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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Dec 07. 2024

[소설] 라이트닝  02

다음 역은 룬드입니다

2018년 8월. 스웨덴 룬드


"다음 역은 룬드, 룬드입니다. 기차와 플랫폼 사이의 간격이 넓으니 내리실 때 조심해 주세요."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방송을 듣고 해준은 기차에서 내렸다. 손목에 찬 검은색 스와치 시계는 오후 3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플랫폼에는 이제 막 도착한 젊은 학생들로 붐볐다. 그들 사이로 지나쳐가는 그의 귀에는 스웨덴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어가 뒤섞여 들렸다. 

해준은 장시간 비행으로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손에는 무거운 짐가방 두 개가 들려있었는데, 이미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닥 바퀴 2개가 빠져나간 상태였다. 나머지 2개의 바퀴로 가방의 무게를 지탱하면서 균형까지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쿠팡에서 너무 싼 가방을 샀나?' 자신을 나무랐지만, 상황을 고치긴 글렀다.

기숙사는 역에서 걸어서 5분이면 족했다. 그렇지만 열쇠를 받아야 했기에 고장 난 검은색 대형 가방을 끌고 캠퍼스 한가운데 있는 학생회로 향했다.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 내부도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양 사람들에 비해 키가 작은 해준은 그들 속에 파묻혀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없었기에, 갈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대학은 갑자기 몰려드는 대규모 학생들을 대응하기엔 벅차보였다. 모든 곳이 북적이고 아수라장이었다. 행정처리가 늦었기 때문에,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린 끝에야 해준은 담장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름을 말하자 안경을 쓴 금발의 젊은 남성은 눈으로는 몇 가지 서류를 확인하면서 오른손으로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열쇠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는다.

"룬드대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좋은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담당자가 열쇠를 해준에게 건넸다.


8명이 함께 쓰는 기숙사 복도의 맨 끝, 출입구에 가까운 쪽에 해준의 방이 있었다. 그는 무거운 가방 2개를 작고 하얀 방에 집어넣었다. 깔끔하게 비워진 방에는 이케아 일인용 낡은 침대가 한쪽 구성에 놓여 있었다. 커버가 없는 매트리스 위에는 베개를 비롯한 침구류는 보이지 않았다. 가구는 그저 맨몸을 드러낸 침대와 방크기에 비해 조금 큰 듯한 책상과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많은 학생들의 손을 거쳐간 오래된 책상의 표면은 커피자국이며 무언가에 탄 자국이 있었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로 가득했다. 

나무틀로 만들어진 유리 창문 너머로는 기차역 주차장이 바라보였다. 창문을 조금 열자 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여름임에도 그는 한기를 살짝 느꼈다. 

작은 스테인리스 싱크대 밑에는 모텔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코드를 연결하니 작은 떨림과 함께 '윙~~' 하는 낮은 소음이 방 안으로 퍼졌다.  


해준은 청바지와 티셔츠를 벗어 의자 위에 올려놓고선 창문 유리에 비친 자신의 맨몸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았다. 별 특징이 없는 몸, 한 번 보고 돌아서면 다시 기억하기 어려운 평범한 얼굴. 그것이 35년 평생 자신에게 내린 평가였다. 그는 나머지 캘빈클라인 검정 속옷마저 벗어서 의자에 올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를 틀자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왔다. 좁은 욕실은 금세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바닥에는 물이 해준의 발가락 위로 찰랑이기 시작했다. 

'낯선 공간의 샤워는 왜 늘 이상한 기분이 들까?' 따뜻한 물줄기를 얼굴로 받아내며 생각했다.

아마도 원나잇 상대의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는 느낌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 몸은 감각적으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준의 머리에서 튕겨 나온 물방울들이 변기 뚜껑에 그대로 떨어졌다. 그만큼 양변기와 샤워기가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좁았다. 그러나 불평할 마음은 없었다. 

