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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Nov 21. 2024

단테의 별 – 2권 1부 9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9)

2학기 개학과 동시에 우열반이 폐지되고 심화반이 생겼다. 문교부의 허용으로 우열반이 편성된 1학기 동안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다.

문일고1학년은 방과 후 수업시간에 우열평반교실로 옮겨 다니면서 도난분실, 기물파손, 낙서 등이 문제였다. 아예 우열반으로 편성된 2학년은 학생들끼리 ‘똘반, 돌반’이라고 놀려 싸움이 빈번했다. 늘어난 수업에 과중하다는 선생들의 불만과 불어난 공납금으로 집안사정이 어려운 학부모들의 반발도 있었다.

학교 밖에서는 학교가 앞장서 과외교육을 한다는 비판이 거셌다. 면학분위기를 해친다거나 학교평균성적을 까먹는다고 차별하며, 학교가 명문교로 발돋움하는데 열등반아이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긴다고 힐난하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존감을 잃은 학생들이었다. 선생들이 사고나 말썽을 도맡아 저지르는 열등반아이들을 예쁘게 볼리 만무했다. 아이들은 학교가 자신들을 투명인간처럼 바라보는 걸 바로 눈치챘고, 이 가운데 일부는 점차 엇길로 빠졌다. 때마침 현직 담임선생이 투고한 글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3월에 학생들을 만났을 때 불과 4,5명이던 말썽꾼은 1학기가 끝났을 때 거의 세배 가깝게 늘어 있었다.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갈라놓은 학교시스템은 소수우등생을 만들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문제아를 낳았다. 그 녀석들과 마주하였을 때 느꼈던 열패감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학교에서 교사들의 문제의식과 고민이 사라져 버렸다. 무엇이 그런 변화를 불러왔을까? 예전 같으면 교사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의가 벌어져도 시원찮은 의제들이 아무 갈등 없이 지나가 버린다. 그런데도 그런 익숙지 않은 변화를 교사들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샐러리맨이 아닌 교육노동자로 자신을 이해하고자 했던 교사들이 이상이 아닌 성적에 따른 차별이라는 현실을 마주하였다. 그 변화를 용인하면 할수록 학교와 교사의 위상과 역할은 낮아지고 약화하며, 공교육에 대한 신뢰도 무너진다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결국 논란을 빚은 우열반이 설자리를 잃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그냥 내버려 둘 학교가 아니었다. 우열반대안으로 심화반이 탄생했다. 문일고와 대부분 학교는 심화반을 전교 100등까지 50명씩 2개 반으로 편성하였으나, 일부 학교는 전교등수에 따라 40명씩 2개 반 또는 3개 반으로 구성했다. 운영은 학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문일고는 학습실을 따로 정해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하여 별도의 수업과 자습을 하였다. 1교시 먼저등교와 1교시 늦게 하교시키는 학교도 있었다.

심화반으로 변경됐어도 학생들의 강박은 여전했다. 학교가 행한 억압과 차별에 학생들이 느끼는 불평등과 열등감에 무력감, 우열반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역시 피해는 학생들 몫이었다.

대다수 학생들이 우열반을 없애는데 찬동하였지만, 김부일은 시큰둥했다. 전교 500등에서 150등으로 일취월장한 성적에도 심화반에 들지 못해서였다. 어찌 됐든 학생들은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갔다.


서울특별시 지하철공사가 설립되고, 부마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공안당국이 ‘학림사건’에서 명칭을 따 부산판 학림사건이라는 ‘부림사건’을 발표했다. 부산지역 사상최대 공안사건이라며 사회과학독서모임을 국가전복과 사회주의건설을 모의한 국가변란조직으로 몰았다. 독서모임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회원인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19명을 영장 없이 체포하여 불법 감금과 고문해 기소하였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조지프슘페터의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와 같은 금서를 읽으며 의식화활동을 벌였다는 이유에서였다. 3월 출범한 전두환신군부독재정권이 부당한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집권초기부터 민주화운동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부림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안보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적나라한 실상을 드러낸 대표적 사례였다. ‘대전의 한울회사건, 서울대학로의 학림사건, 충남금산의 아람회사건’ 외에도 전국 각 지역별로 이뤄진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은 모두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용공으로 몰았다. 이른바 국보시대가 개막됨으로써 공안사건이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국가보안법·집시법·노동관계법·선거법위반사건 등이 주대상으로 대공·선거·노동·학원·단체 관련사건을 포괄한다는 서슬 퍼런 공안검사전성시대가 도래했다. 공공안녕을 뜻하는 공안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는 엘리트검사와 정치검찰이라는 평가가 공존하였다.

