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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Aug 18. 2016

파라다이스 산책

스리랑카 건축여행기#10

Paradise Road Gallery Cafe

Geoffery Bawa, 1961-63, Colombo, Sri Lanka



늘 '잘 사는' 나라의 건축물만 동경하면 살았던 저에게 제프리 바와의 건축은 소위 '못 사는' 나라에서 겪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나라의 지혜로운 결과물을 공유합니다.   




무뚝뚝하고 두꺼운 벽을 지나,

파라다이스로 들어 오세요


무뚝뚝하고 두꺼운 벽을 지나 카페 내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한 개의 마당을 지나고, 연못이 있는 중정을 지나야 한다. 건물의 전체 평면은 크게 삼등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켜켜이 다른 공간이 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출입구 아치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놀랍게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늘 그렇듯, 바와는 멋진 재주를 부렸다. 자신의 건축 안으로 들어온 이상, 당신은 다른 세계에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만 같다. 



좁고 어두운 복도를 지난다. 그곳에는 연못이 있는 중정이 있었다. 길쭉하게 늘어선 연못과 지붕이 있는 두 통로가 건물의 주요공간을 향해 뻗어 있다. 두 지붕은 약간의 틈을 만들어 내고, 틈사이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연못의 물에 닿아 반사된다. 산란된 빛은 주위로 퍼져나간다. 스리랑카의 성가시기만 했던 햇빛이 아주 얌전해졌다. 빛마저 길들일줄 아는 바와만의 장치인 셈이다. 



사람이 지나가는 두 갈래의 길을 제외하면 한 낮의 열기와 빛이 그대로 쏟아지는 작은 마당이 있다. 이 더위에 앉을 사람이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시멘트 의자가 시각적인 휴식을 전해준다. 그늘진 통로를 지나가며 바라보는 마당에서 자라는 연두색의 넝쿨이 치렁치렁하다. 연못의 물은 프랑크톤이 자라기 시작해 곧 청소를 해야 할 것만 같아 보인다. 정해진 틀 내에서 헤엄치는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수면을 넘실거리게 만들고, 넘실거리는 표면이 비친 빛들이 하늘하늘 벽까지 빛 조각을 전달하고 있다.

때로는 지붕이 내려앉을 정도로 무섭게 내리는 스리랑카의 비가 지붕을 따라 흐르다 바닥에 떨어질 때 물이 튀지 않도록 지붕이 끝나는 면의 밑에는 자갈을 깔아 놓았다. 때론 불편하지 않도록 섬세하고, 때론 쓰임을 과장한 사용되지 않는 장식적인 요소도 보였다.



스리랑카에서 커피는 

왠만하면 주문하지 말 것


스리랑카가 세계적인 홍차의 생산지로 유명한 건 맞지만, 스리랑카의 커피는 세계 최악일지도 모른다.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있다 그대로 뱉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끼고 나서야, 이 최악의 커피 맛을 받아들였다. 차 하나를 마시더라도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커피? 혹은 홍차? 버블티? 아니면 요즘 길거리에 많이 생겨나는 쥬씨까지.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평소 싸구려 믹스 커피도 즐겨 마실 정도로 커피에 대한 어떠한 고급 풍미도 없지만, 스리랑카의 커피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맛이다. (커피를 내려서 마시는 게 아니라, 원두를 간 콩을 물에 풀어서 나오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홍차의 본고장까지 와서 커피를 운운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긴 싫지만, 스리랑카에 있는 외국인들의 가장 큰 불만이 바로 신선한 커피를 마시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제 막 스리랑카에 도착해 며칠을 보낸 이들은 신선한 커피를 몸에 제때 공급하지 못해 늘 정신이 몽롱한 상태다. 

이들과 대화중에 빠지지 않는 불평은 이렇다.

“신선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정신이 확 깼으면 좋겠어!”

홍차에 대한 사랑이 끔찍한 스리랑카인들에게 커피는 그저 배가 아플 때 먹는 약일뿐이다. 

그런 상황에도 콜롬보에는 제대로 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페가 있는데, 파라다이스 로드 갤러리 카페가 그 중 하나다. 건축을 떠나서, 스리랑카를 방문한 커피 애호가에게 반가운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건축가

제프리 바와


열대지방의 모더니즘(Tropical Modernism)을 완성한 제프리 바와(Jeoffrey Bawa, 1919-2003)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소설가 알랭드 보통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건축을 사랑했다. 바와의 건축은 스리랑카의 전통양식에 식민지시대 때의 유럽양식이 결합한 형태에 열대우림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바와 스타일은 세계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이 되었다. 



