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8)
김영후가 민박집주인에게 화투를 빌려왔다. 두 팀으로 나눠 저녁식사와 설거지를 걸고 민화투를 쳤다.
화투를 잘 치는 것도 능력이었다. 문승협과 조운대는 화투를 못 친다는 이유로 저녁식사당번에 당첨됐다. 민박집마당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 밑에서 저녁을 준비했다. 석유버너에 불을 붙이고 씻은 쌀을 올렸다. 민박집주인이 외지에서 학교에 다니는 딸이 갖다 주랬다며 매운탕과 잘 익은 열무김치를 가져왔다. 다행히 찌개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달걀프라이를 하려는데 이정선이 나왔다. 문승협이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어 올렸다. 이정선이 옆에 쪼그려 앉아 소금을 뿌렸다. 슬쩍슬쩍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모두 빙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였다. 여학생들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민박집해결에 도움받고 밥을 얻어먹은 보답이었다. 장기원과 김달우가 옆에서 도왔다. 이성에게 대한 관심이 내기화투결과를 무력화시켰다.
설거지를 마치고 30분쯤 지나, 저녁 먹을 때부터 퍼붓던 비바람이 평온해졌다. 창 밖을 내다보던 장기원이 김은혜에게 밤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김은혜가 따라나서면서 김달우를 보았다. 김달우시선은 이정선에게 가있었다. 이정선이 혹시 낮에 쫓아왔던 남학생들과 마주치면 어쩌냐고 중얼거리며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김달우가 기다렸다는 듯 그 놈들이 해코지할지 모르니 따라가 보자고 하였다. 이정선이 일어서면서 문승협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김달우눈치를 살피는 문승협에게 다시 재촉하였다. 김달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승협은 마지못해 따라가면서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셋이 바로 뒤따라 나갔으나, 장기원과 김은혜는 보이지 않았다. 해변길을 따라 걷다 방파제까지 갔다. 조금 전까지 비바람이 불어서인지 인적이 없었다. 방파제 끝에 다다라서야 남녀 한 쌍이 앉아있었다. 문승협일행이 다가가는 인기척을 못 느낀 남녀실루엣이 하나로 겹쳤다. 셋은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황급히 뒤돌아서 걸었다. 키스하는 장면이어서 당황했다. 방파제를 빠져나오는 동안 서로 어색해져 한마디 없었다. 확인되진 않았지만 장기원과 김은혜라고 짐작하였다. 갈 길을 잃어 숙소로 그냥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기원과 김은혜가 들어왔다. 갈 때와는 사뭇 다르게 많이 가까워져 보였다.
이정선이 김은혜를 급히 데리고 나갔다가 금세 들어왔다. 다짜고짜 방파제에서 본 키스한 커플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했다. 민박집에서 쉬던 친구들과 박선영은 영문을 몰랐다. 무슨 말이냐며 똘망똘망 한 눈빛으로 빠른 대답을 촉구하였다. 김달우가 조금 전 방파제에서 본 상황을 설명했다. 키스한 커플이 장기원과 김은혜라 생각하였으나, 심문한 결과 아쉽게도 다른 사람들이라고 했다. 모두의 시선이 쑥스러워하는 장기원과 김은혜에게 꽂혔다. 장기원이 추가로 나서 적극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이정선이 김은혜를 취조한 정보는 시뻘겋게 변한 장기원의 얼굴색으로 신뢰가 무너졌다. 김은혜까지 고개를 못 들어 확신을 갖게 했다. 다들 알면서 넘어가주자는 눈치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장기원이 뻘쭘한 위기상황을 모면하려고 화투치자며 담요를 펼쳤다. 김은혜는 낮에 사 온 꿀꽈배기와 빠다코코넛 과자들을 가져왔다. 김영후가 좌불안석인 장기원을 도와주려고 나섰다. 서울에서 고스톱이라고 불리며 유행하는 고도리를 아는지 물었다. 친구들이 호기심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김영후가 아버지에게 배운 고스톱을 열성적으로 설명하였다. 남자들 네 명이 실습을 거쳐 실전에 들어갔다. 여학생들과 화투를 못 치는 조운대와 문승협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고스톱이 몇 판 돌아가고, 김은혜가 장기원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응원했다. 장기원은 친절히 호응하였다. 둘의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방파제키스사건을 부인한 것이 유명무실해졌다. 사건 이후 무척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둘만 모를 뿐이지, 남녀친구들은 이미 피부로 느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정선에게 호감이 있는 김달우였다. 좀처럼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얼핏 보면 삼각관계였지만, 문승협은 관심을 보이는 이정선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문승협과 조운대가 고스톱을 시현해 보려고 따로 화투판을 벌였다. 이정선과 박선영도 같이하자며 끼어들었다. 김영후에게 물어가며 배웠으나 복잡한 규칙에 그만두었다. 여학생들이 민화투를 가르쳐주겠다며 족보를 적었다. 익숙해질 즈음 육백도 알려주었다. 조운대가 화투를 치다 뜬금없이 물었다.
