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22)
장영자∙이철희부부 금융사기사건이 터져 뉴스에 도배되었다. 외환관리법위반혐의로 구속했다는 대검발표가 이어졌다.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경제범죄 중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금융사기사건이자,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 사기사건으로 세상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문승협이 일요일 11시 55분 즈음 코롬방제과점에 들어섰다. 2층 창가 쪽 긴 테이블에 김부일과 지인들이 앉아 있었다. 채영이가 일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승협아, 여그여.”
“영이야 잘 있었어? 다들 일찍 왔구나?”
“잉, 우리도 금방 왔어.”
“부일아 이거 별거 아니야, 생일 축하해.”
“아따 쓸데없이 뭔 이런 걸 사 오고 난리냐.”
“승협아, 거그 자리 비우고 그 옆에 안거.”
“여기 누가 와?”
“잉, 이따 올 거여.”
문승협은 먼저 와있는 같은 반 김영후 옆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채영이와 김부일, 알고만 지내던 옆반 이달순이 있었다. 곧이어 영훈고그룹사운드 ‘영웅들’ 보컬 유승민이 나타났다. 이달순과 유승민은 김부일의 중학교친구였다. 둘 다 키가 작았지만, 이달순은 헬스를 오래 해 근육질이었다.
“와따, 여그서 윙스싱어를 다 만난다잉?”
“오랜만, 그때 공연 잘했냐? 너희 공연 보고 싶었는데, 뒤풀이하러 가느라 못 봤어.”
“느그 윙스공연만 하겄냐? 느그가 앞에서 잘해 분께, 우리 공연은 김 빠져부렀어.”
“에이, 웬 겸손이야, 너희도 잘하면서.”
“연주는 모르겄지만, 노래는 영웅들보다 윙스가 낫제.”
“야 이달순, 그 말인즉슨 승민이보다 승협이가 노래를 더 잘한다는 말 아니어?”
“허허허, 그렇게 돼 분가?”
“썩을 시끼, 내 평생 저 시끼한테 좋은 소리 들어본 적이 없단께.”
“허허, 농담이여 농담.”
웃고 떠드는 가운데, 채정이가 미모를 뽐내며 등장하였다. 비어있는 문승협옆자리에 앉았다. 조금 뒤 광주체고에 다니는 유도무제한급 국가대표유망주 이정국이 왔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생일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고 준비해 온 선물들을 전달했다. 김부일이 케이크를 자르는 사이, 이정국이 문승협 뒤로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듯 꽉 쥐었다. 친근감의 표시였으나 악력에 눌려 문승협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 아, 야 아프다 아파.”
“허허, 아프냐? 매미야, 잘 있었냐?”
“그래, 거목아 너도 잘 있었냐?”
“잉, 이 엉아는 운동 열심히 하고 잘 있었제.”
“글고 본께, 거목나무랑 매미는 오랜만에 만나겄다잉.”
“반년정도 됐제. 근디, 매미 니 키가 무자게 커부렀다?”
“응, 처음 봤을 때 보다 한 뼘 이상 컸을 거야.”
“긍께 말이여, 인자 쫌 남자 같다.”
“하하, 원래 남자였거든.”
“근디, 저 아그들은 으째 아까부터 여그를 쳐다보까?”
“어디?”
유리창밖 길 건너편에 남학생 대여섯 명이 모여있었다. 계속 문승협일행이 앉은 2층을 바라봤다. 채정이가 창밖을 내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문승협이 채정이 표정을 살피며 무슨 일인지 눈으로 물었다. 채정이가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일 아니라면서 잘라 논 케이크를 집어다 문승협접시에 놓아줬다. 이정국이 자리로 가 꽤 큰 케이크조각을 한입에 넣었다. 다들 익숙하듯 웃었지만 문승협과 채정이는 휘둥그랬다.
“야 거목아, 광주에서 온 거냐?”
“아니, 다음 주 수요일까지 교류전이 있어갖고, 지난주부터 목포에 있었어.”
“어디랑 하는데?”
“홍인고하고, 청화고 유도부.”
“아야, 인자 밥 먹으러 갈 것인께, 케이크 좀 그만 묵어.”
