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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Mar 02. 2019

전체의 이익을 위한 살인

넷플릭스의 소셜 실험, Derren Brown <The Push>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실험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있다. 한 사람을 상대로 사회적 실험을 한 것으로, 제목은 <THE PUSH>다. 여기서 데런 브라운이라는 사람은 소셜 컴플라이언스를 주제로 흥미로운 실험을 한다. 간단히 말하면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당신은 살인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당신을 살인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소셜 컴플라이언스'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소셜 컴플라이언스(Social Compliance)는 국제개발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제개발에서는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기업이 어떻게 자신의 노동자들을 잘 대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복잡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넷플릭스의 프로그램, 더 푸시에서 말하는 소셜 컴플라이언스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 혹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개인의 올바른 행동'에 대한 뜻에 가깝다. 이 의미를 국제개발 분야로 확대해서 설명해 보자면, 기업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특정한 조건에 맞게 노동자를 대하게 된다. 

소셜 컴플라이언스는 점점 기업활동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공장은 더 이상 미성년자를 불법으로 고용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바이어를 모조리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기업들은 안전하지 않은 작업환경에서 생산된 물건을 구매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적극적으로 기업이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서, 혹은 자연환경 보전하기 위해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기 원한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은 주변의 기대, 즉 사회가 기업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는 기업이 정당하게 소비재를 생산하길 원하고, 
이 중심에 소셜 컴플라이언스가 작동한다.


문제는 이런 사회적 기대가 늘 변한다는데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트렌트가 바뀌고, 기술은 발전하며, 사람들의 취향은 늘 변한다. 그리고 지구는 점점 오염되어 간다. 과거에 옳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지금은 완벽한 악덕한 일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별 다르게 신경을 쓰지 않고 하던 일들이 지금은 엄청나게 타부시 되는 것들도 또한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은 국제개발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고, 기업활동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예전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미성년자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는 소비자가 끔찍한 노동환경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예전보다는 그래도(?) 많이 줄어들었다. 소비활동에 도덕이 중요한 개념이 되었고, 소비자는 어느 정도의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기업이 생산활동에 임하길 기대한다. 


그 기준은 어디에서 올까?

그런데 문제는 그 어느 정도의 기준이 정말 어느 정도인가가 문제다. 그렇기에 소셜 컴플라이언스를 실천하는 기업들의 기준이 각자 다르다. (물론 몇 개의 국제적 기준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유럽은 까다롭게 구는 편이고, 아시아권 기업들은 그렇게 품질은 까다롭게 따지지만 소셜 컴플라이언스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다. 그 기준은 너무 다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소셜 컴플라이언스는 법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기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변 사람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The Push>의 프로그램은 흥미롭다. 이 넷플릭스 프로그램은 한 사람을 사회적 실험에 초대한다. 


넷플릭스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회적 실험

넷플릭스 프로그램에 초대된 실험 대상자는 사람을 죽였을까?


그는 평소에 아주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도덕적이고 정직한 편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 평범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간다. 한 자선 파티를 준비하게 만들고, 그곳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VIP 기부자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고(물론 가짜로), 자선 행사를 망칠 수 없기에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그를 설득한다. 그는 처음엔 당황하지만, 점차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잘못된 행동에 나서게 된다. 사체를 박스에 넣어 숨기고, 자신이 직접 VIP인척 행세를 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을 기만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이런 비도덕적인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을 그였다. 그러나 점차 그의 행동은 적극적으로 발전한다. 여기서 우리는 느끼는 게 있다.


한 사람을 조장한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는 얼마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영향을 많이 받는가?


실험은 점점 극에 치닫는다

평소 평범하게 살아온 꽤나 착한 편에 속했던 사람은 어느 정도 선에서 이 행동을 멈출까? <The Push>는 그렇게 한 사람을 극한의 상황으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험에 비밀리에 초대된 대상자들은 사람을 죽이는 행동에 까지 참여하게 된다.

이 모든 행동이 그저 주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였다. 왜 개인의 도적적 기준은 이렇게 쉽게 붕괴되는가? 왜 우리는 <소셜 컴플라이언스>는 쉽게 변하는가?를 이 프로그램은 여실히 그리고 조금은 잔인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프로그램 자체는 문제가 많다. 이렇게 실험 참여자들의 얼굴이 다 공개된 가운데, 가짜라고 해도 살인에 동조하게 만들고 프로그램 끝에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실험이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누구는 살인자가 될 잠재성을 갖추고 있다고 만 천하에 떠들어 놓고 말이다.


조직적 행동의 중요성

그러나 이 실험은 우리가 <소셜 컴플라이언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접근법에 좋은 개념을 가지게 해 준다. 그건 개인이나 기업이나 소셜 컴플라이언스는 얼마든지 조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나쁜 쪽으로 소셜 컴플라이언스를 조장했다.


그렇다면,  또한 가능하지 않은가?
좋은 쪽으로 소셜 컴플라이언스를 조장하는 것도 말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다수가 한 사람을 비도덕적인 인간이 되도록 조장했다. 즉, 다수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다수가 압력을 넣으면 개인은 그에 영향을 받게 된다. 

즉, 기업활동도 마찬가지다. 다수가 압력을 넣으면 기업은 다수가 원하는 쪽으로 비즈니스 환경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 

조금 전에, 유럽과 미국의 기업들은 다소 강도 높은 소셜 컴플라이언스를 가지고 있지만, 아시아 기업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부분이 있다. 왜 그럴까? 간단히, 우리 아시아인들은 기업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조직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2년 나이키를 위해 물건을 만들던 건물이 붕괴되면서 1,134의 공장 노동자가 사망했고, 수 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비자들은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많아지길 원했다. 소비자의 요구대로 나이키는 그렇게 안전한 일자리 환경을 만드는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집단적인 요구, 그게 바로 소셜 컴플라이언스이다. 우리는 기업에게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길 요구할 힘이 있다. 이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참고: https://theconversation.com/five-years-after-deadly-factory-fire-bangladeshs-garment-workers-are-still-vulnerable-88027

https://www.nytimes.com/2019/02/21/world/asia/bangladesh-fir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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