“느그들 술담배는 언제부터 했냐?”
“호호호, 여그 와서 호기심에 해본 거여.”
“술은 쪼까 마시겄든디, 담배는 영 못 피겄드라.”
“그래갖고 담배랑 라이터는 쓰레기통에 버렸단께.”
“나는 느그들 쌩날라리로 알았다잉.”
“연설하네, 즈그들도 술 마시고 담배 피드만.”
“우리도 여그 와서 호기심에 첨 해본 거여.”
조운대가 그제야 꿍하던 경계심을 풀었다. 그 판에서 진 박선영손목을 벌칙으로 강하게 때렸다. 박선영이 조운대의 도발에 전투력이 상승하였다. 한번 걸리면 죽이겠다는 심정으로 화투를 쳤다. 마침내 조운대가 걸려 손목을 엄청 세게 맞았다. 장난수위가 점점 높아갔다. 둘이 그렇게 몇 번 부딪히더니 꽤 친해졌다.
화투놀이에 정신 빠진 사이, 바깥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다들 출출했다. 여학생들이 라면을 끓여 와 맛있게 먹었다. 어젯밤과 다른 분위기에서 많이 친숙하였다.
남녀학생들은 이후 나이롱뽕과 삼봉이라는 종목으로 갈아탔다. 화투를 치면서 부순 라면에 수프를 뿌려 과자대용으로 입가심했다. 새벽 두 시가 너머 잠자리에 들었다. 남녀혼숙이라 가방으로 경계선을 만들었다.
민박집주인이 우려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비바람이 소강상태일 때 빠져나가려고 서둘러 아침을 챙겨 먹었다. 다들 짐을 챙겨 선착장으로 갔다. 다행히 예상보다 약한 태풍으로 배가 운항하였다.
완도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내리지 않았다. 문승협과 친구들은 목포행 버스표를, 여학생들은 나주행 버스표를 샀다.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남녀학생들은 심리에 따라 행동이 나뉘었다. 특히 장기원이 출발시간이 다가올수록 안절부절못했다. 김은혜와 석별의 시간이 다가와서였다. 김은혜와 전화번호와 집주소를 교환하였다. 김달우는 망설이다 끝내 포기했다. 남녀학생들은 이틀 동안 즐거웠다는 인사를 끝으로 각기 버스에 올랐다. 문승협과 친구들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노곤함에 곯아떨어졌다. 목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릴 때는 색다른 여름캠핑경험으로 우정이 부쩍 돈독해졌다. 우리끼리라는 추억이 연대감을 심어주었다.
문승협이 여독으로 이틀간 쉬는 주말 동안, 태풍영향으로 비가 오다 말다 하였다. 월요일 아침부터 한여름에 어울리는 따가운 햇빛이 내리 쨌다. 문윤아가 늦잠 자는 문승협을 깨우려고 라디오를 머리맡에 켜놓았다.
‘지난 10일 서울경동시장이 착공했고……. 정부가 석탄과 연탄값을 각각 15.81%, 10.87%로 대폭인상해 올겨울이 더욱 싸늘할 것으로……. 법무부가 광복절을 맞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 등 재소자 1,061명을 특별 사면하는 광복절특사를……. 서울지하철 3,4호선 역 확정고시에 이어 도심공사를 착공…….’
