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21)
월말고사를 치르는 동안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남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우범곤순경이 M1카빈소총 2정, 실탄 180발, 수류탄 7개를 챙겨 들었다. 평화롭던 한밤중 시골마을에 때아닌 총성이 여러 발 울려 퍼졌다. 궁류면사무소소재지와 토곡리, 압곡리, 운계리, 평촌리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을 향해 총기난사와 수류탄을 투척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다. 이미 20여 명을 살해한 우순경의 잔인함은 평촌리 상갓집에서 극에 달했다. 부의금 3000원을 내고 천연덕스럽게 조문하였다. 조문객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특유의 주사를 부렸다. 상주가족에게 왜 행패냐며 야단맞았다. 이에 격분해 카빈소총을 난사하여 상주일가족 12명을 사살했다. 빠져나오다 아기울음소리를 듣고 되돌아가 갓난아기를 쏘았다. 뛰쳐나가 불 켜진 집마다 총을 들이대 11명을 더 죽였다. 새벽에 평소 알고 지내던 주민가족을 깨운 뒤 같이 죽자며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일가족 4명과 함께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1982년 4월 26일 밤 9시 40분부터 다음날 27일 새벽 5시 35분까지 7시간 55분 동안 벌어졌다. 사상자는 총 90여 명으로 사망한 주민도 60여 명에 달하는 광기의 살인이었다.
이날의 비극은 어처구니없게도 날파리로부터 시작됐다. 우순경은 1980년 말 해병대특등사수라는 점을 인정받아 경찰관이 되었다. 청와대경호를 담당하는 101경비단에 뽑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갔지만, 술만 마셨다 하면 이성이 마비돼 사고 치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부적격자로 찍혀 1981년 12월 경남의령궁류지서로 좌천당했다. 가뜩이나 가난한 집안에 열등감이 많았던 우순경의 폭력성향은 더욱 짙어졌다. 이듬해 3월 눈이 맞은 마을아가씨와 살림을 차렸다. 여자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쓴 불안한 동거였다. 사건발생당일낮 야간근무를 위해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낮잠을 잤다. 하필 날파리 한 마리가 우순경가슴팍에서 귀찮게 하였다. 동거녀가 날파리를 쫓아내려고 손을 휘젓다 우순경가슴을 쳤다. 잠이 달아난 우순경은 얹혀사는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불같이 화낸 뒤 집을 나가 술을 들이켰다. 저녁 무렵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 동거녀를 폭행했다. 마을사람들이 뜯어말리며 나무랐다. 우순경은 이성을 잃고 예비군무기고에서 무기를 챙겨 우체국으로 가 3명을 사살하고 통신망을 차단하였다. 이어서 무차별 살인을 시작했다. 범행 당시 그가 쏜 실탄은 총 135발이었다.
동료경찰들이 무차별 살인소식을 듣고 우순경을 막기는커녕, 반대방향으로 출동하는 등 도피행각을 벌여 화를 키웠다. 우순경의 직속상관 궁류지서장은 술접대를 받느라 자리를 비우고, 사건발생 한 시간쯤 뒤 보고받고도 현장에 없어 다행스러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많은 국민들이 죽어나갈 동안 의령경찰서지휘부는 자기들 목숨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의령경찰서장은 사건현장출동대신 모처로 가버렸다고 알려졌다. 자정쯤 도착한 전투경찰들도 진압을 주저하며 마을입구에 진을 쳤다. 피격을 우려해 어두컴컴한 시골에 숨어있어 피해가 커졌다. 모두가 직무유기였다. 새벽쯤 엄청난 사태로 깨달은 경남경찰청이 상부에 보고하는 한편, 인근 마산과 진주에 타격대를 편성하고 관내경찰서에 비상령을 발동했다. 군부대에도 상황을 전파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만약 우순경이 자폭으로 상황을 끝내지 않았다면 공수부대까지 동원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사건은 공권력의 상징이자 주민안전에 최우선 책임이 있는 대한민국경찰이 살해범이라 충격이었다. 우순경이 청와대좌천인사여서 서슬 퍼런 전두환신군부정권아래 은폐되었다. 단시간 최대 살인사건임에도 공권력에 의한 범행을 덮으려고 철저히 보도통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알려지자, 전두환정권은 전국적으로 폭발한 여론으로 내각사퇴압력에 직면하였다. 민심을 달래려고 빠르게 후속조치를 취했다. 궁류지서장을 파면·구속기소하고 관계자들을 직위해제하였다. 피해자들에게 위로금과 장례비를 지급하고 세금감면, 자녀학비면제 등 혜택을 줬다. 그러나 백서와 위령비를 만들지 않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수 없었다. 추모제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쟁· 태풍 같은 천재지변과 비행기사고 등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참사였다.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 사이 60여 명이 살해되어 최단 시간에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다. 총기가 허용된 해외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악의 총기난사사건이었다. 우순경사건 이후 경찰관임용조건이 강화됐다. 종전 중졸에서 고졸이상으로 학력제한이 높아지는 한편, 인적성검사와 전과여부를 조회하여 부적합자를 탈락시켰다
