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진 계란
해준은 자신의 작은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논문과 책을 읽었고,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에세이를 쓰는 일도 잦았다. 끼니도 대충 때웠기 때문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엌에서 다른 학생들과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설사 누군가와 마주친다 해도 살짝 고개를 숙여 잠깐 인사만 할 뿐이었다.
영문 자료는 밤이 늦도록 읽어도 수업 마감 전에 다 마칠 수가 없었다. 양도 양이었지만, 고급 영어를 할 실력이 그에겐 없었다. 모르는 단어가 보이면 사전부터 먼저 뒤져야 했기에 많은 시간이 걸렸고 늘 글의 흐름이 끊겼다. 당연하게도 에세이 쓰기 과제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제한된 언어는 사고의 폭을 제한했고, 의사 표현을 제한했으며, 사교활동을 제한했으며, 결국 그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언어가 가지는 힘은 대단했다. 머리는 어른의 생각을 가졌지만 입은 유치원생 수준의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준은 늘 열심히 살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열심히 살다 보면 보상이 뒤따를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믿었다. 공부도 곧잘 하는 편이라 친척들 중에서 머리가 가장 좋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그건 단지 엄청난 수고를 들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사실 공부할 머리는 타고나지 않았다. 되지도 않을 일에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으니 행복할 리가 없었다.
또한 해준은 또래 중에서 가장 예절이 발랐으며 차분하고 심성이 고운 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태어난 후로 한 번도 속을 썩인 적이 없는 착한 아들'로 타인에게 말하곤 했었다. 그는 말 잘 듣는 아들이었으며, 믿을 수 있는 직장 동료였으며,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다. 모두들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대우했다. 그렇지만 반대로 해준에겐 믿고 의지하며 진솔한 대화를 할 상대는 없었다. 그저 타인이 자신을 규정하는 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평생 모은 돈으로 유학을 왔기에 여기서 실패할 수는 없었다. 그 돈은 스웨덴에서 정확히 2년의 석사과정을 보낼 만큼의 금액이었다. 그렇기에 석사가 끝나면 바로 직업을 구하거나 박사 과정으로 진학을 해야만 했다. 이곳 스웨덴에서의 생활이 그에겐 절실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해준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힘들지만 언젠가는 적응해 나갈 것이고, 그 보상은 클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을... 아무리 노력을 한다한들 시작점부터 틀린 일을 바르게 잡긴 불가능해 보였다.
해준은 생각했다. '어쩌자고 내가 가진 모든 돈을 들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리고 자신을 책망했다.
해준이 공부에 자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같은 학과 학생을 이길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해준과는 정반대였다. 게을렀고 늘 술에 취해 클럽과 파티로 매일 같이 시간을 허비하는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겐 똑똑한 머리가 있었다. 해준이 가지고 있지 못한 그 똑똑한 머리.
해준이 밤을 새워가며 쉬지 않고 읽고 써서 제출한 에세이는 대부분이 C 점수나 간혹 D 점수로 돌아왔다. 그와 반대로 늘 파티를 즐기다 수업에 졸린 눈을 비비며 강의실에 늦게 나타나던 학생들은 A 점수를 쉽게 받았다. 물론 그들은 자료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 늘 당당했다. 세미나 토론에서 늘 거침없는 주장과 지식을 펼쳤다.
공부에 필요한 똑똑한 머리, 그게 해준에게는 없었다. 부지런했지만 열정이 없었으며 창의적인 사고를 가지지 못했다. 그랬기에 지식을 배울 수는 있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타인의 말에 경청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진 못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해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혹은 그가 이해는 하고 있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평생을 열심히 살아도 그들의 반을 따라갈 수 있을까?'
과거의 의문은 지금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샤워를 마치고 뿌연 거울을 손으로 쓱하고 닦았다. 손바닥 크기의 맑아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의미 없는 인생이나 살아가는 놈!' 누군가가 해준의 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나날이 지속되면서 해준은 점점 지쳐갔다. 굳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가 과묵한 아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이들은 그가 불만으로 가득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이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도 여기서도 잊힌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 어쩌면 그걸 해준이 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체중은 눈에 띄게 말라 갔으며, 얼굴은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수척해져만 갔다. 자신이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건 슬픈 감정이 아니었다. 화가 난 기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허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감정이 어디론가 매몰되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사라져 가는 그 감정을 따라 자신도 이 세상에서 희미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존재하지만 누구도 볼 수 없는 그런 하찮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무얼 얻고자 여기로 왔을까?'
수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준을 따라다녔다. 해준은 그저 눈을 감고 현실에서 잠시 도망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면 동일한 현실이 나타났다. 눈을 감는다고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시야에서 사라질 뿐이었다. 아무도 못 찾을 장소가 있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겐 홀연히 사라질 용기마저 없었다.