미국최신예전투기 F-16이 한국배치 분 48대 중 제1진 8대가 주한미군공군기지에 실전배치되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민항기 보잉767이 첫 비행에 성공했다. 프랑스파리에서 리옹 간 고속철도 테제베TGV가 개통됐다.

문공부문화재위는 전남신안해저에서 6월 23일부터 두 달간 청자 등 유물 2,564점을 인양했다고 밝혔다. 철도청이 승차권 컴퓨터발매를 개시하였다. 서독바덴바덴 제84회 IOC총회에서 1988년 하계올림픽개최지가 서울특별시로 결정되었다.


88서울올림픽이 확정된 순간, 문승협뿐 아니라 전 국민이 환호하며 열광했었다. 일주일이 지나가는데도 그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88 까트라 빌드라 아나빌드 쎄울 꼬레아’라는 선언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아그들아, 느그 장희빈 봤냐?”

“모지라, 장희빈 안보는 사람도 있냐?”

“장희빈 보랴 제1공화국 보랴, 공부할 틈이 없다야.”

“심화반에도 못 들어가는 꼴통이 공부는 뭔 공부?”

“염병하네, 니가 뭔 상관이어, 심화반이믄 다여?”

“심화반은 수업이 늦게 파해서 장희빈도 못 봐.”

“그나저나 이미숙이 허벌나게 이쁘더라잉.”

사람들이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공안사건에 무감각하였으나, MBC드라마 여인열전시리즈 제1작 장희빈은 첫 방영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심화반학생들은 밤 11시를 넘겨 귀가했기에 장희빈을 볼 수 없었다. 야간자습만 마치고 일찍 귀가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였다. 매일 반복되는 학교생활에 지쳐 88서울올림픽개최도 금세 관심이 식었다.

문승협이 심화반을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도착했다. 파김치처럼 축 늘어져 초인종을 누르려는 찰나, 집 안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아버지 문경준의 호통에 이어 엄마 이항리의 단말마 비명이었다. 순간 몸이 굳어지더니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부모싸움에 문승협몸이 먼저 반응하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부부싸움이었음에도 늘있는 일상 같았다.


문승협은 어느 가정이든 부부싸움을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부모의 폭력적 갈등표출이 공포스러웠다. 다툼이 끝날 때까지 지옥 같은 시간이 싫었다.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길 간절히 빌었다. 싸움 이후 땅이 꺼질듯한 무거운 집안분위기가 숨 막혔다. 부모감정이 풀릴 때까지 눈치 봐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다. 부부싸움으로 아이들 마음은 아직 굳어있는데, 부모는 화해하고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서로 대할 때는 안도감보다도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더욱이 자신의 문제로 부부싸움이 발생하면 또 다른 차원이었다. 몹시 괴로워 죽고 싶은 절망에 빠졌다. 그래서 부모가 싸울 때마다 행여 자기 일로 싸우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쭈삣 섰다.

얼마 전 문윤아가 언니 문현아옷을 물려받는 게 싫어 새 옷타령을 했다. 이항리가 딸내미옷을 산다는 빌미로 돈이야기를 하다 쥐꼬리월급이라고 푸념하였다. 문경준이 자존심 상해 버럭 하면서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문윤아가 자신이 부부싸움원인이었다는 생각에 자책했다. 울며불며 오빠 문승협에게 죽고 싶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그 어떤 위로로도 위안을 주지 못했고, 달랠 방법이 없어 난감하였다.


문승협이 초인종을 누르자, 집안이 조용해지고 대문이 열렸다. 다녀왔다는 인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척하며 방으로 갔다. 문현아와 문윤아가 오빠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눈가에 눈물 흔적이 남아있었다. 무슨 일인지 오빠가 묻기를 기다렸다. 문승협이 교복단추를 풀다 말고 동생들에게 앉으라 했다.


문경준은 화투사건으로 부부싸움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항리는 문경준에게 여자가 있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던 차에 문경준이 외박을 했다. 이항리가 누적된 감정이 폭발해 퇴근한 문경준에게 따졌다. 문경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흥분해서 얼결에 욕설을 하였다. 문경준이 불손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 손찌검을 했다. 이에 이항리가 대들며 격렬히 저항하였다. 이성을 잃은 몸싸움으로 뒤엉켰다. 폭력의 횟수와 강도가 높아졌다.


동생들이 부모싸움정황을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문승협은 침통한 표정으로 들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동생들을 달래어 방으로 보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마음에 상처 입었을 동생들을 걱정했다. 오죽하면 오빠방으로 피신해 왔을까. 부모의 싸운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욕설과 폭행까지 목격하였으니 참담했을 것이다. 더 큰 두려움은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추측이었다. 싸운 이유를 떠나 엄마가 불쌍하였다. 아빠가 미웠다.