“누구야, 누가 라디오를 여기다 켜놨어?”
“오빠, 잠 좀 그만 자라, 캠핑 가서 뭐 했길래 계속 잠만 자냐?”
“문윤아, 네가 켜놨어?”
“엄마가 오빠 깨우라는데, 깨워도 일어나야지. 하도 안 일어나니까, 오빠 깨우려고 라디오 켜놓은 거야.”
“왜, 왜 깨우래?”
“승협이 일어났니? 그만큼 놀았으면 공부도 좀 해야지, 고등학생이 맨날 잠만 자면 어쩌려고 그러냐?”
문승협은 엄마 이항리의 야단치는 소리에 찌뿌듯한 몸을 일으켰다. 비몽사몽 간 씻고 아침을 먹었다. 엄마잔소리를 피해 시립도서관으로 향하였다.
목포시립도서관은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면서, 1898년 일본영사관이 설치됨에 따라 영사관건물로 1900년에 완공했다. 광복 후 목포시청사로 사용하다 1974년 목포시립도서관으로 개관하였다. 붉은 벽돌로 지은 신고전주의 러시아식 건축양식이며, 부대시설로 우체국과 경찰서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중 공중폭격에 대비해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여 만든 인공동굴인 방공호가 있고, 목포변천사의 상징이자 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방학중 이른 아침 내리쬐는 뙤약볕에도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많았다. 도서관출입문부터 30여 개 계단을 내려와 유달산산책로 입구까지 길게 줄 서있었다. 개관시간을 기다리며 조용히 단어장을 보는 학생이 있는 반면, 아예 가방으로 줄 세운 뒤 대열에서 벗어나 친구와 잡담하고 장난치는 학생도 있었다.
도서관출입문이 열려 입장을 시작하자, 대열에서 이탈한 학생들이 가방 위치로가 줄 섰다. 각자 학생증을 꺼내 들고 입장순서를 질서 정연하게 기다렸다. 얼마 전까지만도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방학 전까지는 뒤늦게 도서관에 도착한 학생 중 일부가 줄 서는 수고를 덜려고 꼼수를 썼다. 아는 친구 옆으로 가 줄 서주기로 했다며, 뒷사람에게 구차함을 무릅쓰고 설명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새치기하였다. 이 때문에 시비가 붙기도 하고 때로는 싸움으로 번졌다. 일상생활 줄 서는 곳에서 일어나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심과 공공질서를 무시하는 비양심적 행동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시험을 앞둔 주말과 학생들이 붐비는 날에는 미리 자리 잡아 두려는 치사한 수법도 있었다. 먼저 도서관에 가는 친구에게 학생증을 주어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중 도서관에 들어갈 때는 잠시 외출했다며 거짓말하고 입장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서 원칙대로 아침 일찍부터 줄 서서 기다리다 자리가 없어 입장을 못한 학생들이 불만을 제기하였다. 도서관측이 단편적인 대응으로 외출을 금지하자, 학생들은 몰래 담을 넘나들었다. 도서관측은 다시 월담을 못하도록 담장을 보강하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했다. 결국 학생들 불평을 전해 들은 학부모들이 민원을 제기하여 개선요구에 나섰다. 도서관측은 자리 맡아주기를 금지하는 1인 1좌석제와 새치기엄금은 물론, 줄 서기도 본인 외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남녀혼용으로 면학분위기를 흐트러트린다는 지적에는 남녀열람실을 구분해 분리하였다.
시립도서관은 중고생들이 많이 이용해서 일반시민과 대학생들은 소수였다. 주로 공부에 관심 좀 있는 고등학생들이 애용하였다. 소통과 정보가 교환되는 청소년들의 또래문화중심지였다.