'세상 모든 것에 눈치나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줏대 없는 겁쟁이'
그 사람이 바로 해준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해준은 근처 슈퍼에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들렀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아담한 규모의 슈퍼는 주말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금요일 오후가 되면 직장인이 느끼는 소소한 자유와 즐거움이 있었다. 몇 명의 손에는 와인병이 들려있었고 고기를 판매하는 매대는 좋은 부위의 고기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일의 여름 날씨를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소한 바비큐 파티를 열고 잘 익혀진 스테이크에 와인도 한잔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준은 아직 스웨덴 환율이 익숙하지 않아 조심스럽게 가격표를 살폈다. 머릿속으로 한국돈으로 얼마인지를 계산하면서 식료품을 빨간색 바구니에 담았다.
한국에서는 아무 쌀이나 사도 상관이 없었지만, 여기 스웨덴은 여러 종류의 쌀이 있어 해준을 망설이게 했다. 쌀알이 길쭉한 모양의 인도쌀이 있었고, 아랍인들이 먹는 쌀이 있었으며, 태국에서 수입된 자스민 쌀도 있었다. 매일 쌀을 주식으로 먹는 한국의 마트에선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종류다. 진열장을 훑어보면서 현지인이 죽을 끓일 때 먹는 쌀을 골랐다. 죽을 만들지 않는다면 가장 한국쌀과 비슷하다고 누군가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포장지에는 'Grötris'라고 적혀 있었다. 해준은 그 쌀을 사면서도 어떻게 발음을 하는지를 몰랐다. 양파, 두부, 현지식 라면, 우유, 사과 몇 개도 바구니에 담았다. 빠듯한 생활비를 생각하면 북유럽의 물가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늘 소비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마지막 통로에 신선제품이 있는 매대에서 계란 20개 들이 한 개 패키지를 조심히 손에 들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줄의 맨 끝에 섰다.
계산대 직원은 밀려드는 손님을 대응하기 위해 신속하게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해준도 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검은색 컨베이어 벨트로 밀려드는 물건들을 급하게 종이 쇼핑백에 담았다. 그러다 실수로 계란 꾸러미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급한 손놀림에 순식간에 손에서 미끄러진 계란 20개는 회색 시멘트 테라조 바닥으로 떨여졌다. 끈끈한 노란 액체가 흰색 계란 껍데기와 함께 산산조각이 되어 바닥을 엉망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출입문을 오고 갔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주변 상황에서 해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시 큰 눈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제삼자인 것처럼 이 상황을 쳐다보다, 그 일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환기시키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해준을 도와준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무관심하게 계란의 참혹한 낙하 현장을 피해서 지나쳐 갈 뿐이었다. 해준은 휴지라도 구해서 엉망이 된 바닥을 닦고 싶었다. 그렇지만 휴지를 구할 수 있는 화장실은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계산대에서 일하던 직원이 당황하는 해준을 발견하곤 다가와서 말했다.
해준은 스웨덴어로 말하는 그에게 영어로 말하는 게 실례가 아닐까 싶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에겐 영어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네요. 제가 바닥은 청소하고 싶은데요... 청소도구나 휴지라도 있으면 좀 주시겠어요?" 부끄럽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해준은 그 직원의 눈을 마주 볼 생각조차 못했다.
직원은 해준의 어깨에 잠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청소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금방 치울게요." 해준은 그 친절한 제스처에 사소하지만 따뜻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직원은 다른 이를 불러 여기 좀 치워달라는 손짓을 하곤 말했다. "아... 그리고 이 계란은 새 패키지로 다시 집어 가시면 돼요." 직원은 해준을 향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계산은 다시 하실 필요 없으시고요."
"제 실수로 깨뜨렸는데도요?" 그의 호의에 조금 놀란 해준이 말했다.
"네. 저희 규정이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직원이 양동이와 청소도구를 들고 와 바닥을 재빠르게 청소하곤 사라졌다. 그 자리엔 '미끄럼 주의!'라고 적힌 작은 노란색 표지판이 세워졌다. 해준은 자신의 실수로 엉망이 된 바닥이 다시 깔끔해진 것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그는 직원 가슴에 적힌 이름표에 시선이 닿았다.
'에밀 EMIL'
그리고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긴 듯한 짙은 갈색 머리, 너무 길지 않게 자란 수염, 머리색과 비슷한 눈동자, 너무 높지 않은 콧날을 가진 젊은 남성이었다. 매끈한 피부 위에 살짝 핑크빛 홍조를 띠는 볼에는 소년미와 장년의 남성미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은 슈퍼마켓 ICA의 짙은 회색 유니폼은 살짝 타이트했기에, 운동으로 다져진 건장한 몸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잘 생겼네...'
해준은 돌아선 그의 반듯한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