이정국이 김부일의 잔소리에 남은 케이크를 마저 먹었다. 다들 소지품을 챙겨 1층으로 향하였다. 문승협 혼자 소변보러 화장실에 들렀다. 채정이가 문승협을 기다리려 주춤하다 뒤늦게 내려갔다. 문승협이 지퍼를 내리는데 남자 네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한 명씩 문승협의 양쪽 변기를 차지하고, 두 명은 뒤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어이, 문승협.”
“누 누구?”
“누구는 누구여, 우리는 우리제.”
아까 창문으로 봤던 남학생들이었다. 문승협이 이상한 낌새에 황급히 소변을 마무리하고 돌아섰다. 화장실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갑자기 화장실문이 열리며 이정국이 남학생 두 명을 멱살잡이하여 들어왔다. 채정이가 화장실밖에서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승협 오빠, 괜찮아?”
“응, 괜찮아. 정국아, 무슨 일이야?”
“인자 차근차근 알아봐야 제. 이 시끼들이 화장실밖에서 문을 막고 있드라.”
“정국아, 일단 놔줘라. 야, 너희들 뭐야?”
“…….”
남학생들이 120킬로 거구인 이정국에게 압도되어 온순해지다 못해 겁먹은 표정이었다. 스스로 벽 쪽에 나란히 서더니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 그 좋던 기세는 어디 갔어, 너희들 뭐냐고?”
“이 시끼들 빨리 말 안 하냐, 느그들 뭐여?”
“뭣 좀 물어볼라고 했어라우.”
“뭘? 뭐가 궁금한데, 떼거지로 몰려와서 이러는 거야?”
“…….”
“빨리 말 안 허냐, 우리 바쁘다잉.”
“채정이랑 뭔 사인지, 그걸 물어볼라고라우.”
“뭐? 너희들이 그게 왜 궁금한데?”
“제가 채정이를 좋아한디, 소문에 문승협선배랑 사귄다는 소문도 있고, 또.”
“또, 뭔데?”
“문승협선배가 딴 가시나랑 사귄단 소문도 있어갖고.”
“하하, 참나, 너희들 몇 학년이야?”
“중3이어라우, 죄송하요.”
“허허, 어린 시끼들이 까마득한 선배한테, 확 그냥.”
“내가 채정이랑 사귄다면, 너희들 날 패려고 했냐?”
“그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물어볼라고만 했어라우.”
“아야 얼른 안 내려오고 뭐 하냐, 배고파 죽겄다.”
김부일이 아래층에서 기다리다 올라왔다. 채정이에게 대충 상황을 듣고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여, 어떤 새끼가 그런 거여, 너여?”
“…….”
“똑바로 서 새끼야, 갑빠에 힘줘.”
김부일이 손바닥으로 남학생옆통수를 한 대 때린 뒤 주먹으로 가슴을 때리려 했다. 문승협이 황급히 김부일을 껴안아 말렸다.
“그만해 부일아.”
“내 친구도 친군디, 내 처제 건들믄 다 죽어, 알겄냐?”
“예.”
“대답 똑바로 안 해?”
“네!”
“부일아, 생일인데 기분 망치지 말고 그만해라. 정이야, 부일이랑 먼저 내려가.”
“한 번만 더 걸리믄, 그땐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잉.”
“부일오빠, 언니 오면 어쩌려고 그래, 얼른 내려가자.”
채정이가 김부일을 끌다시피 데려갔다. 문승협은 남학생들에게 채정이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이정국과 아래층으로 내려가 제과점밖으로 나가는데,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웅성웅성하였다.
“오빠, 괜찮아요?”
“응 괜찮아, 많이 놀랬지?”
“조금.”
“어이 처제, 으째 내 걱정은 없으까?”
“이그, 정국이 오빠를 걱정하는 건 사치야 사치.”
“아따 서운하네잉, 나도 처제한테 걱정받고 싶은디.”
“정국 오빠, 제발 처제라고 하지 마, 징그러워.”
“정국아, 너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정이가 1층에 내려오드만, 불안하담서 가보자 드라.”
“정이는 어떻게 알았어?”