도서관입장객들이 예전과 사뭇 다른 엄숙한 분위기에서 순서대로 입장했다. 문승협이 2층열람실로 들어서자, 장기원과 김달우가 손들고 반겼다. 도서관에서 떠들거나 소음을 일으키는 행위를 철저히 규제해 퇴실조치까지 하였기에, 입장객들이 소곤거리는 잡담마저 감히 엄두 내지 못했다. 예전과 다르게 책장 넘기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문승협은 알은체하고 좌석을 찾아갔다. 운 좋게도 시원한 바람이 관통하는 창가로 다들 선호하는 자리였다. 밝은 빛이 잘 드는 데다 통행이 드문 막다른 위치라 공부에 집중하기 좋았다. 조용히 성문기본영어를 펼쳤다.
문승협이 공부에 집중한 지 한 시간여 흘렀다. 장기원이 연습장귀퉁이를 찢어 쓴 쪽지를 돌렸다. 야외휴게소에서 만나자는 메모였다. 장기원과 김달우가 먼저 와있었고, 문승협 뒤를 이어 김영후와 조운대가 티나콘을 사 와서 하나씩 나눠주었다. 다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성윤이는 안 왔냐?”
“잉, 안보이드라.”
“뭔 일 있대?”
“몰라, 이따 오후에는 오겄제.”
“헤실아, 니는 낼 뭐 하냐?”
“나?”
“잉, 헤실이믄 너제 누구 또 있냐?”
“연설하네, 특별한 일은 없어, 왜?”
“그라믄, 달우랑 나랑 영산포에 놀러 가자.”
“야, 엊그제 캠핑 다녀왔는데 또 놀러 가냐?”
“아따 같이 가자, 가믄 이쁜 여학생 소개해 주께야?”
“여학생? 무슨 여학생?”
“가믄 알어, 갈래 안 갈래?”
“미쳤냐, 내가 거길 왜가?”
“그래, 우린 미쳤다, 미쳤은께 간다.”
“하하, 그런 뜻은 아니고, 나는 좀 가기 그래서 그래.”
“아따, 그라믄 으짜까?”
“왜, 둘이 다녀오면 되잖아?”
“3대3 미팅인께 그라제.”
“미팅이라니, 무슨?”
“그런 거 있단께, 안 갈라믄 묻덜 말어.”
“그럼 운대랑 영후도 있잖아.”
“아따 그것이 뭐시냐, 너를 콕 찍어서 델고 오란께 그라제.”
“나를? 나를 알아? 누군데?”
“잉, 거시기 뭐시냐, 그 캠핑서 만난 나주영산여상 가시나들이어.”
“뭐라고? 하하하, 언제 또 서로 연락했대?”
“어제 연락했다, 왜, 꼽냐?”
“근데, 게네들 나주에 사는 거 아냐?”
“나주랑 영산포랑은 거그서 거그여.”
“내가 웬만하면 가겠는데, 이번엔 못 가겠어, 미안하다 기원아.”
문승협은 거절을 잘못해 고민하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얼마 전 관계를 정리한 채정이에게 예의가 아닌 데다, 홍지아와도 입장을 정해야 하는 마당에 미팅은 아니었다. 친구부탁을 거부한 마음이 불편했다.
장기원이 대안으로 김영후에게 함께 갈 의향을 물었다. 김영후가 대타는 싫다고 하였다. 문승협을 콕 찍어서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이 장애가 되었다. 절망스러워하는 장기원눈빛이 자연스레 마지막 남은 조운대에게 향하였다. 조운대가 캠핑서 만났던 박선영도 나오는지 물었다. 장기원이 그때 여학생 셋이 나온다면서, 조운대에게 다가가 팔짱 끼며 같이 가자고 졸랐다. 조운대가 알듯 모를듯한 미소로 가겠다고 답하자, 장기원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문승협도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며칠 뒤, 문승협과 친구들이 시립도서관매점에서 다시 만났다. 김영후와 명성윤이 미팅후기를 물었다. 장기원이 성과를 열심히 설명했다. 조운대는 웃고만 있고, 김달우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란께, 기원이 파트너는 김은혜고, 달우는 이정선이고, 운대는 박선영?”
“잉, 파트너는 다 맘에 든 대로 됐어.”
“그래서, 으짜기로 했는디?”
“나는 김은혜하고 계속 만나기로 했어.”
“달우는?”
“나는 끝냈어.”
