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자주 온다. 영하 10도로 떨어지진 않는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영하 15도까지 떨어지는 날이 한 2주 정도 지속되었다. 스웨덴 남부는 겨울에도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눈 오는 겨울을 그리워하며 보낸 겨울이 많았다. 더구나 겨울에는 해도 엄청 짧다. 거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까지 계속되는 날이면 어둡고 축축하고 서늘한 날씨가 만들어진다. 이런 날씨에는 뭐든 하고픈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그 추적추적되는 비와 함께 내 기분도 그냥 추적추적 가라앉고 만다.
스웨덴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나쁜 날씨가 있는 게 아니라, 나쁜 옷이 있을 뿐이다.'
옷만 제대로 입으면 이따위 거지 깽깽이 같은 날씨쯤은 이겨낼 수 있다,라는 아주 긍정이 넘치는 파이팅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 속담을 자주 듣지는 않지만, 날씨에 대한 불만을 심하게 털어놓는 날이면 종종 듣는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에 심한 강조를 담아 되묻는다.
"진짜 나쁜 날씨가 없어? 진짜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스웨덴의 날씨가 얼마나 짜증을 유발하는지. 그냥 이렇게 옷이라도 든든히 챙겨 입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런 뜻이다. 그러나 옷을 아무리 잘 챙겨 입어도 우울한 날씨는 역시 우울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태국을 사랑하지 않는가? 다 날씨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률도 높은 이유도 이렇게 우중충한 날씨 때문이 아닌가. 안 그래? 이 스웨덴 사람들아?
눈이라도 내리면 세상이 조금 더 환해져서 좋다. 빛에 반사된 눈 덕에 주변이 조금이라도 밝아지기 때문이다. 늘 가랑비가 내려 축축하고 으스스한 겨울을 보내다 보니, 이럴 바에야 스웨덴 북부 한 지역에다 오두막을 하나 사서 제대로 된 겨울을 보내 볼까?,라는 생각도 든다. 겨울에 비보다는 눈이 더 낫지 않을까? 게다가 가격이 아주 아주 싸다는 말을 들었다. 북쪽에 위치한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이제는 아무도 거기서 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북유럽에 살면서 제대로 된 겨울을 꿈꾸다는 건 남들이 보면 조금 이상한 일이다.
간밤에 쉬지 않고 꾸준히 눈이 내렸다. 아침 커튼을 걷으니 밖에는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 있다. 잠이 덜 깬 목소리에 감탄이 절로 담겨 나왔다. 이렇게 갓 내린 눈을 다른 이들이 밝아서 부드러움이 덜해지고 더러워지기 전에 밖으로 산책을 나가야 한다. 그렇게 첫 밖의 풍경을 보고 다짐했다. 날씨가 아름다운 날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날을 즐겨야 한다. 또 언제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다음에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 풍경울 보니, 이제야 스칸디나비안 국가에 사는 느낌이 든다. 세상이 온통 하얗다. 마치 간밤에 앙드레김이 작업을 해 놓은 것 마냥.
입양한 지 일 년이 이제 막 된, 아직은 강아지인 알도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나는 스웨덴 속담처럼 목도리며, 다운재킷이며, 털모자며 이것저것 챙겨서 꽁꽁 싸매고 나왔는데, 이 녀석은 맨몸이다. 알도는 영하 5도까지는 잘 견디더니 영하 15도로 내려간 오늘은 발가락 사이에 끼는 눈송이가 차가운지 눈알갱이가 날카롭게 꽂히는 것인지 몇 걸음을 걸으면 발을 털고 또 몇 걸음 걸으면 발을 털고 나를 쳐다본다. 나에게 뭔가의 조치를 취해주길 바라는 눈빛이지만 뭐를 원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차가운 알도의 발을 손으로 잠시 감싸 쥐어 온기가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오랜만에 형에게 카톡이 왔다. 형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작은 아들(나) 걱정을 많이 하신단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한국 뉴스에서 스웨덴이 꽁꽁 얼어붙어서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하 40도의 겨울을 보내고 있을 작은 아들이 무척이나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아직 스웨덴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엄마로서는 내가 사는 곳이 그렇게 추운 곳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아직 이해가 되질 않는 모양이다. 스웨덴이 얼마나 큰 국가인지도 감이 오질 않는 모양이다. 그저 뉴스에 스웨덴이 아주 춥더라는 말에 스웨덴 전체가 추운 것으로 생각하고 지레 걱정부터 하고 계신 건 부모의 어쩔 수 없는 마음일 테다.
눈이 내린 산속은 정말 아름다웠다. 알도는 처음 눈을 만나고 아주 당혹해했다. 생전 처음 이런 물질을 처음 보았기에 볼일도 어떻게 이 하얀 것 위에서 봐야 하는지 상당히 헷갈려했다. 평소 개들은 눈을 아주 좋아한다고 생각했기에, 눈을 보고 당혹해하는 알도를 보고 나도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알도는 눈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고, 여느 개들처럼 정말 미친 듯이 눈 길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알도도 보통 개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안도감이 들었다.
늘 부모님이 하시던, 남들처럼 평범한 아들이 되길 바란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그렇게 2주를 차곡차촉 쌓아 올렸던 눈은, 며칠 뒤 이틀간 내린 비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