샤워를 마친 그는 큰 흰색 타월로 몸을 말리고 커버가 없는 매트리스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검은색 가방 두 개에 닿았다. 한국에서부터 무겁게 들고 온 가방이었다. 35살이 된 장년 남자의 인생이 가방 두 개로 압축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씁쓸하게 만들었다. 열심히 뜀박질을 해서 쉼 없이 달리고 달려왔지만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건 허망한 기분이었다. 

해준은 가방에서 셔츠 두 벌을 꺼내서 하나는 가슴을 덮고 다른 하나는 다리 쪽을 덮었다. 피곤한 몸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복도 밖에는 플랫 메이트들이 저녁을 준비하면서 나누는 대화와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오늘의 세미나는 '기후변화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학교 공지 시스템을 통해 미리 공지한 논문들은 다 읽어 왔겠죠?" 영국 억양이 심한 중년의 남자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앉아 있는 40여 명의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교수는 키가 170 cm 정도로 작았고 깡마른 체형이었다. 며칠 동안 잠을 세운 듯해 보이는 움푹 들어간 눈과 피곤한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아... 참! 오늘이 첫 수업이죠? 국제개발 2년 석사과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 이름은 리처드입니다. 그냥 호칭 없이 리처드라고 부르세요." 

해준은 첫날부터 수업이 진행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첫째 주는 적응기간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제로 읽을 자료가 있었던 것도 몰랐고, 더구나 학교 온라인 공지시스템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제길... 첫 시간부터 제대로 망하게 생겼네...'라고 해준은 생각했다.

리처드 교수는 강의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맨 앞줄에 앉아있던 해준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그럼, 아. 저기 학생이 먼저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요? 읽은 자료를 중심으로 말해주세요."

해준의 표정은 순간 얼어붙었다.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잠잠해졌고, 모든 학생들의 눈이 해준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논문을 읽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하려다, 그냥 대충이라도 얼렁뚱땅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후변화는 지구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서 심각한 자연재해를..." 해준은 더듬거리며 다음으로 할 말을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내려 했으나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강의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얼굴이 발그레지기 시작했다. 리처드 교수는 잠시 해준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말했다.

"자네... 논문은 읽었나?"

"못 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해준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첫 시간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음부터는 꼭 자료를 읽어오길 바랍니다. 석사과정은 혼자서 책과 논문을 읽는 과정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물론 굉장히 외로운 작업의 연속이지만, 지식을 쌓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피할 도리가 없어요." 교수는 잠시 숨을 깊이 들이마시곤 말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이 불쌍한... 자네 이름이 뭔가?"

"해.. 해준이라고 합니다..."

"그래, 다른 사람이 이 말문이 막힌 해준을 대신해 줄 사람 있나요? 기후변화와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는 다들 아실 테니 그냥 넘어가고, 둘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해주세요."

대여섯 정도가 손을 들었고 그중 하나가 선택되어 말했다.

"기후면화는 경제적 혹은 사회적인 약자에게 더 혹독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이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기 때문이죠. 한 예로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물론 농업에 종사한다고 다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요." 

"유럽의 농부들은 땅부자들이죠." 한 학생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여하튼, 아프리카를 대표적으로 보면 소작농이나 시즌성 농부들이 기후변화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심각한 생존의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취약계층 속에 더 취약한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성이죠."

그 뒤를 바로 이어, 한 금발의 여학생이 말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으로 남성이 토지 소유권이나 금전적 자산을 여성에 비해 훨씬 많이 소유하고 있어요.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기후재난이 발생하면 복구까지 남성보다 더 오래 걸립니다. 같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여성들이 더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물론 교육은 말할 필요도 없죠.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교육 수준이 낮기 때문에, 기후변화에 관한 정보의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기후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늦어질 경우 이는 신변에 큰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죠."

"임산부이거나 갓난아기를 가진 여성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 나라의 미래 생산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논쟁의 열기는 뜨거워지고 있었으며, 모두들 첫 시간부터 교수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고 있었다. 그중에 해준은 제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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