부산지검이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발생 보름 만에 14명을 구속했다. 미국인 피해자는 없었으나 문화원 내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던 대학생이 질식해 숨졌다. 지나친 반미감정으로 무고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운동권비판여론이 커졌다. 미국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외면하고 전두환정권에 동조했기 때문이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2년 전 발생하였던 광주미국문화원방화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6.25전쟁 후 대한민국에서 반미정서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거의 최초사건이었다. 조선일보가 ‘누구를 위한 방화인가’라는 사설을 통하여 해당 사건을 ‘민족적 수치’로 규정했다. 중앙일보도 ‘반공과 친미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이다’라고 맹비난하였다. 심지어 구경꾼들이 현장검증하는 학생들을 향해 ‘저놈들 죽여라, 죽일 놈들’이라며 온갖 욕설을 쏟아냈다. 운동권대학생들의 반미목적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게다가 시대가 시대인지라 방화사건주축이 여학생들이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관련학생들은 ‘부산미국문화원방화는 영웅적 행위도 좌경불순세력의 무모한 반역행위도 아니다. 5공정권이 주도한 거짓 역사를 지탱하는 부역의 대열에서 이탈하고자 당대 젊은이들의 움직임 중 하나다. 미국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군부독재정권을 지원하고 특수종속적 한미관계를 지속하려는 미국은 진정한 우방이 아니다.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과 신군부의 공모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문승협은 벼락치기공부에도 불구하고 월말고사를 힘겹게 치렀다. 시험이 끝나는 날, 윙스멤버들이 공연후속정리를 위해 모였다. 티켓판매대금을 확인하고 공연수익을 고아원과 가정형편이 어려운 문일고권투부원에게 기부하는 날짜를 정하였다. 공연기념사진을 펼쳐놓고 개인별 추가 인화할 사진을 고르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강동우가 지나가는 말로 멤버 재구성과 교습비용부담 등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서로 자기 공이 컸다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급기야 팸플릿구상과 찬조협찬, 무대 설치와 철수 등 갖가지 일들을 옥신각신했다. 이민상이 뜬금없이 공연 중 노래하다 눈물 흘린 문승협을 힐난하였다. 장홍기도 덩달아 5.18이야기는 또 왜 했냐며 핀잔했다.
“참았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리드싱어가 노래하다 목메서 못 부르믄 쓰냐, 방송사고여 방송사고.”
“방송이었으믄, 5.18 이야기 땜시 공안경찰이나 중앙정보부에 잡혀갔을 것이다.”
“인자 중앙정보부가 안전기획부로 바뀌었어. 안기부에서 뭔 연락 없디?”
“아야, 공연하다보믄 그럴 수도 있제. 우리가 무슨 방송에 나갔냐, 별 걸 다 트집이다잉.”
“어찌 됐든 노래가 끊긴 건 내 실수야, 사과할게.”
“야야 그만하자, 이러다 또 싸우겄다. 거그까지만 하고, 다음공연이나 상의하자.”
한동안 가라앉은 멤버 간 갈등이 공연성과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문승협이 편들어주는 우상호말을 듣고 사과하자, 리더 강동우가 지나간 일은 덮어두자고 하였다. 멤버들은 첫 공연에서 있었던 아쉬움들을 그렇게 털어냈다. 여름과 가을에 이어 겨울 송별공연까지, 공연 방향과 장소 등을 대략 논의했다. 2주 정도 합주연습을 쉬는 동안 각자 다음 공연곡을 선정해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문승협은 음악학원을 나서면서 공연 중 실수를 지적한 멤버들 말에 신경 쓰였다. 마뜩잖을 월말고사결과에 걱정되었다. 그룹사운드를 계속할지 고민스러웠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초저녁이라 시내 곳곳에 걸린 연등이 하나 둘 불을 밝혔다. 축제분위기인 세상과는 달리 우울하였다. 모레 정난희를 만나는 일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UN해양법회의에서 영해 12해리 경제수역 200해리를 규정한 ‘국제해양법조약’을 채택했다. 부처님 오신 날은 경축법회로 동네가 들썩였다. 집 근처 학암사와 해봉사에서 불경소리가 하루 종일 울렸다. 저녁뉴스에 서울종로에서 진행된 연등행렬이 방영되었다. 다음날도 절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문승협이 나름 멋을 내 잘 차려입었다. 학수고대하던 정난희를 만나러 독일제과점으로 향하였다. 거리에는 아직 철거하지 못한 불 꺼진 연등이 군데군데 걸려있었다. 제과점에 들어서는 순간 살짝 당황했다. 빠르게 모여드는 학생들 시선에 쑥스러웠다. 고개를 푹 숙이고 구석진 자리를 찾았다. 앉을 때까지 학생들 눈동자가 계속 따라왔다. 그룹사운드공연 이후 등하굣길과 길거리를 지나갈 때 힐끔거리는 학생들이 늘긴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동시다발로 쳐다보거나 직접 찾아와서 대놓고 확인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몹시 난감하고 생소한 일이었다. 두 시가 되어도 정난희는 오지 않았다. 학생들 주목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15분쯤 지나서야 정난희가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는 정난희에게 손을 들자, 학생들 시선이 정난희에게 몰렸다. 정난희가 적잖이 당황해 고개 숙이고 쏜살같이 테이블로 와 앉았다.