문승협은 씻고 엄마를 기다렸다. 오늘만큼은 하소연을 기꺼이 들어줄 생각이었으나 오지 않았다.

아침밥상 옆에 도시락 두 개를 준비해 줬을 뿐 아침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새벽 1시쯤 귀가하여 상황을 모르는 작은 고모 문희경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무거운 걸음으로 등교했다.

몹시 우울해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였다. 하루종일 엉망진창이었다.

공부만으로도 지쳐있는 몸을 이끌고 하교했다. 평안과 안식을 주는 행복이 있어야 할 집에 공포와 두려움이 도사렸다. 스트레스받은 중압감에 초인종을 누르려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집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을 겨우 달래 초인종을 눌렀다.

아침까지 문승협을 피하였던 이항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까지 나가 문을 열었다. 의도적으로 얼굴을 돌려 문승협시선을 회피했다. 문승협은 할 말이 있어서 직접 나온 거라 짐작하였다. 문승협관심을 집중시키려는 이항리의도는 적중했다. 문승협이 이항리얼굴에 난 멍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으로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그동안 네 아빠가 사소한 일에도 야단치고 화풀이를 자주 했어, 내가 참다 참다 대꾸했더니 손찌검하더라. 어제도 버럭 하며 욕을 해서 대들었는데, 무자비하게 때렸어.”

“…….”

이항리가 말을 마치고 어깨와 팔에 난 상처도 보여줬다. 문승협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싸움을 여러 번 봐왔지만 이처럼 처참하진 않았다. 상습화되어 가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경악했다. 이전까지는 부모각자 입장과 태도에 잘잘못을 생각하였으나 폭력 앞에서는 다 부질없게 느꼈다.

문승협이 엄마손을 잡고 방으로 갔다. 지근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엄마를 위로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항리하소연은 보통 2시간 정도 걸렸지만, 일찍 잠든 남편 문경준을 의식해서인지 30분 정도로 짧게 끝났다.

문승협은 잠자리에 누워 부모와 떨어져 살던 때를 생각하였다. 혼자서 부모를 그리워하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자식이 부모를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건데, 안 보고 싶을 정도라면 얼마나 큰 상처가 있는 걸까? 그런데 이렇게 무섭고 두렵다면, 존재자체가 공포라면, 과연 누구 잘못일까?’

문승협이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커갈수록 더 두려웠다. 부부싸움 때마다 거론되는 부모이혼이 혹시 현실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묘한 습관이 생겼다.

언제부턴가 오늘은 별일 없기를 빌고 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노심초사하였다. 갈등 있는 부모표정만으로도 힘들어서 눈치를 살폈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신발을 확인하고, 아버지목소리가 들리는지 귀 기울였다. 아버지가 없으면 안심하였고, 그러다 있으면 불안감이 엄습했다. 집에 있을 때도 아버지의 헛기침이나 말소리에 경기하듯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외출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언제 들어오는지 조마조마하였다. 반대로 외출에서 들어오는 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발소리, 말소리, 숨소리만 들어도 덜컥 겁이 나고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반면 아버지가 없는 공간에서는 평화와 안도, 행복과 안심을 느꼈으니 심적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족 간 불화로 불안정한 가정과 아버지폭력에 노출된 가정의 자식들이 겪는 불안장애였다.


문승협은 갈수록 심각해진 부모싸움으로 우울감에 시달렸다. 며칠이 지나도 심란한 마음이 해소되지 않았다. 달리 방도가 없어 공부나 하자는 생각에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일요일이라 학생들이 많았다. 2층 남자열람실로 올라가다 1층 여자열람실에서 나온 홍지아를 만났다.

“야, 문승협.”

“어, 지아야.”

“가방 갔다 놓고 잠깐 내려와, 밖에서 기다릴게.”

“그래, 알았어.”

문승협이 가방을 자리에 놓고 1층으로 내려가다 화장실서 나오는 장기원과 마주쳤다. 손인사만 하고 곧장 홍지아에게 갔다.

“너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왜, 내 표정이 어때서?”

“밝은 미소가 심벌인 평소의 헤실이 표정이 아닌데? 무슨 일이야?”

“벼 별일 없어.”

“너는 항상 웃는 얼굴이라서, 무표정하면 화났거나 고민 있어 보여.”

“지아야, 넌 왜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아?”

“스 승협아, 화났어? 무 무슨 일이야?”

“아 아니, 아니야. 궁금해서, 난 네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애가 아니거든.”

“내가 너를 어떻게 다 알겠어, 네가 좋은 아이라서 그런 거 아냐, 내가 좋아서 그런 거지.”