“으째서야?”
“알고 본께는 우리보다 한 살 더 묵었드라, 2학년이어 2학년.”
“뭔 말이데? 그라믄, 누나여?”
“잉.”
“뭔 나이를 속인대?”
“긍께 말이어, 나 참 어이가 없어갖고.”
“이유가 뭔디?”
“으짜다본께 그렇게 됐다드라.”
“하하, 웃긴다잉. 근디, 운대는 으째 웃고만 있냐?”
“아따 뭐 있겄냐, 그렇게 그냥저냥 알고 지내는 것이제, 별거 없어야.”
김달우는 나이를 속였다는 실망감에 마음을 닫아버려 어긋난 관계로 끝났다. 장기원과 조운대는 계속 만나거나 연락하기로 하였다. 또래들이 이성교제에 민감했다.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소문도 많았다.
문승협과 친구들은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열람실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문승협이 점심을 먹은 식곤증으로 졸음과 사투를 벌였다. 때마침 김부일이 찾아와 휴게실에 가자고 하여 잠도 깰 겸해서 따라나섰다. 채영이가 문승협을 반갑게 맞았다. 무언가 하고픈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승협아, 오랜만이다잉.”
“그래, 영이야 잘 있었어?”
“잉, 너는 잘 있었냐?”
“응, 난 그냥저냥 그랬어.”
“근디, 뭔 얼굴이 그렇게 타부렀대?”
“아, 캠핑 가서 좀 탔어.”
“어디로 갔는디?”
“완도 명사십리.”
“아따 니는 세월 좋다잉, 바다로 캠핑도 가고.”
“응? 부일이 넌 무슨 일 있었어?”
“나야 뭔 일 있겄냐, 우리 처제가 홍역을 치렀제.”
“정이가?”
“잉, 여름감기는 개도 안 걸린 단디, 너 땜시 몸살감기로 며칠을 끙끙 알아 누웠단께.”
“아야 김부일, 너는 뭔 남자가 그렇게 입이 싸냐?”
채영이가 짜증스럽게 김부일말을 가로막았다. 이내 차분하게 동생 채정이 이야기를 꺼냈다. 문승협은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인지 집중했다.
채정이는 문승협과 마지막 만남 이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생각에 잠긴 멍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는지 물어도 별일 아니라고 했다. 먹은 것 없이 잠도 잘 못 자서 급기야 몸살감기에 걸렸다. 이틀을 알아 누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거듭 캐묻자, 눈물을 흘리며 문승협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채정이는 문승협을 몇 번밖에 만나지 않았으나, 이별한 것 같은 슬픔에 빠졌다. 마음을 정리하는 중에 슬럼프가 겹쳤다. 몸이 아픈 동안 문승협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만남을 이어가지 못하는 원인을 자기 이기심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지금은 좀 어때?”
“시방은 괜찮해, 다시 씩씩해졌어.”
“정이한테 전해주라, 그건 정이 책임이 아니라고.”
“잉,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여중2학년 때쯤 오는, 로맨스 열병 같은 그런 거여.”
“잘나지도 않은 내가 마음고생 시켜서 어떡하냐, 정말 미안하다.”
“시방은 이겨내고 다시 지 활동에 전념한께, 나중에 만나믄 동생멩키로 잘 대해주라.”
“그거야 당연하지.”
“정이가 너한테 말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했는디.”
“알았어, 비밀로 할게.”
“아야 승협아, 너 으째서 정이를 거부하냐?”
“부일아, 거부 그런 거 아냐, 내가 뭐라고 정이를 거부하냐. 정이는 귀엽고 예쁘고 당돌하고 성격도 다 좋아. 근데 걱정이 앞서고, 괜히 나 때문에 피해줄 거 같은, 나도 솔직히 뭣 때문인지 잘 모르겠어.”
“너 뭔 기피증 같은 그런 거 있냐?”
“기피증? 모르겠다. 미안, 나 먼저 올라갈게.”