“잘 있었어?”
“응. 오빠는?”
“나도 잘 있었어.”
“오늘따라 사람들이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지?”
“하하, 눈부신 너의 미모 때문이 아닐까?”
“아니야, 시선의 느낌이 다른 때와 달라.”
“신경 쓰지 말자. 뭐 먹을까?”
“아무거나 알아서 시켜. 시험은 잘 봤어?”
“응? 응. 이거 새로 나온 빵인가 봐, 이거 시킬까?”
“오빠, 그거 알아? 내가 오빠 만나는 거, 공부도 잘하기 때문이야.”
“알았어, 잘하면 되잖아.”
문승협은 얼버무리며 종업원을 불러 주문했다. 시험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는 예상에 심란하였다. 그래서 정난희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오빠, 얼렁뚱땅 넘기지 마, 시험 잘 본거 맞아?”
“그 그래, 잘 쳤어.”
“자꾸 내 눈을 피하는 게 수상한데?”
“내 내가? 아 아냐.”
“오빠는 감정이 얼굴에 다 나타나,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어. 그게 귀여워서 만났지만, 나를 속이는 건 용서할 수 없어, 알겠어?”
“속이는 거 없어, 정말이야.”
문승협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모면하려 했지만, 어색한 연기에 감정을 숨기지 못하였다. 때마침 종업원이 빵을 가져와 자연스레 화제가 바뀌었다.
“새로 나온 거래, 자 먹어봐.”
“오빠도 먹어.”
“응, 큰 소라같이 생겼다.”
“그러니까 소라 빵이지. 달달 하네.”
“하하, 많이 먹어.”
“아냐, 살쪄서 안돼. 오빠, 그룹사운드 계속해야 해?”
“왜, 그만했으면 좋겠어?”
“응, 지금도 저 애들이 자꾸 쳐다보는 게, 다 오빠 때문인 거 같아.”
“에이 설마.”
“내 느낌이 맞아, 내 촉을 못 믿어?”
“그런가? 사실은 나도 고민 중이야.”
“참, 그때 포옹한 까무잡잡하고 예쁜 여자는 누구야?”
“언제?”
“공연 끝나고 무대에서 꼬옥 끌어안던 여자말이야.”
“아, 나 5학년 때 할아버지광산에 근무했던 비서였어, 이자연이라고 지금은 가수야.”
“아주 으스러지게도 껴안더라?”
“아니야, 반갑다면서 그냥 안아준 거야.”
“뭔 소리야, 내가 다 지켜봤는데. 그리고, 언제 결혼했길래 장모님까지 있어?”
“하하, 친구 엄마야. 홍지아라고, 전에 석빙고에서 걔 고모랑 같이 만났었잖아.”
“그 동양어망 손녀? 어떻게 처신하길래, 그런 자리에서 우리 사위 우리 사위 그럴까?”
“어렸을 적부터 봐와서 허물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다른 뜻 없어.”
“어디 그뿐이야? 차여선 인가도 그렇고, 채정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차여선은 국민학교동창이고, 채정이는 내 친구 김부일의 여자친구 채영이 동생이야.”
“모델이라서 그런지 엄청 예쁘더라?”
“내 친구 여자친구의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내가 오빠속마음을 어떻게 알아? 그리고, 오빠한테 시집간다는 그 애기들은 또 뭐야?”
“국민학교동창 박진숙동생인데, 농담삼아 한말이야.”
“뭐가 농담이야, 걔들은 다 진심이던데.”
“이제 중2고 국민학생이야, 걔들이 뭘 알고 그러겠어.”
“국민학생이고 중2면 여자 아니야? 무슨 남자가 여기저기 흘리고 다녀?”
“내가 무슨, 나 그런 적 없어.”
정난희는 보이스카우트단복을 입고 교통봉사하면서 여학생들에게 관심받은 일까지 소환했다. 언제 적 일인지 문승협조차 기억에 없는 이야기였다. 정난희가 인기 있는 남자친구는 싫다며, 질투를 섞어 문승협을 단단히 단속하였다. 무엇보다 유명세로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이 싫다고 했다. 문승협은 정난희의도를 정확히 분간하기 어려웠다.
“난희야, 우리 무슨 사이야? 사귀는 거야?”
“…….”
“알고 싶어, 대답해 줘.”
“나도 모르겠어, 어찌해야 할지.”
“그럼, 오늘부터 1일 할까?”
“…….”
“왜 대답 안 해?”
“아직 모르겠다니까?”
“집에서 너 초대하래.”
“왜? 나를 알아?”
“지난번에 우리 둘이 지나가다가 작은 고모한테 들켰잖아. 그때 작은 고모가 집에다 말했는데, 아빠가 그 이야기 듣고는 집에 한번 초대하래. 올 거야?”
“언제?”
“언제가 좋을지는 네가 결정해.”
“난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 됐는데?”
“그렇다면, 네가 올지 말지 정하고, 우리 집에 오면 사귀는 거로 하자.”
