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건축여행기 #2
농촌에서 자란 나는 항상 도시를 동경하며 살았다. 명절 때마다 내려오는 서울사는 사촌형이 왜 이렇게 멋있어 보였는 지, 하얀 피부에 서울말을 쓰고 옷도 맵시 있게 입은 모습을 보면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물론 그건 내가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그 어릴 때의 부러움은 도시에 대한 동경으로 나를 이끌었고, 나는 자연스레 도시의 휘황찬 빌딩들에 시선을 빼았겼다. 날선 모서리를 가진 고층 빌딩숲. 그 사이를 바삐 걸어다니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바랐다.
난 건축을 공부하기로 했다.
멋진 건축가가 되어 빌딩을 설계하고 싶었다. 도시를 동경하던 어린 아이는 도시를 창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상경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내가 그토록 꿈꿔오던 건축, 그리고 서울이라는 공간이 그렇게 멋지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랬다. 그걸 깨닫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걸 알게 해준 사건은 우연히 일어났다.
서울이 나에게 허락한 공간
그 당시의 난 서울의 비싼 주거비를 감당할 수 없어, 룸메이트 친구와 집을 같이 쓰고 있었다. 그것도 마을버스가 마지막으로 멈춰서는 동네의 높은 곳이었다. 싸고 싼 집을 골랐지만, 그것마저도 친구와 집세를 나눠내야 겨우 서울이라는 곳에서 살 수 있었다. 아주 멋진 빌딩숲을 꿈꿔 왔지만 내게 허락된 공간은 낡고 어둡고, 겨울엔 춥고 여름에 더운 그런 공간이 전부였다.
그런 허름한 집에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나는 도시의 슬럼을 도려내려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생각해 봐라, 그 더럽고 남루한 그 집이 가난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주거의 형태라는 사실을 말이다. 슬럼을 없애서 도시를 깨끗하게 밀어버리고 신식 아파트로만 채워버리면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살아야한단 말인가?
못생긴 고양이의 죽음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사고로 죽었다. 낡은 집은 수리를 오랫동안 하질 않아서, 누전이 발생했고 그로인해 화재가 났다. 집이 홀라당 다 타버린 건 아니었지만, 벽지며 내장재가 타면서 나온 유독가스로 인해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질식해 죽고 말았다.
그 놈은 길고양이 특유의 못생김을 넘어서는 못생긴 고양이었다. 참으로 볼품이란 게 없었다. 한마디로 수준 이하였다. 당시 룸메이트였던 친구가 길을 가다, 불쌍해서 주워다 기르기 시작한 고양이였다. 나는 그 고양이가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꼭 못생긴 게 나를 보는 것만 같았고, 그럼에도 자존심은 남아있는 게 더 못나 보였다. 못났으면 착하거나 귀염성이라도 있어야 할 것을 어처구니없게 주제도 모르고 도도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나처럼 말이다.
“임마, 넌 우리 아니었음, 저 길거리에 무수히 숨어서 살고 있는 도둑 고양이들처럼(도둑 고양이를 모독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살았을 거야. 그걸 생각하면 우리한테 이럼 안되지. 임마! 넌 조금 공손해질 필요가 있다구”
몇 번을 이렇게 말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린 그의 시크한 도도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밥도 주고, 물도 주고, 고양이가 싸질러 놓은 똥을 치워줘도, 그놈은 전혀 고마운 마음을 먹으려 들지 않았다. 아주 성격이 못돼 처먹은 놈이었다. 한번은 그 고양이놈이 분비물을 싸는 모래 상자를 청소하고 있을 때, 굳이 비집고 들어와 꼬리를 빳빳하게 말아 올리고선 큰일을 보시는 참으로 어이없으신 고양이님이었다.
그렇게 주인은 거들떠도 보지 않던 고양이었지만, 그 자존심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받는 것에 대해 감사할 마음이 전혀 없는 저 싸가지. 언제든지 맘에 안 들면 길거리로 방생해버린다고 갖은 협박을 부려도, 전혀 비굴하게 굴지 않는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이라니.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고양이가 꼬리라도 흔들길 바라는 거야?”
이상한 일이었다. 애교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그 고양이도 죽기 전에 이상한 행동을 했다. 내 무릎위로 슬그머니 올라와서는 잠을 자기도 했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면 나를 따라 다니며 자신의 몸을 내 발에 부비기도 했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들 하던데, 고양이도 그런가? 아님 신기하게도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 때늦은 애교는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미운듯하면서도 매력이 넘치던 고양이가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 죽어서도 여전히 볼품없는 고양이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바닥에 누워있었다. 주변에는 반쯤 탄 바닥장판에 눌러 붙은 TV와 소방서 아저씨가 밟아서 깨진 잡다한 물건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이제는 쓰레기보다 못한 물건들. 시커먼 연기는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에 덕지덕지 붙어 마치 고양이의 검은색 얼룩무늬가 사방으로 번져나간 것만 같았다. 그 혼란스럽게 난장판이 되어버린 공간의 한복판에서 고양이는 숨을 멈추고, 아니 죽이고 누워 있었다.
죽음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그 당시 나의 심정은 슬픔도 놀라움도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난감해할 뿐이었다. 물론 우리가 키우던 그 고양이가 맞지만, 더 이상 내가 알던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빠져나간 가죽봉투 같았다.
이제는 고양이를 만져보고 싶지도 품에 안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죽음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당사자에게만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무엇인가를 박탈해 가는 것. 어쩔 수 없는 그 시커먼 죽음의 공기를 사이에 두고, 고양이와 나는 둘이서 한참을 마주하고 있었다.
고양이의 장례식
초라한 고양이 사체를 두고 당시 룸메이트였던 친구와 상의한 끝에 어느 조용한 곳 땅에다 묻어주기로 했다. 흰 수건에 감싸 상자에 조심히 담을 때 수건사이로 전해지는 굳은 고양이 사체의 느낌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날따라 비까지 내렸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상자를 적시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상자를 들고 온 동네를 돌고, 옆 동네까지 돌아다녀 봐도 그 조그마한 고양이 하나 묻을 땅이 없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대지를 밀어내고 아파트와 빌딩을 마구 지어대더니, 이제는 조그만 생명체의 죽음을 애도할 공간마저 남겨놓지 않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나도 모르게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비가 조금씩 종이박스 위로 떨어졌다. 손 위로 사체의 무겁지 않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종이박스가 물기를 먹고 사체의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고양이를 쏟아 낼 것만 같았다. 그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면 난 정말 공황상태에 빠질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이 근처 대학 캠퍼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후미진 곳을 겨우 찾았다. 양지바르고 풍경이 좋은 곳은 바라지도 않았다. 혹은 다음에 찾아와서 추억을 곱씹을 장소를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묻기에 적당한 장소였으면 싶었다. 그런데 그 곳은 정말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둘러 고양이를 묻고 돌아온 그 날은 이 거지같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싫었다. 마치 초대 받지 않은 자리에 온 것만 같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