“1층에 가는데, 걔들이 화장실 쪽으로 우르르 가길래.”
“걔들을 알아?”
“오래전부터 집 앞에서 기다리곤 했었는데, 요즘은 계속 나를 따라다녔어요.”
“그라믄 오늘 예방주사 제대로 맞았그만?”
“호호, 그런 샘이네, 정국이 오빠 덕이야.”
김부일은 일행을 데리고 예약해 놓은 중화요릿집으로 갔다. 동그란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문승협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니 며칠 전에도 그라드만, 오늘 또 그란다잉.”
“그러게, 요즘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니 요즘 이상해, 자꾸 뭔가 꼬여.”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나는 모르제, 그건 니만 알제. 그때 정난희랑은 으째 그런 거여?”
“좀 심란하다.”
“뭐야, 왜 오빠 둘만 소곤거려?”
“아 아니야, 별거 아니야.”
채정이가 얼핏 정난희이름을 들었다. 궁금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대놓고 물었다.
“승협 오빠, 공연 끝나고 대기실에서 본 여자가 정난희언니 맞지?”
“응? 응, 어떻게 알았어?”
“내 친구 여주하고 현정이가 목화여중 다니잖아, 걔들 1년 선배라서 잘 알더라고.”
“아 그렇구나.”
“오빠랑 사귄단 말이 돌던데, 그 선배랑 사귀는 거야?”
“…….”
“얼굴 예쁘고 무용은 잘하지만, 성격이 별로라던데?”
“그 그래?”
“승협아, 소문도 거시기하고 며칠 전 일도 그렇고, 사귀지 마라야.”
“나는 소문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
“그라믄, 정난희랑 사귈 거여?”
“아 아직 잘 모르겠어, 생각 중이야.”
김부일은 채정이 이야기를 듣고 정난희에 대한 문승협의 의중을 떠봤다. 채정이는 정난희에게 마음 있어 보이는 문승협태도에 표정이 굳어졌다. 비록 들은 이야기를 말했으나 사실에 가까운 자신의 충고에 아랑곳없는 문승협에게 속상하였다. 주문한 음식이 나와도 뾰로통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소스가 반쯤 묻은 탕수육을 하나 집어 앞접시에 가져다 놓았을 뿐 팔보채와 군만두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정이야, 음식 식겄다, 언능 좀 묵어.”
“응, 언니나 많이 먹어.”
“내가 좀 덜어줄게, 식으면 맛없어.”
“오빠, 내가 알아서 먹을게요.”
채영이가 동생 채정이를 걱정스레 살펴보다 음식을 권했다. 음식 먹기에 열중하던 시선들이 채정이에게 모였다. 문승협이 일어나 팔보채를 다른 접시에 떠주었다. 채정이는 음식에는 관심 없이 문승협을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음식을 충분히 주문했는데도 거구에 걸맞게 포식하는 이정국 때문에 빠른 속도로 비워졌다. 문승협이 주식으로 주문한 짜장면을 반쯤 먹었을 즈음, 이정국이 순식간에 짜장면 곱빼기 두 그릇을 먹어 치우고도 뭔가 아쉬워하였다. 손대지 않은 짬뽕을 채정이가 밀어주자, 매운걸 못 먹는다며 애교 섞인 손사래 쳤다. 120킬로 덩치에 안 어울리는 귀여운 엄살은 웃기기에 충분했다. 다들 웃으면서 무거운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이정국은 참다못해 짜장면 곱빼기 하나를 추가로 시켰다. 다들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우는 이정국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김부일은 매번 봐도 놀랍다면서 재미있어하였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식당사장이 더 먹을 수 있다는 이정국에게 군만두를 서비스로 줬다.
식당을 나온 뒤, 김부일은 채영이부모에게 저녁식사를 초대받았다며 채정이와 함께 갔다. 이정국과 유승민은 당구치자는 이달순을 따라갔다. 당구를 못 치는 문승협과 김영후는 각자 집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헤어진 것도 잠시, 김부일이 문승협을 불러 세웠다. 채영이집에 같이 가자고 하였다. 문승협은 불청객이 가는 건 어른들께 실례라며 사양했다. 채영이와 채정이까지 나서 괜찮다는 설득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김부일과 채영이가 문승협의 거절에 채정이 눈치를 살폈다.