만약에 제프리 바와가 없었다면, 스리랑카의 현대건축은 어떠했을까? 단정하긴 어렵지만 무척이나 황량하고 멋없는 건물들로 가득하지 않았을까? 물론 바와를 제외하더라도 훌륭한 건축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활동했던 스리랑카 현대건축계에서 바와만한 엘리트 건축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바와는 그 당시 스리랑카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유일한 건축가였기 때문에 호텔, 상업, 공공건물을 비롯한 주요하고 굵직한 프로젝트는 모조리 그의 손을 거치다시피 할 정도였다. 다작을 한 만큼 수작도 많지만, 놀랍도록 엉성한 작품도 많으며, 버려지거나 다른 용도로 변경되길 기다리는 건물도 있다.


갤러리 카페는 원래 바와의 건축 사무소였다. 1961년 이 건물은 버거(혼혈) 의사를 위해 설계되었지만,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즈음 건축주가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이제 막 경력을 쌓아가던 바와는 건축을 완공하고 싶어, 자신의 설계 파트너를 설득해 이 건물을 인수하곤 자신의 돈으로 나머지 공사를 마쳤다. 

그렇게 완성된 건물은 1980년대까지 바와의 건축 사무실로 사용되다, 1997년에 파라다이스 로드가 이 건물을 인수해 갤러리 카페를 오픈했다. 바와의 기본 설계도 훌륭했지만 디자이너의 독특한 내부 장식과 간결한 리모델링은 원래의 건축물의 형태를 보존하면서도 카페의 쓸모에 맞게 새롭게 태어났다. 이곳의 바와 건축이 잘 보존되어 사용되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끈적이는 재즈가 

파라다이스로 이끄는 곳


제프리 바와가 디자인한 대부분의 건물은 호텔이거나 개인 주거이기 때문에, 파라다이스로드 갤러리 카페는 바와의 건축을 부담 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장소다. 이 카페는 음식과 차, 다양한 술도 제공하고 있지만 때로는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장소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한번은 늦은 밤까지 연주되는 끈적한 재즈소리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오면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담배연기 속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어 자리에 앉아 깔루아를 한잔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한여름 밤의 열기를 식힌다. 연주하는 재즈는 나쁘지 않고, 한껏 멋을 부린 남녀들이 속삭이는 분위기가 좋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입모양과 석쇠 위에 지글거리는 생선에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에도, 분주히 접시를 나르는 웨이터들의 조심스런 움직임에도 재즈의 리듬이 묻어난다. 




한권의 책과 같은

파라다이스


분할된 건물의 공간을 차례로 걸었다. 각각의 공간을 지나치면 순간순간 분위기를 휙휙 바꾸는 그의 재주에 다시금 놀라고 만다. 이 카페는 마치 한권의 책과 같이 느껴진다. 여러 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처럼 전체의 구조 속에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엉켜있다. 걸어가면서 맞닥뜨리는 공간의 변화가 지루하지 않게 건물 안에서 방황하게 만든다. 계속 그의 건물 안에서 방황하고 싶다. 계속 그의 공간 안에서 산책을 즐기고 싶어진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침내 메인 공간이 나온다. 실내에는 철제 프레임에 가죽을 덧대어 만든 의자가 탁자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카페로 쓰이는 건물의 실내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안마당을 향해 열려있다. 늦은 오후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의 음식냄새가 약간의 식탐을 부추긴다. 잠깐 망설이지만 이내 곧 비싼 음식 값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태연히 커피 한잔만 주문한다. 예전에 바와가 앉아 설계에 골몰했을 공간에 앉아 밖의 마당을 바라본다. 바와가 사라진 공간에 바비큐 요리를 위한 시설과 기둥과 지붕만으로 세워진 레스토랑으로 채워졌다. 

한낮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는 차양시설과 천장의 중간 중간에 설치된 선풍기 바람으로도 충분히 쾌적하다. 꽤나 고급스러운 시설임에도 에어컨을 틀어놓은 공간이 없다. 바와의 건축은 약간의 인내심만 보인다면 얼마든지 건축적 배려로 인해 쾌적한 공간에서 지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움 속에

묻어 있는 바와의 아이디어


기둥은 은은한 광을 내어 반질반질하다. 나무기둥의 아래는 화강암을 받쳐놓아 흰개미가 밑동을 갉아먹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비가 많이 오는 열대지방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박공지붕은 바와의 주요 건축요소가 되었다. 박공지붕은 뜨거운 햇빛을 차단하고, 경사진 면은 비가 오면 그대로 흘러내려 비가 내부로 새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공사하기 쉽고 열 차단이 우수한 기와를 찾기 위해 여러 번의 실험을 반복해 바와의 초기 건축물에 비해 나중에 지어진 건축물은 상당히 시원하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던 바와의 아이디어와 실험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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