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모두 창작에 의한 이야기입니다.
해준은 블루 모스크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 찍은 사진 중에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라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리면서 '블루 모스크와 화창한 날씨'라고 적었다. 물론 큰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을 함께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드에는 몇 개의 하트가 연달아 붙었다. 청바지 앞주머니에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그리고 그날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전달해 주는 온기가 해준의 얼굴을 시작으로 천천히 그의 온몸으로 퍼기지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그는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눈꺼풀 아래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들은 해준을 피해 양쪽으로 갈라져 지나쳐갔다.
잠시 그렇게 몇 분을 보내곤 감았던 눈을 뜨고, 가던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하필 이스탄불이었을까?'
몇 달 전, 마틸다가 물었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로 가고 싶어?"
"글쎄, 아마 이스탄불에 가 있을 거 같은데..."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불쑥 뛰어나온 도시, 이스탄불.
'왜 하필 이스탄불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을까?'
튀르키예에서 온 한 남성, 그 남자를 만나기 전에는 튀르키예를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리고 그 남성이 사라졌을 때, 튀르키예에 대한 관심도 같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늘 튀르키예를 마음 한편에 담아두고 있었다. 피부에 남겨진 오래된 상처의 거무스레한 흔적처럼...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 문득 지난 상처를 보고 다시 기억을 되살려내는 것처럼...
해준이 가장 불안한 시기를 지나고 있던 시절, 그 남자를 만났다. 언젠가 그가 이스탄불은 동양과 유럽이 만나는 곳이라고 말했을 때, 해준은 이스탄불이 마치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발을 걸치고 있지만, 어떤 곳에서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이스탄불은 아름다웠고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찬 도시였다.
"언젠가 우리 꼭 같이 가자!" 그 남자는 그렇게 자신이 자란 도시를 해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에게 이스탄불은 해준이랑 당연히 같이 가야 할 곳이었다. 그곳엔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에게 해준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곳엔 낮에도 밤에도 수없이 걸었던 길거리들이 있었다. 그 익숙한 풍경 속으로 해준이 들어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에게 익숙한 공간에 누군가를 안내하는 일이란 깊은 내면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과 같았다. 물론 그 생각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해준은 결국 그 남성의 공간으로 안내받지 못했다.
해준은 평소보다 더 많이 걸었다. 블루 모스크에서 한 30분 남짓 걸어 동쪽 해안가에 닿았다. 그곳에 서니 바다 건너에 아시아 대륙의 끝이 보였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간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서로가 육안으로 바라볼 거리였다. 그렇지만 저 건너편은 아시아 대륙이고, 해준이 선 곳은 유럽 대륙이었다. '그런 건 누가 정하는 걸까?' 해준은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어놓은 선으로 어떻게 한 나라가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 속할 수 있을까?'
대륙을 구분하기 위한 선 뿐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온갖 기준들로 가득했다.
'그 누군가가 정한 기준에 의하면 나는 바람직한 사람일까? 나는 부도덕한 사람일까?'
'나는 행복한 사람일까? 불행한 사람일까?'
해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그 답들에 무신경하게 되었다.
해준은 해변에서의 잡생각들을 털어내고 또다시 걸었다. 그날은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지나치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아마도 그 남자의 얼굴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얼굴 윤곽선도 기억에 의지해 그려내지 못했다. 희미하고 뿌연 얼굴로 기억되는 사람. 그렇지만 가끔 그 희미해져 가는 기억이라도 끄집어내어 자꾸 꼽씹어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해준을 지나쳐가는 수많은 얼굴들 속에는 그 남자와 비슷한 구석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해준이 만났던 남자가 될 수 없었다.
해준은 우연히라도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그렇지만 이스탄불이라는 큰 도시에서 아는 사람을 우연히라도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모르는 해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끔은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안내하지 않을까?'라고 해준은 생각했다. 그 시절 그들이 우연히 만났던 것과 같이... 사람은 그렇게 가끔 눈곱만큼의 논리도 없는 일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지 않는가? 희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길고 지루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낙관적이지 않으면 이 극단적 슬픔과 스트레스로 가득한 세상을 어떻게 맨 정신으로 버티겠는가? 그러나 해준은 알고 있었다. 굳이 희망이 현실이 되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것을...
해준은 관광객으로 가득한 거리로 이제 막 들어섰다. 퇴근시간이 되자 더 많은 차량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바삐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 분주한 혼란 속에서 해준 혼자만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동떨어져 나온 사람마냥.
주변 레스토랑은 저녁시간이 되자 분주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랍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거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해준은 그 냄새가 조금은 익숙했다. 그 남자가 요리해 주던 음식과 비슷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길고 친절히 설명을 들었지만 이제는 음식 이름도 기억에 나지 않았다. 다만 그 향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때, 해준은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거리의 냄새를 깊게 들여마셨다. 마치 소중한 기억을 상기하려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쳐갔다. 그리고 그는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마치 동떨어져 나왔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마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