문승협은 도망치듯 열람실로 갔다. 머릿속에 채정이 생각과 기피증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심란한 마음에 공부가 집중되지 않아 책가방을 챙겼다. 평소 같으면 일일이 친구들을 찾아가 먼저 간다고 말했겠지만 멍하니 열람실을 나섰다. 도서관을 나가다 만난 국민학교동창 천영기가 다짜고짜 자기 집에 가서 만화 보자고 했다. 귀신에 홀린 마냥 따라갔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여읜 천영기는 지적장애가 있는 누나와 스무 살이나 많은 형이 있었다. 늦둥이 막내라 오냐오냐 키워서 즉흥적으로 돌출행동을 자주 하였다. 친구들이 천씨성에 천방지축인 성격을 빗대어 본뜻과 다르게 천방지축마골피라고 불렀다. 머리가 비상하면서 느릿느릿 움직여 천재와 굼벵이를 합성한 천벵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천영기가 집으로 가는 길에 여학생과 맞닥뜨렸다. 머리를 양갈래로 허리춤까지 길게 딴 여학생이 천영기에게 생글생글 인사했다. 문승협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금 떨어져 기다렸다.
여학생과 몇 마디 나눈 천영기가 잘 가라는 인사를 끝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가시나가 그 유명한 목화여중3학년 정난희여.”
“그래?”
“너 국민학교 때 학생회기획부장 부용경 알제?”
“응, 부용경이 서울로 전학 갔잖아.”
“잉, 그 부용경이 동생 부현지의 친구기도 해.”
“그렇구나.”
“무용부에 얼굴까정 예뻐갖고, 머시마들한테 인기가 많애, 그래서 콧대가 허벌나게 높아 부러. 잘 나가는 시끼들이 사귀자고 한디도, 눈길은커녕 콧방귀도 안 뀐단다야. 정난희의 도도함을 꺾을라고, 도전하는 시끼들도 생겼을 정도 란께. 정난희네 집하고 학교 앞에는 머시마시끼들이 항시 문전성시여.”
천영기가 정난희유명세를 설명하였으나, 문승협은 정난희라는 여학생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예쁘다기보단 눈이 동그랗게 크다는 생각 외에는 관심 없었다. 오히려 천영기집이 인쇄소여서 더 인상 깊었다.
천영기의 형이 물려받아 어머니와 함께 경영하는 인쇄소규모가 꽤 컸다. 정부홍보물을 인쇄하는 윤전기가 열심히 돌았다. 경제기획원이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한 인쇄물이었다. 정부가 한일외상회담 제2차 회의에서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기간 중 총 60억 달러 공공차관을 공식요청했다는 내용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시작해 1981년까지 4차례 5개년 계획이 이어졌다. 1977년 제4차에서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으로 명칭이 수정되었다. 이번 제5차에서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다시 변경했다. 1∙2차 경제개발계획 때는 경제전체자원을 배분하려는 자원계획 등 포괄적 성격을 띠었다. 3차 때부터 경제규모확대와 복잡성증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정책계획으로 전환을 시도하였다. 5차 계획에서 정책계획실효를 높이기 위한 유도였다. 각 계획에서 제시하였던 목표와 실적을 보면 총량적 성장면에서 제4차 계획기간을 제외하고 모두 초과 달성했지만, 주택보급률 등 사회개발지표면에서 계획이 한 번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장기적인 건전한 경제발전을 설정하고 추구하는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시장경제를 표방한 개발도상국들 사이에서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천영기가 엄마와 형에게 문승협을 인사시키고 2층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방바닥에 빌려온 만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천영기가 책가방을 아무렇게 던져놓고 보다만 만화를 집었다. 문승협은 방 안을 둘러보다 책장에서 새로 나온 ‘고우영의 삼국지’ 만화를 꺼냈다. 만화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독파하였다. 저녁 먹으라는 천영기엄마말에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어갔다. 인사하고 서둘러 나왔다. 한사코 밥 먹고 가라 하였으나, 첫 방문부터 계획에 없는 저녁식사는 실례라는 문승협의 고정관념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집을 향해 걸어가는데, 여학생이 웃는 얼굴로 문승협을 빤히 쳐다보며 지나갔다. 낯에 천영기가 말했던 정난희라는 여학생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