“누구를 좋아하려면,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논리상은 맞는 말인데, 실상은 꼭 그렇지 않아. 현실은 호감에서 시작돼 좋아하고, 알아가다가 더 좋아지면 사랑하게 되는 거고, 싫어지면 이별하고.”

“그럼, 넌 지금 어느 단계야?”

“무슨 뜻이야?”

“네가 생각하는 나 말이야.”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고백하라는 거야? 궁금하긴 해?”

“난 나를 잘 모르겠어, 나도 날 잘 모르는데, 넌 나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

“너 왜 이렇게 횡설수설이야, 진짜 무슨 일 있구나?”

홍지아는 처음 보는 문승협의 심각한 태도와 그늘진 표정에서 일신상에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였다. 그런 문승협을 어찌 대해야 할지 당황했다.

문승협은 문득 최선경이 떠올랐다.

‘최선경. 그래,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준 아이’

문승협은 상처투성인 아픈 아이여서, 누군가를 마음에 담기 힘들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홍지아에게 위로받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지아야, 우리 그냥 친구 하자, 그게 좋겠어.”

“응? 그 그래, 우린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친구 해.”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냥 친구 하자고.”

“알았다니까, 그렇게 하자고, 누가 뭐래?”

홍지아는 말하지 않은 문승협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신과의 관계를 고민하였다는 사실만 수용했다. 체념도 포기도 아닌 방기를 선택하였다. 관계에 대한 어떤 책임과 의무 따위는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지아야, 미안해.”

“아냐, 미안할 거 없어. 당장에 구속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할 친구가 더 좋을지도 몰라.”

홍지아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먹먹한 마음으로 열람실로 향했다. 문승협은 축 처진 홍지아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관계를 명확히 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답답하였다.

아까부터 둘을 쭉 지켜보던 장기원이 소리 없이 문승협에게 다가가 바나나우유를 건넸다.

“뭐 하냐?”

“어, 그냥.”

“그 가시나랑 뭔 사이냐?”

“누구?”

“방금 전에 둘이 야그하드만.”

“아, 친구야 친구.”

“그라믄, 니 깔치냐?”

“깔치? 깔치가 뭔데?”

“애인, 여자친구 말이어.”

“여자친구면 여자친구지, 깔치가 뭐냐?”

“연설하네 새삼스럽게. 사귄 지는 얼마나 됐는디?”

“사귀는 거 아니야, 그냥 친구야.”

“아야, 남녀가 친구가 어딨다냐. 둘이 만나믄 사귀는 거고, 사귀믄 애인이제.”

“연설은 네가 한다, 니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잉.”

“진짜 그냥 친구라고야. 사귀는 남자는 없대? 그 가시나, 제원여고 다니는 동양어망 손녀 홍지아제?”

“야, 넌 나주영산여상 다니는 얘 있잖아. 깔치도 있는 놈이 웬 관심이냐, 신경 끊어라잉.”

“김은혜 말이냐? 그 가시나는 폴쎄 쫑냈어.”

장기원은 지난여름방학 명사심리캠핑 때 알게 된 영산포에 사는 김은혜와 주말을 이용해 몇 번 만났다. 한 살 연상에다 기차나 버스를 타야 하는 장거리교제로 시들해졌다. 캠핑 이후 미팅으로 가까워진 조운대와 박선영도 펜팔로만 연락했다.

문승협은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장기원을 못마땅해하였다. 홍지아에게 관심을 보여 차단했다. 김은혜와 관계를 정리하였다며 느끼한 미소를 지어 왠지 꺼림칙했다.

장기원이 남은 바나나우유를 마저 마시고 윙크를 하더니 열람실 쪽으로 갔다. 문승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쁜 여학생이 장기원과 교차하여 걸어왔다.

“어? 정이야.”

“오빠,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

“네, 오빠도 잘 지내죠?”

“응, 한 가지만 빼고는.”

“왜요, 뭔데요?”

“채정이 보고 싶은 거 빼고는 다 괜찮아.”

“피, 그런 말로 헷갈리게 하지 마.”

“하하하, 서울 다니기 힘들지 않아?”

“힘들긴 한데, 얼마 전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생겨서 좀 편해졌어요.”

“다른 일은 없고?”

“네, 다 좋아요. 오빠, 친구들이 기다려서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문승협은 밝아 보이는 채정이 모습에 안도하였다. 친구들과 씩씩하게 어울려 보기 좋았다. 채정이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자, 문승협도 손짓하며 미소 지었다.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열람실로 들어갔다. 성문기본영어숙어집을 펼쳤으나 집중되지 않았다. 불안한 가정생활에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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