“싫다는데 할 수 없지 뭐,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잖아.”
“미 미안해, 마음은 고마운데, 아무래도 내가 가면 좀 불편할 거 같아.”
“거봐, 안 갈거라 했잖아, 언니는 괜한 말해서 마음 설레게 해?”
채정이가 몹시 속상해하며 돌아섰다. 김부일과 채영이도 간다는 말을 남기고 채정이를 뒤쫓아갔다. 거절을 잘 못하는 문승협이지만 단순히 같이 가는 의미 이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선뜻 따라갈 수 없었다. 멀어져 가는 채정이에게 미안하면서도 미련을 남기지 않은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였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과 며칠 전 있었던 채정이와 정난희 일로 마음이 심란했다. 서운해한 채정이가 떠올라 신경 쓰였으나 이미 정리된 관계라 크게 괘념치 않았다. 현재진행형인 정난희사건으로 귀결되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이 어려웠다. 복잡한 머리를 흔들어 보아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어이 문승협씨.”
“앗 깜짝이야, 어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한참 생각에 빠져 걷는데 뜻밖에 홍지아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주위를 보니 홍지아집 근처였다.
“호호호, 뭘 그리 놀라시나. 승협씨,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요?”
“오랜만이다, 잘 있었어?”
“잘 있었으니 이렇게 짠하고 나타나지요. 뭔 고민이여, 냉큼 이 누나한테 야그해 봐.”
“그냥, 이런저런 생각했어. 참, 공연 끝나고 배웅도 제대로 못했다.”
“공연 잘 보고 집에 잘 왔지. 울 엄니가 집에 와서, 할아버지랑 아빠한테 우리 사위 내 사위 하면서 얼마나 자랑하던지, 아빠가 너 한번 보고 싶다고 집에 데려오라 했다니까?”
“하하, 꽃다발도 감사하고, 어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
“완전 네 펜, 심심하면 네가 공연 때 부른 노래 틀어.”
“그래? 음질은 좋지 않지만, 우리 공연 때 녹음한 테이프가 있는데, 그거라도 드려야겠네.”
“그럼 나도 하나 복사해 주라. 언제 올래, 날짜 잡자?”
“하하, 뭘 또 그렇게 서둘러, 준비되면 내가 연락할게.”
“그냥 그 테이프 갖고 와, 우리 집에서 복사하게, 공테이프도 있어.”
“하하하, 그래 알았다 알았어, 시간 내볼게.”
“데이트할 시간도 빠듯할 텐데, 시간이 될라나?”
“그건 또 뭔 소리야?”
“너 목화여고 1년 후배랑 사귄다더라? 정난희인가?”
“누가 그래?”
“놀라는 거 보니 맞네, 전에 석빙고에서 봤던 걔지?”
“맞긴 맞는데, 아니야.”
“뭔 소리야, 뭐가 맞고 뭐가 아니야?”
“아, 걔는 맞는데, 아직 사귀기로 한 건 아니라고.”
“아야, 느그 뭐 하냐?”
문승협과 홍지아가 대화하는 중에 껄렁해 보이는 남자 세 명이 다가왔다. 문승협은 솥뚜껑 보고 놀란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경계하였다. 홍지아가 살짝 당황했다.
“야, 너 또 왜 왔어?”
“뭐여, 느그 둘이 사귀냐?”
“뭔 소리야?”
“방금 사귄다고 뭐라 하고, 팔짱도 끼드만?”
셋 중에 멀끔한 남자가 성난 얼굴로 따져 물었다. 얼핏 들은 사귄다는 말과 테이프를 가져오라 조르며 홍지아가 문승협팔을 잡은 것을 문제 삼았다. 홍지아를 놓고 장기원뿐 아니라 이칠영과도 다툰 강호석이었다.
“야, 네가 뭔데 상관이야?”
“윙스싱어께서 노래 좀 하드만, 여그 저그 여자나 꼬시고, 완전 쌩 날라리그만?”