“안 가면?”
“그럼 아는 오빠와 동생사이로 지내는 거지, 그것도 부담스럽다면 할 수 없고.”
“알았어, 생각해 볼게. 근데, 나한테 집에 오라고 사정해야 하는 거 아냐?”
“사정하면, 올 거야?”
“그 그건 아니지만, 사귀자는 성의를 보여줘야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문승협은 얼마 전 천영기와 이담에게 들었던 정난희에 대한 비평을 의식하였으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정난희를 품었다. 자기 결정에 나름 용기를 낸 선언이었다. 선뜻 답하지 않는 정난희를 종잡을 수 없었다.
문승협은 여자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천영기강요로 마지못해 소개받았지만, 정난희를 몇 번 만나면서 알듯 모를듯한 독특하고 낯선 언행에 자신도 모르게 끌렸다. 막무가내로 배려가 없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주도적인 강한 개성으로 보였다. 단속을 넘어선 구속과 조종하려는 말들마저 자신과 다른 생소함에 자극받아 마음을 빼앗겼다.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씌어 정난희의 단점이 보이지 않았다.
정난희는 무용을 해오면서 무용하는 여자에게 끼치는 남자친구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무용 선생과 선배들을 통하여 교육받아왔다. 부모에게까지 철저히 단속받는 상황이라 남자친구를 사귈 의향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듣고 배워온 통속적인 남자들과 문승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자신의 성격 그대로 꾸밈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했음에도 늘 존중과 배려로 대해주는 문승협이 자꾸 떠올랐다. 누가 봐도 지나칠정도의 투정과 짜증까지 다 받아주는 문승협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문승협을 만나면서 난생처음 자신의 남자친구이상형을 따져봤다. 그 이상형과 문승협이 많이 비슷하였다.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나눴다. 정난희가 일어나자고 할 때까지 3시간가량 제과점에 앉아있었다. 제과점에서 나올 때는 부산스러운 주위시선도 적응되어 있었다.
“오빠, 바빠?”
“아니, 특별한 일 없어.”
“그럼 날씨도 좋은데 좀 걸을까?”
“나는 좋아, 너는 시간 괜찮아?”
“응, 오늘은 7시까지만 집에 들어가면 돼.”
문승협은 산책하자는 뜻밖의 제안에 약간 들떴다. 주위를 의식하는 정난희를 배려해 서너 걸음 뒤떨어져 걸었다. 정난희가 자기 집과 떨어진 북교국민학교샛길로 앞장섰다. 인적 없는 길에서 주위를 살피더니 문승협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재빨리 오른편으로 다가오며 싱글거리는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내 옆으로 오니까 좋아?”
“응?”
“오빠얼굴에 쓰였네, 나 지금 기분 좋아요라고.”
“응, 같이 나란히 걸으니까 좋지.”
“호호, 이럴 땐 꼭 애기 같아.”
정난희가 유달산방향으로 이끌었다. 가파른 계단에서 문승협팔을 잡고 올라갔다. 문승협은 손을 잡은 것도 아닌데 맥박이 빨리 뛰기 시작하였다. 떨림이 전달될까 봐 팔에 힘을 줬으나 몸까지 경직되었다. 정난희가 이상한 느낌에 힐끗 쳐다보았다. 문승협은 시선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체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정난희걸음에 맞추려 신경 썼다. 정난희가 계단을 다 올라서 문승협팔을 놓았다. 11월 개원을 목표로 한창 공사 중인 조각공원 쪽으로 향하였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문승협손을 슬며시 잡았다. 문승협은 조금 전보다 심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도 어색함이 넘쳤다. 오래전 비슷한 기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최선경과 서수연선생에게 느꼈던 이상야릇한 감정이었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표정관리할수록 왼손이 뻣뻣해졌다. 정난희가 문승협의 순진한 행동에 피식 웃었다. 막 놀려주려는 순간 앞에서 사람이 오자 얼른 손을 놓았다. 둘은 나쁜 짓하다 들킨 마냥 뻘쭘하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금 떨어져 걸었다. 문승협은 잠깐 손을 잡았지만 엄청 긴 시간 같았다. 머릿속이 하애서 서먹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생각조차 못했다. 둘은 깨끗이 단장된 유달산 일주도로를 따라 말없이 걸었다. 땅거미가 내려오려 채비할 즈음 노적봉 쪽 어귀를 돌아 내려갔다. 문승협이 몇 번 바래다줬던 정난희집 근처에 가까워졌다. 정난희가 문승협에게 다가가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문승협은 두근거리는 여운을 안고 버스 타러 큰길 쪽으로 걸었다. 가는 길 중간쯤에 모여있던 남학생들이 문승협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아야, 저시끼 문일고 윙스 싱어 문승협 아니냐?”
“맞네,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사실인갑다야.”
“오메, 닭 쫓던 개신세 되부렀네잉.”
“허허, 인자 니도 헛물 그만 켜고, 다시는 여그 와서 청승 떨지 말어.”
