아파트 중에 왜 내 아파트는 없을까?’ 생각했지만, 이곳에선 ‘이 많고 많은 아파트는 존재하는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가랑비에 축축해진 바짓가랑이를 잡고 짜증 섞인 한숨을 쉬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든 광장의 한구석에는 평소 보이지 않던 큰 설치물이 있었다. 설치물은 덩그러니 글자만 써 놓았다. 

‘천국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Heaven is a place where nothing ever happens)’

무슨 행사가 있었나? 지난밤에 록 콘서트가 있었는데, 미처 무대를 다 해체하지 못하고 일부분만 남겨 놓은 것 같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어느 한 가수(Talking Heads)의 노랫말 중에 나온 구절을 인용한 설치 예술작품이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 천국이라…, 그럼 그곳은 스웨덴이 아닌가? 물론 스웨덴 교회 측은 성경에서 정의와는 다르다고 반박했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천국이란 ‘어떤 점’에서 ‘완벽’ 하다는 건 자명해 보인다. 문제는 그 ‘어떤 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다. 누군가는 미남과 미녀가 한가득하길 바랄 것이고, 누군가는 매일 피자가 (또 다른 이는 김치가 빠지지 말아야) 나오는 곳이 천국이라 할 것이다. 즉, 기준이 충족되는 일이 착오 없이 반복되어야 천국이다. 부모님들이 우리의 무탈을 기원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아무런 일 없이 자라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육아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깟(?) 가구 회사 하나가 열어 놓은 북유럽에 대한 환상으로 스웨덴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높다. ‘미래 사회를 보려면, 북유럽을 보라!’는 구호처럼, 북유럽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파라다이스가 맞을까? 


[사진으로 본 스웨덴을 보고 우리는 쉽게 단정한다. 저곳이 파라다이스구나!]


스웨덴에 대한 환상으로 흠뻑 빠진 사람들에겐 김 빠지는 이야기지만, 스웨덴에서 딱 1년만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환상은 늘 보기 좋게 깨지기 마련이다. 나와 같은 시기에 스웨덴으로 이주한 친구들은 2년을 버티다 못해 대부분 떠났다. 그들의 이유는 대략 이렇다. 

‘스웨덴은 너무 심심해. (그래서 죽을 것 같아….)’

고독, 외로움과 심심함은 북유럽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다행히 나는 너무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 스웨덴과 잘 맞았을 뿐이다. 


[스웨덴 룬드(Lund)]


스웨덴, 이곳은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심심하다. 어떤 이의 주장에 의하면, 스웨덴 사람들은 너무 심심한 나머지 소란 거리를 만들기 위해 난민을 대거 이주시켰다는 말도 있다. 어디까지나 사태를 비꼬는 썰에 불과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알코올 중독과 도박 중독이 심한 이유도 이들의 지루한 삶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스웨덴은 정부가 주류 판매를 독점하며 관리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주말이 되기 전 정부가 운영하는 술을 살 수 있는 상점 앞에 줄을 서야 하는 진풍경이 자주 일어나며, 이웃 국가인 덴마크인들은 이런 모습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지금 당장 술을 사 들고 술이 부족해 절망에 빠진 이웃을 구원하러 가자는 병맛 광고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심각하게 술을 마신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주류의 유통을 국유화한 것도 일종의 알코올 중독을 통제하기 위한 시스템의 한 차원이다.

스웨덴은 시스템을 만들어내는데, 그러니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사회의 사소한 것조차도 아주 섬세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끔은 ‘왜 이런 자잘한 것까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하게 시스템에 의존하는 사람들이다. 멀리 찾아볼 필요도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만 살펴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시스템을 사랑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스웨덴 룬드(Lund)의 오래된 아파트]


스웨덴 인구의 절반 이상, 약 52%가 아파트, 즉 집단 거주지에 살고 나머지는 단독 주택에 산다. 과거 서유럽에 비해 가난했던 스웨덴에 현대식 아파트가 소개된 것은 1940년대 말이다. 이 당시 소개된 새로운 법은 ‘모두를 위한 좋은 주거(Goda bostäder åt alla)’를 목표로 했다. 이를 계기로 저렴한 값에 넓고 쾌적한 주거지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오래된 아파트의 역사로 50년을 훌쩍 넘기고 4-5층으로 이루어진 낮은 건물이 많다. 오래된 아파트는 욕실이나 부엌이 지금의 아파트와는 달리 상당히 좁아 세탁기를 놓을 공간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지하에는 세탁을 위한 공용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세탁실 예약 시스템 보드]


이런 작은 세탁실에도 스웨덴다운 시스템이 작동한다. 주거자들이 같이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사용 시간을 미리 예약하기 위해서는 예약 시스템에 참여해야 한다. 

