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읽은 책, 온 더 무브 (On The Move)는 올리버 색스라는 한 신경학자의 자서전이다. 개인적으로 자서전에 대한 편견이 있다. 아무래도 '자기 업적을 과시하려는 사람의 별 시답지 않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에서다. 그런 이유로 자서전을 읽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굳이 거들먹거리는 타인이 들려주는 자기 자랑을 읽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 자서전은 조금 결이 다르다. (솔직히 이 책을 자서전으로 말하기엔 그 표현에 한계가 너무 많다.) 그의 솔직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글을 쓰는 이에게 어떻게 솔직하게 표현할 것인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자신을 타인화해서 솔직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어두운 면이 있고 누구나 부끄러운 부분이 인생에 있는데, 그런 부분까지 굳이 꺼내서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글쓰기에서 솔직함이란 '말로 하기 부끄러운 부분까지 아무렇지 않게 써야 것'이 아닐까? 그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글을 쓰는 행위가 자신의 체면보다 앞설 때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가장 좋을 일일 테다.) 아무나 그렇게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올리버 색스라는 저명한 신경학자가 자신의 치부까지도 모조리 드러내어서 글로 담아낸 이 책은 '어떻게 작가가 솔직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이기도 하다. 마약에 헤어 나오지 못한 시절, 자신의 소극적인 성격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 일을 향한 고민, 성적 호기심과 활동 등에 더 이상 솔직할 수 없을 정도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솔직히 들려준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책이다.
올리버 색스는 1933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신경학자이다. 물론 인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영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은 늘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2015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 말고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름만 들어도 꽤나 유명한 책을 많이 썼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었다> 등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책들이다.
그가 영국인으로서 국적을 바꾸지 않고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책에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특히 이방인으로 만족하는 나의 스웨덴 삶에서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었다. (물론 나는 학자는 아니지만...)
미국 시민권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거류 외국인'으로 기재되는 영주권이 있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신분이 내게는 잘 맞았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호적인 입장에서 주시하나 투표와 배심원 임무 같은 시민으로서의 책무라든가 국가 시책이나 정치적 상황에 관여할 필요는 없는, 이방인. 나는 내가 화성의 인류학자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온 더 무브 中)
이 책은 한 인간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여행한 기분이 든다. 그가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나는 그와 함께 뜨거운 가슴을 공유했다. 유대인 가족으로 태어난 영국 사람이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그 쉽지 않은 과정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와 함께 좌절하고 방황했다. 그리고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동성애에 대한 핍박과 차별이 심했던 영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자신의 성적 젊음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그와 함께 억눌린 슬픔을 공유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 자신이 사는 시대의 산물이다. 그랬기에 나는 어머니가 1890년대에 태어났고 정통파 유대교 교육을 받았으며, 1950년대의 잉글랜드는 동성애를 변태 취급할 뿐 아니라 범죄로 여긴다는 사실을 끊음 없이 상기해야 했다. (온 더 무브 中)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책 한 권에 담아 있다.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예상컨대 그의 자선전을 기반으로 영화가 제작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1990년에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Awakening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색스의 역할을, 로버트 드니로가 환자 역할을 맡았다.) 그의 인생은 마치 시즌을 걸쳐서 들려주는 드라마와 같았다.
그는 늦은 나이에 찾아온 연인의 사랑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약 35년 동안 아무런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그는 75세의 나이에 또 다른 작가 빌리(Bill Hayes)와 처음으로 연인관계를 맺게 된다. 그 당시 빌리는 48세였다. 빌리는 색스를 향해 "당신을 향한 깊은 사랑을 잉태하고 있어요. I have conceived a deep love for you"라고 말했다. 빌리의 고백은 색스가 늘 생각해 왔던 로맨틱한 사랑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던 그의 마음을 녹였다.
책을 덮은 순간, 막막한 슬픔이 다가왔다. 한 인간의 인생의 탄생과 끝을 지켜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정리해서 말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짧은 글로 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그러길 포기했다. 첫 부분의 책은 아주 뜨거움이었다면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것은 따스한 온기와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이다. 마치 나와 오랫동안 인생을 공유해오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느낌이다. 이런 따뜻한 책을, 그리고 솔직한 책을 남겨줘서 그에게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