문승협이 모른 척 지나치며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 정난희집 근처에서 서성이는 남학생들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기분 좋았다. 한편으로는 집초대에 정난희가 어떻게 응할지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문승협은 어린이날오전에 윙스멤버들과 고아원 봉사와 기부 행사를 다녀왔다. 오후에는 공부하는 곳이자 만남의 장소인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화창한 5월 날씨를 즐기지 못하고 정숙한 도서관을 찾는 게 불만스러울 법한데도, 줄 서서 입장순서를 기다리며 공부에 열중인 학생들은 엄숙하였다. 반면 수다삼매경에 빠진 학생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천영기가 입장하는 문승협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능 와라, 뭐 하고 꾸물거리다 인자 오냐?”
“야, 오늘이 어린이날이잖아.”
“어린이날이랑 니랑 뭔 상관인디?”
“막내가 아직 국민학생이라서.”
“아, 그러네, 윤아가 아직 5학년이다잉.”
“응, 어린이날 선물 좀 챙겨주고 왔어.”
“그건 그렇고, 니 그 소문 들었냐?”
“뭔 소문?”
“제원여고7공주들이, 홍지아랑 채정이랑 불러다 놓고 때렸다드라?”
“에이, 말도 안 돼. 걔들이 장난은 좀 쳐도 사람 때릴 애들은 아냐, 그럴 리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디, 니 땜시 때렸단께는 믿음이 확 가던디?”
“하하, 그 소문을 믿는 거 본께, 니도 가끔 염병한다잉.”
“음마, 니 사투리 쓰는 것이 성질났는갑다?”
“야, 너도 차여선이랑 제갈민주랑 다 알잖아, 걔들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냐?”
“아야, 소문이 그러더란 말이어 소문이. 그란디, 이거는 진짜다잉.”
“또 뭔데?”
“장기원이가 홍지아를 꼬실라다 쪽 다 깠다드라.”
문승협은 지난해 시립도서관에서 홍지아와 이야기 나눌 때, 의미심장하게 지켜보던 장기원눈빛이 기억났다.
그날 이후 장기원이 홍지아에게 관심을 가졌다. 문승협에게 소개해달라고 몇 번 졸랐으나, 바람기 많다는 이유로 매번 거절당했다. 결국 스스로 홍지아에게 접근하려고 호시탐탐 노렸다.
“진짜?”
“잉, 홍지아를 놓고, 사내새끼 세 명이 한판 붙었단다.”
“뭔 소리야?”
“장기원이랑, 우리 학교 강호석, 홍인고 이칠영. 요 세 놈이 홍지아한테 찝쩍대다가 시비 붙었단께.”
“언제?”
“저번에 느그 윙스공연 끝나고.”
윙스공연날 청화고 강호석이 홍지아주위를 맴도는 장기원을 발견하였다. 행사 후 빠져나가는 장기원을 불러 세워 시비 붙었다. 강호석위세에 눌린 장기원이 홍지아를 단념하겠다고 해서 싸움으로는 번지지 않았다.
문승협은 공연날 홍지아모녀 옆에서 얼쩡거리던 장기원이 떠올랐다. 음흉하게 굴더니 쌤통이라면서도 처음 들어본 강호석이 누군지 궁금했다.
강호석은 부유한 집안에 멀끔하게 생겼지만 태권도유단자로 청화고에서 싸움께나 하였다. 강호석과 홍지아는 아버지끼리 친한 친구사이라 어렸을 적부터 서로 왕래했다. 지난주 홍인고 이칠영이 홍지아집 앞을 서성이다 때마침 방문한 강호석과 마주쳤다. 홍지아이야기로 옥신각신하다 주먹이 오갔다. 홍지아가 싸우는 소리에 뛰쳐나와 싸움을 말려 다행이었으나, 주위에 사람이 몰려 목격자가 많았다. 그 소식이 강호석과 같은 학교인 천영기에게까지 전해졌다.
이칠영은 7년째 유도를 배운 유단자로 싸움에 일가견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을 닮아 친구들이 못생겼다고 놀려도 괘념치 않는 유쾌한 성격이었다.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불의를 지나치지 않아 인기 있는 괴짜였다. 교복∙교련복∙체육복을 맞춰주는 목포에서 제일 큰 학생복집아들이라 남녀학생들에게 꽤 알려졌다. 문승협도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니는 이칠영을 어뜨크롬 아냐?”
“중학교 때 덕일고3학년들하고 싸운 적이 있는데, 그때 박현 선배랑 나를 도와줬었어.”
“뭐? 니가 쌈박질을 해야, 그것도 덕일고3학년들하고? 푸하하하, 지나가는 쥐가 웃겄다.”
“야, 지나가는 개다 개. 아무튼, 그때 만났어.”
“오메오메 세상사람들, 문승협이 쌈질을 다 했다 하요.”
“야 도서관이야, 조용히 좀 해.”
“떽기 이 노무시끼, 어디서 성 앞에서 사기치고 있어.”
“알았다 알았어, 그냥 허벌라게 얻어터졌다, 됐냐?”
“히히, 진즉 그렇게 이실직고했어야제.”
“그나저나, 담이는 언제 와?”
“저그 온다, 호랭이도 지말하믄 온다드만.”