“야, 누가 누굴 꼬신다고 그래?”
“방금 저 새끼가 니한테 사귄다 아니다 그랬잖애?”
“사귀긴 뭘 사귀어, 국민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야.”
“친군디 팔짱도 끼냐? 그라고, 남녀가 친구가 어딨어?”
“팔짱도 아니지만, 친구끼리는 팔짱도 못 끼냐?”
“그라믄, 나랑도 팔짱 낄래?”
“내가 미쳤냐, 그냥 아는 너랑은 다르지.”
“아야 홍지아, 니는 좀 빠져있어라잉, 내가 오늘 저 양아치새끼 손 좀 봐야겄다.”
“너 승협이 건들면, 그땐 내가 너 가만 안 둬.”
“허허, 뭣아, 니가 가만 안 두믄 으짤것인디?”
“지아야, 애 누구야?”
“아빠친구아들인데,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는 애야.”
“아, 그 청화고 다닌다는 그 애야?”
“그래, 내가 강호석이다, 으짤래?”
“강호석, 넌 홍지아마음을 얻기는 틀렸다, 무엇보다도 친구인 내가 용납 못하겠다.”
“니가 뭔디, 이 호로새끼가 디질라고 말을 함부로 하네, 니 나한테 한번 죽어볼래?”
“지아야, 먼저 들어가, 다음에 연락할게.”
“잉, 지아 니는 빠지고, 문승협 니는 나랑 야그 좀 하자.”
강호석이 흥분해서 문승협에게 도발하자, 옆에 있던 두 남자가 강호석팔을 끌어당기더니 숙덕였다.
“호석아, 저 새끼 김부일하고 이정국이랑 친구여. 아까 코롬방제과점 앞에서 같이 있는 거 내가 봤어.”
“우리 학교 유도부랑 교류전 하러 온, 그 광주체고 무제한급 유도대표?”
“잉, 어깨동무하는 거 본께, 얼 척 없는 사이 같드라.”
“맞어, 김부일생일이라고, 땅꼬마 이달순도 있었어.”
세 남자가 이야기하는 동안, 홍지아가 문승협에게 미안해하며 빨리 집에 가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홍지아말을 듣지 않았다. 여차하면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였다. 며칠 전과 오늘 일까지 더해져 참았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강호석이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 난감해했다.
“야 문승협, 니 이정국이 알어?”
“여기서 정국이 이름이 왜 나와?”
“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잉, 다음에 만나믄 뼈도 못 추릴 줄 알어.”
“야 이 시끼들아, 왜 내빼는 거야, 할 말 있으면 해.”
“승협아 너까지 왜 그래, 너답지 않게.”
강호석일당이 멀어져 가고, 홍지아가 문승협을 달랬다. 문승협은 홍지아팔에 붙잡혀 분을 삭였다. 등을 토닥여주는 홍지아손길에 점차 안정을 찾았다.
“지아야, 나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점점 화가 나고 못 참겠어”
“승협아,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다 그래, 너만 그러는 거 아니야.”
“미 미안해, 내가 잠시 흥분했다.”
“아니야, 나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그래도 참아 넘겼어야 했는데.”
“지극히 인간적이었어, 잘했어. 평소 너답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이해해.”
“나다운 게 뭐야?”
“굳이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거. 난 네가 너무 이성적인 게 싫지만, 어쩌면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일지도 몰라.”
“고맙다 지아야, 그리고 미안해.”
“어허, 친구끼리 그런 말하믄 섭하제. 이 누나는 항상 니 편인께, 명심하더라고잉?”
문승협은 홍지아말을 위로 삼아 다시 집으로 향하였다. 왜 이런 일이 계속 생기는지 문제아가 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여자가 공통점이면서도 정난희는 또 다 끼어있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집에 들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모가 싸워 집안분위기 마저 싸늘했다. 정난희생각까지 하루가 고난이었다.
코롬방사건과 정난희와 사귄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여학생들을 피해 다니던 제원여중고등하굣길뿐 아니라, 어디 가든 문승협을 바라보는 시선이 쌀쌀하였다. 문승협은 자격지심에 힘든 나날을 보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