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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권이 나왔다

by 안종현

얼마 전 스웨덴 영주권이 나왔다. 나에게 영주권의 의미는 뭘까? 일반적인 의미로는, 더 이상 비자 신청이 거절되거나 지연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또한 투표권은 없으나 스웨덴 시민권자와 비슷한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유학 당시 거금을 들여 다녔던 대학교도 이제 다시 가면 공짜가 되었다... 만 더 이상 공부를 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 영주권은 내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늘 멀리 가고 싶었다. 작은 농촌 마을을 벗어나 큰 도시로 나가고 싶었고, 서울에서 10년을 넘긴 해에는 서울을 벗어나 멀리 가고 싶었다. '멀리 가고 싶었다'라는 표현 그대로 그냥 멀리 떠나고 싶었다라는 뜻이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현재 있는 곳에서 그저 멀리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왜 그랬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사실 먼 곳에 무언가를 찾기 위해 떠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어떤 것을 상실하고 싶었다.

나는 늘 어른들의 기대를 충족하는 그런 아이였다. 어려서는 공부도 곧잘 했고, 커서는 돈도 곧잘 벌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칭찬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달콤한 말들에 지쳐버렸다. 아버지는 타인에게 나를 소개할 때, '서울에 있는 OO대학교 다니는...'라고 소개하거나 졸업을 한 후에는 'OO대기업에 다니는...'이라는 아이로 소개했다. 그렇게 주변인들이 원하는 대학, 회사를 다녔지만 그들은 또 다른 나의 타이틀을 요구했다. 만약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고, 나 자신의 본모습을 그대로 들어내도 그들은 나를 좋아할까? 점점 나를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나를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이대로 살면 왠지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일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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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이방인이 되는 삶을 선택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많은 곳을 떠나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자. 그렇게 멀리 떠나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나를 알지 못하기에 나에게 어떠한 기대도 걸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그저 이방인으로 살고 싶었다. 내게 거는 기대를 상실하고 싶었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말하듯, 책임감 없는 도망이며 어린애처럼 회피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를 걸친 내 몸이 너무 무거웠다. 30이 넘도록 좋은 아들이었으면 그래도 선의는 다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확히 스웨덴을 희망하지는 않았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사실 괜찮았다. 그곳이 한국만 아니면 싶었다. 어쩌다 보니 스웨덴에서 영주권이 나왔고, 여기서 이방인으로 사는 삶이 나쁘지 않다. 주변 친구들은 스웨덴 국적까지 취득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은 아직은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쉽게 변하기에 언젠가는 국적을 취득할지도 모르겠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슨이 '우리 모두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 자신이 사는 시대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듯, 나도 한국이 만들어낸 시대의 산물이다. 그것을 완전히 벗어던질 용기는 없다. 물론 조국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니다. 언젠가는 돌아가 처리하고 싶은 연금도 걸렸고, 늙어가는 부모의 안부도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아무런 구속 없이 한국에 방문하고 싶은 욕심과 걱정이 있다. 멀리 떠나왔지만, 아주 연을 끊을 만큼 모질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그건 책임을 다하지 못한 회피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기도, 문제의 핵심을 해결하지 않는 도피적 행위라고 말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어떠해야 한다'라는 것을 스스로 규정하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그에 따라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마음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여기 삶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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