“아야, 나 시방 코롬방에서 온디, 거그서 난희봤다잉.”
“정난희?”
“잉, 거그서 누구 만나드라?”
“누구?”
“모르는 머시마던디?”
“남자라고?”
“잉, 나 나올 때 들어오드만, 어떤 머시마 앞에 가서 앉드라고.”
“아야 승협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어?”
“왜?”
“아따 시끼, 난희가 바람핀 건지 아닌지, 가서 확인해 봐야 할거 아니냐.”
“바람?”
“잉, 바람, 혹시 모르잖애?”
“됐어, 뭐 아는 사람이겠지.”
“이 시끼는 태평이네, 니 그러다 쪼다 된다잉.”
“야, 바람피우는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오가는 코롬방제과점에서 만나겠냐?”
“아니어, 느낌이 쐐한 것이, 가서 확인해 봐야 겄어.”
“왜 니가 난리냐, 승협이도 가만있그만.”
“내가 소개시켜줬은께 내 책임도 있잖애, 안 그냐?”
천영기가 말을 마치자마자 도서관 안으로 뛰어갔다. 잠시 뒤 문승협의 책가방까지 챙겨 왔다. 동의는 필요 없다는 듯 도서관 밖으로 친구들 등을 떠밀었다. 문승협은 아직 사귄다는 말을 듣지 못한 터라 정난희를 만나면 어떤 자격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천영기가 앞장서 뛰듯이 코롬방제과점으로 향했다. 둘을 소개한 책임과 문승협을 위해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였다. 제과점문을 확 열어젖히고 들어가 박력 있게 상대를 제압할지, 차분하게 들어가 조용히 사실관계를 따져 물을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다.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쓰고 곱상하게 생긴 천영기에게 나약콤플렉스가 있었다. 때문에 남자답고 강해 보이려는 허세로 말을 거칠게 하였지만 겁 많은 순둥이 자체였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제과점문을 살며시 열었다. 제과점 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펜스가 쳐진 구석 쪽으로 갔다. 이담과 문승협에게 눈짓으로 가리키면서 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좌석에 정난희와 낯선 남자가 있었다.
정난희가 문승협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 그냥도 큰 눈인데 두 배로 커졌다. 그것도 잠시, 아무렇지 않게 문승협시선을 회피했다. 문승협은 처음 안절부절못하는 정난희눈빛에 가슴 철렁하였으나, 금세 평소 당당한 모습을 되찾은 정난희태도에 오히려 안심되었다. 천영기는 정난희의 뻔뻔함에 열받았다. 미안한 마음으로 문승협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낯선 남자가 정난희의 시선과 표정변화를 보았다. 문승협일행을 훑어보더니 일어나 제과점입구 쪽으로 갔다. 천영기가 그 틈을 이용해 한마디 던졌다.
“아야 정난희, 니 시방 여그서 뭐 하냐?”
“네? 제가 왜요?”
“야, 이 상황이 뭣이어?”
“이 상황이 어때서요?”
“승협이가 여그 와있잖애, 시방 안 보여?”
“영기야 왜 그래, 왜 화를 내고 그래.”
문승협이 천영기를 만류하는 사이, 낯선 남자가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곧이어 남자 세 명이 오더니 문승협일행을 에워싸고 천영기를 노려봤다.
“아야, 느그들 뭣이냐?”
“알아서 뭐 할라고, 느그는 뭔디?”
“우리는 저그 난희애인친구들이다 으짤래?”
“뭔 깝치는 소리여, 난희애인은 여그 앉아있는디.”
“느그 2학년이지, 우린 3학년이어.”
“3학년인께 으짜라고, 선배도 내가 알아야 선배여.”
남자 세 명은 정난희와 앉아있는 낯선 남자의 친구들이었다. 천영기가 위기를 느끼고 일어나 대응하였다. 서로 목소리가 커지면서 제과점 안에 있던 사람들 시선이 순식간에 집중됐다.
“이 새끼가 디질라고 환장했나, 니 따라 나와.”
“저기요, 그 손 놓으세요.”
“니는 또 뭐여?”
“문승협입니다, 선배대접받고 싶으면 그 팔 놓으세요.”
“못 놓겄다.”
“그래? 그럼 나가자.”
문승협은 좋은 말로 조용히 해결하려 했지만, 상대방이 싸울 태세를 버리지 않아 용기 냈다. 껄렁해 보이는 남자가 천영기멱살을 놓고 뒤따랐다. 천영기는 예상치 못한 문승협행동에 어리둥절하였다.
낯선 남자들과 문승협일행이 우르르 몰려가자, 제과점 안은 이런저런 추측과 확신으로 술렁였다. 문승협과 정난희를 알아보는 남녀학생들이 많았다. 정난희는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문승협이 밖으로 나가려고 제과점문을 열다 때마침 들어오는 김부일과 마주쳤다. 반갑게 아는 체하는 김부일에게 미소만 짓고 그냥 지나쳤다. 김부일은 뒤따라가는 남자무리를 보고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문승협은 제과점옆공터로 앞장서 갔다. 낯선 남자들과 문승협일행이 4대 3으로 대치하였다. 껄렁한 남자가 문승협어깨를 툭툭 치면서 선배라는 명목으로 기선제압에 들어갔다.