이 복잡한 전기 회로 같은 판을 보고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작동법은 아주 간단하다. 집 열쇠를 자신의 집 번호가 적힌 곳에 꽂아 돌리면, 작은 단추가 열린다. 그리고 단추를 자신이 원하는 시간으로 옮겨 놓으면 된다. 세대마다 딱 한 개의 단추가 주어지기 때문에 중복 예약은 안 된다. 해당 날짜에 꽂힌 단추들을 보면서 예약의 여부를 확인할 수가 있다. 파란색 단추는 각 세대의 번호이고, 빨간색 단추는 세탁실을 청소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거주자들은 헷갈릴 필요 없이 정해진 시간에 세탁실을 이용할 수 있다. 

세탁실을 사용하는 규칙도 있는데, 기본 세제 말고 개인용 세제는 사용하지 말 것, 사용 후에는 건조기의 필터를 청소할 것, 바닥을 정리할 것 등 꽤나 많은 규칙이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아주 모범 시민이기 때문에 이런 규칙을 따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세탁실은 항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공용 공간을 보면, 많은 한국 사람들은 세탁하다가 주민들과 친해지는 경우도 생길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스웨덴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을 상당히 어색하게 느낀다. 물리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는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가 중요한 에티켓인 이유다.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서 세탁을 하고, 10분 전에 뒷정리를 하고 나오면 되기 때문에 굳이 이웃과 마주칠 일이 없다. 이 작은 세탁실의 시스템에는 지역 문화도 기능적인 요소도 함께 담겨 있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깔끔하게 세탁하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역할을 정확히 해내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20년 전의 일이지만, 대학교 기숙사에서 빨래를 할 때는 세탁기가 비어 있으면 빨래를 돌릴 수가 있었고, 누군가 사용하고 있으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때그때 상황을 보고 빨래를 했던 셈인데, 이는 시스템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형편이 없다. 세탁할 시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기숙사생들의 빨래 양이 급증할 경우 누군가는 세탁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세탁기를 점유할 가능성도 있다. 즉, 이런 상황은 세탁 천국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스웨덴과 한국의 세탁실의 차이는 뭘까? 바로 ‘미래를 통제 혹은 예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차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육아, 복지, 교육, 근무환경 등에서도 당연히 존재하며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한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차이는 뭘까? 경제력, 복지환경, 정치의 청렴도 등 다양한 기준이 있겠지만, ‘선진국은 모든 사회가 잘 관리가 되어 통제가 되고, 개발도상국은 통제가 되지 않아 항상 무슨 일인가 터지는 곳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스웨덴은 모든 것이 잘 관리되어 있다. 시스템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해 일을 처리할 경우도 별로 없다. 모든 것은 기존에 구축된 시스템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에서 조금만 벗어난 상황이 벌어지면, 스웨덴 사람들은 심각한 혼란에 빠진다.  반면, 개도국의 사람들은 시스템이라는 걸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어 시스템 밖의 상황에서도 상당히 유연하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인도에서는 어떤 일도 불가능하지만, 동시에 가능하다.’ 즉 혼돈의 세상에서 사는 이는 시스템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지만, 수많은 시스템을 구축한 선진국의 통제된 사회는 시스템이 붕괴되는 순간 카오스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근래에는 이 시스템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 스웨덴식 시스템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지킨다.’라는 전제를 기본으로 작동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템은 있지만 이를 감시하는 기관(예를 들어 공권력을 갖춘 경찰이라든지)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즉, 시스템을 만들면 사람들이 알아서 잘 따라 줄 것이란 기대가 있고, 실제로 99%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다만, 이러한 전제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난민을 비롯한 이민자들이 스웨덴의 시스템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당연히 지켜야 할 질서라고 믿었는데, 그걸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스웨덴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미세한 균열이긴 하나 여전히 스웨덴의 여러 시스템은 오래된 아파트의 지하 세탁실처럼 평화롭게 잘 작동하고 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스웨덴은 과연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웨덴 룬드(Lund)]


 

[참고자료]

1. Jes Fernie (2017) ‘Heaven is a place where nothing ever happens’, https://art.raangen.se/commissions/heaven-is-a-place-where-nothing-ever-happens/

2. Vendela Källmark (2018) ‘Heaven is a place where nothing ever happens under samtal’,  https://www.lundagard.se/2018/01/30/heaven-is-a-place-where-nothing-ever-happens-under-samtal/

3. Svenska bostader ‘historia av lägenheter (스웨덴 아파트의 역사)’, https://www.svenskabostader.se/om-oss/foretagsfakta/hist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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