“2학년 새끼가 싸가지 없이, 어디 선배한테 깝치냐?”
“마지막 경고입니다, 선배대접받고 싶으면, 함부로 욕하거나 반말하지 마세요.”
“허허, 이 쌍노무새끼가 진짜, 니 오늘 디질래?”
“야, 내가 욕하지 말고 반말하지 말랬지?”
“아야 승협아, 뭐 하냐?”
주먹이 오갈 일촉즉발 상황에서 김부일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왔다. 낯선 남자들이 김부일을 알아봤다. 방금 전까지 호기롭던 태도는 사라지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알고 왔어?”
“제과점에 영이랑 엄마랑 같이 있어서 대충 들었어. 참, 정난희도 있드만.”
“하하, 별일 아니야. 넌 그냥 가라, 내가 알아서 할게.”
“아야 섭하게 뭔 소리냐, 친구 일이 내 일이제. 근디, 이 양반들은 누구까?”
“3학년선배님들이라는데, 진짠지는 모르겠다.”
“허허, 그래? 선배님들이시라고?”
“그 그래, 우리는 영훈고 3학년이어.”
“아따 선배님들, 뭔 일로 이러요?”
“내가 난희랑 만나고 있는디, 저 시끼들이 와갖고 행패부리잖애.”
“허허, 말끝마다 반말이네, 그쪽이 내 선배요?”
“우리가 3학년인께, 서 선배는 선배지.”
“아따 씨발, 계속 말이 짧네잉. 나는 영훈고가 아니라, 문일고 다니는 김부일이요.”
“…….”
“야 부일아,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할게.”
“으째, 넷이서 선배라고, 저 아그들을 어떻게 해 불라고 그라요?”
“아 아니, 야그 좀 할라고, 요. 좋게 말로 해야제, 요.”
“오메, 말로 안 하믄 으짤것인디. 으째, 몸으로 대화할라고? 선배님들, 넷이서 다 덤벼도 승협이한테 안될 것이요, 저시끼 시피보지 마쑈.”
“부일아, 그 정도면 됐어. 그만하고 얼른 영이한테 가봐, 기다리겠다.”
“느그들 조심해라잉, 괜히 선배라고 깝치다가, 후배한테 얻어터져서 쪽까지 말고.”
문승협이 김부일을 만류하며 등 떠밀어 보냈다. 김부일은 마지못해 밀려나면서 엄포를 놨다. 낯선 남자들이 겁먹은 표정이면서도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김부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껄렁한 남자가 한 사람을 망보게 하고 다시 문승협 앞으로 다가섰다. 조금 전 김부일에게 위축됐던 태도에서 돌변해 문승협멱살을 쥐었다.
“아야, 어린 노무 새끼야, 좋게 말할 때 짜그라져있어라잉. 앞으로 정난희 앞에 얼쩡거리지 말고, 알겄냐?”
“김부일이 있을 땐 쫄아서 말도 제대로 못 하더니, 왜, 내가 우습게 보여?”
“아따 이 째깐한 새끼가 입만 살아갖고는 확 진짜, 니 이러다 디진다잉.”
문승협이 잡힌 멱살을 강하게 뿌리치며 싸우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그래, 누가 디진가 보자. 맞짱 뜰래, 아니면 한꺼번에 다 덤빌래?”
“비겁한 시끼들, 쪽 팔리게 쪽수로 덤빌라고?”
문승협이 어떤 방식이든 응할 테니 싸움방식을 선택하라고 했다. 천영기와 이담이 화들짝 놀라면서 문승협 옆으로 섰다. 낯선 남자들이 당당히 맞서는 문승협태도에 움찔하였다. 신체적 위협에 문승협이 겁먹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랐다. 서로 눈치 보다 정난희와 만났던 남자가 만류하며 말로 하자고 했다.
“아야, 니 정난희랑 뭔 사이여?”
“또 반말이네, 반말하지 마라고 했죠.”
“그래, 정난희랑은 뭔 관계요?”
“난희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그게 정확할 겁니다.”
“나는 난희랑 두 번 만났는디, 우리 사귈 것인께 끼어들지 마쑈.”
“그건 내가 난희에게 직접 들을게요.”
“어허, 말이 안 통하네잉.”
“한마디만 할게요, 나는 난희결정에 따를 겁니다, 당신도 그러길 바래요.”
“못하겄다믄 으짤 것인디?”
“그땐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분명히 말하는데, 난희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요.”
문승협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문승협을 강하게 밀쳤다. 문승협이 뒤로 밀리는 반동을 이용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정난희가 다가오며 소리쳤다.
“그만해, 뭐 하는 짓이야.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얼마나 더 날 창피 주려고 그래?”
“야 정난희, 뭔 말을 고따구로 해? 시방 미안해야 할 사람은 니 아니어?”
“영기오빠, 내가 왜 미안해야 해요?”
“승협이가 있잖애, 니가 승협이한테 그러믄 안 되제.”
“오빠,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
“나 난희야, 여길 왜 왔어?”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아 아니야, 괜찮아, 난 괜찮아.”
“아야 승협아, 말은 제대로 해야제?”
“영기야 알았어, 그만해.”
“오빠 정말 실망이야. 제과점에 사람도 많았는데, 어휴, 진짜 짜증 나.”
정난희가 문승협과 천영기를 째려보고 획 돌아서 가버렸다. 낯선 남자들이 어물쩍 공터를 빠져나갔다.
“오메오메, 열불 난 거. 승협아, 이러코롬 보내믄 나중에 으짤라고 그라냐?”
“괜찮아, 난희가 나중에 자초지종 이야기 하겠지.”
“연설하네, 그냥 넘길걸 넘겨라, 이런 문제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단께?”
“난희도 얼마나 난감했겠냐, 아마 많이 당황했을 거야.”
“아따, 이해심도 이해심도 이런 이해심이 다 있으까?”
“아녀, 승협이가 잘했어, 이 상황에서 뭘 어쩌겄냐?”
“음마, 담이 니도 똑같다잉.”
“아니, 만약에 우리 현진이가 저랬으믄, 나는 폴쎄 눈 뒤집어졌어.”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란께.”
“아야, 혹시 모른께, 제과점이나 다시 가보자.”
“인자서 뭐 하게야?”
“염병하네, 그렇게 눈치가 없냐, 가서 확인사살은 해야 할 것 아니냐.”
“뭣을 아?”
“그 노무 시끼들이 아직 그 지랄하고 있는지, 우리 눈으로 봐야제?”
천영기가 미안한 마음에 문승협을 달랬다. 이담도 위로를 건네면서 문승협의 속마음을 읽었다. 코롬방제과에 가서 낯선 남자들과 정난희가 함께 있는지 확인하려고 하였다.
“승협아, 그 아그가 홍인중 쌈짱이던 김부일이냐?”
“싸움짱이었는진 모르겠고, 유도부주장은 했어.”
“둘이 학교에서 친하냐?”
“응, 친해.”
“어떻게 알았는디?”
“유도 배우면서 알았는데,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어서 친해졌어.”
“음마, 니 유도도 배웠냐?”
“응, 조금 배웠어.”
“태권도 실력은 국민학교 때 봐서 안디, 유도까정 배웠는지는 몰랐다야.”
이담이 코롬방제과점에 다다라 혼자 들어가 살펴보겠다며 문승협과 천영기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김부일이가 그렇게 쌈을 잘한다믄서?”
“몰라, 싸우는걸 못 봤어.”
“아까, 김부일이 한 말은 뭔 말이대?”
“뭔 말?”
“아따 거시기, 넷이 덤벼도 니한테 안 된다드만?”
“그런 게 있어, 그냥 공갈 같은 거야.”
“그나저나, 니도 깡이 제법이다잉?”
“나 합기도도 배웠어.”
“워메 무시라, 인자부터 형님으로 모시겄슴돠.”
“하하, 알았어, 이제 기분 풀렸으니까 그만해라.”
이담이 제과점을 나오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난희와 낯선 남자들이 없다는 신호였다. 김부일이 따라 나와 별일 없었는지 물었다. 오늘 일이 제과점 안에 소문났다고 하였다.
“참, 서로 인사해라. 여기는 김부일이고, 여기는 천영기하고 이담.”
“아따 반갑다잉, 천영기여.”
“이담이여.”
“반갑다, 김부일이어. 느그들이 그 빼빼로삼총사제?”
“야, 부끄럽게 그런 말 하지 마.”
“뭣이 부끄러야, 친한 친구 있으믄 좋제.”
“영이는 안에 있어?”
“잉, 엄마랑 같이 있어. 참, 이번 일요일이 내 생일인께, 12시에 여그서 보자.”
“그래 알았어. 영이한테는 인사 못하고 그냥 간다고 전해줘, 창피해서 못 들어가겠다.”
“잉 그라께, 일요일에 보자.”
“너 내일 학교 안 와?”
“당연히 가제.”
“그럼 내일 보잖아, 왜 못 볼 사람처럼 말하냐?”
“아참 그라제잉, 하하하.”
문승협은 김부일과 헤어진 뒤 친구들과 시립도서관으로 갔다. 책상에 앉아서도 한바탕 쓸고 간 폭풍우 탓에 정신이 멍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였으나 정난희생각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낯선 3학년선배를 정난희가 왜 만났는지, 둘은 무슨 관계인지, 꼬리를 무는 궁금증으로 애탔다. 별일 없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정난희를 걱정하고 앞으로 관계를 어찌할지 고민하였다. 생각에 생각이 파생되어 제과점에 들어갈 당시부터 정난희가 나타나 화낸 순간까지 전 과정이 복기되었다. 공터에서 벌어진 실랑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 쥔 상황, 어떤 이유의 분노였는지 곱씹어 보았다. ‘무슨 자격으로 그러느냐, 실망이다, 짜증 난다’며 정난희가 쏟아낸 말들이 떠올랐다. 그나마 순간적 화를 잘 참아 낯선 남자들과 싸우지 않은 건 다행스러웠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영기와 이담에게 집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