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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별 – 2권 1부 24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24)

by 태양을 품은 별

월요일부터 시작된 월말고사를 밤잠을 설쳐가며 치렀다. 시험이 끝나고 김영후와 답을 맞혀봤다. 암기과목은 한두 개 틀려 흡족한 반면, 국영수는 생각보다 많이 틀려서 마음이 심란하였다. 성적표 받는 날이 두려웠다. 대부분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면 결과와 상관없이 해방감을 누렸으나, 문승협은 오히려 스트레스받았다. 땅이 꺼진 마냥 어지러웠으며 표정 또한 어두웠다. 시험이 끝났으니 주말에 놀자는 친구들 제안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토요일은 정난희를 집에 초대한 날이라 불가피했지만, 살아 숨 쉬는 세상이 지옥 같았다. 정난희와 만남만이 유일한 어둠 속 한줄기 빛이었다.

정난희를 데리러 석빙고제과점으로 갔다. 지난주 부모눈치를 살피다 염치불고하고 정난희의 집방문소식을 알렸었다. 흔쾌히 초대하라 할 때와 다른 반응이어서 걱정됐다. 다만 여자친구를 사귄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제과점문을 열고 들어갈 때 맥박이 가늘게 뛰었다. 정난희가 해태꿈나라종합선물세트와 과일바구니를 준비하였다. 문승협이 챙겨 들고 나왔다. 긴장한 정난희모습을 보았다.

“괜찮아?”

“엄청 떨려, 그냥 가지 말까?”

문승협은 떨린다는 정난희말이 믿기지 않았다. 강심장인 데다 평소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정난희였다. 정난희도 이런 상황에서는 응석 부리는 여자라는 사실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힘들면 그렇게 해.”

“집에서 기다리실 텐데?”

“하는 수 없잖아, 적당히 둘러대야지 뭐.”

“오빠는 내가 안 가도 괜찮아?”

“네 마음이 중요하지, 난 괜찮아, 너 좋을 대로 해.”

“피, 서운한데?”

“왜?”

“용기 내라고 격려해 줘도 아쉬울 판인데, 내 마음대로 하라니까 그렇지.”

“네가 어려워하니까 그런 거야, 네가 힘내주면 고맙지.”

“너무 수동적인데? 나 안 갈까 부다. 나 안 가면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

“호호호, 놀라긴 뭘 또 그렇게 놀라?”

“난희야, 정 곤란하면, 너 편한 대로 해.”

“지금 가고 있잖아.”

정난희가 문승협을 당황스럽게 들었다 놓았다 했다. 문승협은 집 앞에 도착하여 정난희에게 잠시 여유를 줬다. 마음의 준비가 됐다는 정난희사인에 초인종을 눌렀다. 문윤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걸음에 달려 나와 대문을 열었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정난희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과자종합선물세트를 건네받고 앞장서 들어갔다. 외출한 작은 고모 문희경을 뺀 모든 가족이 거실에 나와 정난희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네, 어서 와요.”

“엄마, 종합선물세트야, 저기 과일바구니도 있어.”

“그냥 오지, 학생이 뭔 돈 있다고 선물까지 사 왔어요?”

“처음 뵙는데 빈 손으로 오기 그래서요, 약소합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요.”

“아버님 어머님 앉으세요, 인사드릴게요.”

“아 아녜요, 절은 무슨.”

“정난희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문경준과 이항리는 마다하면서도 좌정하였다. 절을 받으면서 흐뭇해했다. 문승협이 옆에 있는 동생들을 소개하자 서로 인사하였다. 정난희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 몸 둘 바 몰라했다. 이항리가 편하게 앉으라 하고 부엌으로 갔다. 문현아를 불러 음료를 내줬다. 정난희가 음료를 따라 문경준에게 먼저 권하였다.

“아버님, 음료 드세요.”

“허허, 그래, 난희양도 마셔요.”

“네. 자, 동생들도 받아요.”

“감사합니다.”

“호호, 감사는 내가 해야죠. 윤아는 국민학교 5학년이고, 현아는 중2라고 하던데?”

“얘는 유선국민학교 다니고요, 저는 인혜여중 다녀요.”

정난희가 문승협의 동생들을 친근히 대했다. 동생들도 관찰자에서 벗어나 대답과 질문을 이어갔다.

“동생들이 오빠와 다르게 너무 예뻐요.”

“어, 우리 오빠 잘생겼는데?”

“호호, 난 오빠가 잘생겼는지 모르겠던데?”

“언니 무용한다면서요, 언제부터 했어요?”

“유치원 때부터 하긴 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허허, 난희양은 어디 정씨예요?”

“아버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문경준이 정난희의 본관과 가족관계 등 가정조사에 들어갔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이항리가 문현아를 불러 수저를 놓으라고 하였다. 정난희가 상차림을 돕겠다고 따라가면서 대화가 중단되었다.

문승협은 뜻밖의 정난희처세에 놀랐다. 삭삭하게 잘 처신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해 내심 만족스러웠다.

잠시 후 문현아가 문승협을 불렀다. 둘이서 음식이 차려진 교자상을 거실로 옮겼다. 교자상에 불고기, 갈치구이, 두부조림, 김치와 나물 등 밑반찬 몇 가지가 놓였고, 양쪽에 김과 간장이 있었다. 모두 밥상에 둘러앉아 각자 밥과 소고기뭇국을 차지했다. 정난희가 안경을 꺼내 썼다. 문경준이 멈칫 기다렸다. 정난희가 돌아 앉자, 모두 문경준을 따라 숟가락을 들었다. 다들 식사를 하는데 이항리는 정난희를 살폈다. 숟가락에 간장을 찍어 입에 넣는 정난희를 보고서야 국을 떠먹었다. 미소 지으며 정난희에게 음식이 입에 맞는지 물었다.

“간이 잘 맛나 모르겠다?”

“어머님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호호, 다행이네, 많이 먹어요.”

“네, 김치도 시원하니 맛있어요.”

“거기 갈치도 먹고, 본인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먹어요.”

“네, 어머니 말씀 놓으세요.”

“호호, 그래요. 근데, 안경은 언제부터 썼나?”

“작년에요, 시력은 나쁘지 않은데, 난시가 좀 있어서 책 볼 때만 써요.”

“무용할 때 불편하지는 않고?”

“무용할 때는 안 쓰는데, 이번에 콘택트렌즈가 새로 나온대서 한번 써보려고요.”

정난희는 묻는 말에 성의 있게 답하였다. 젓가락질이 서툰 문윤아가 갈치구이를 먹으려 할 때는 가시를 발라주었다. 말이 없는 편인 문현아가 정난희에게 갈치가시를 버리도록 빈 그릇을 가져다줬다. 문경준은 조금 전 듣지 못한 몇 가지를 물었을 뿐 식사 중이라 거의 말이 없었다. 이항리는 몰래 정난희를 관찰하며 가정교육의 기본이라는 식사예절을 지켜보았다. 문승협은 이항리의 시선을 보고 짐작했다. 흠결이 잡히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정난희를 응원하였다.

문승협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문재환에게 혼나가며 엄히 식사예절을 교육받았다. 숟가락만 사용해 밥을 먹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쥐지 않아야 한다. 반찬을 뒤적이며 양념을 털면 안 된다. 밥을 파먹지 않고 위에서부터 차례로 먹는다. 국을 떠먹고 음식을 씹을 때 소리 내지 않아야 하며, 보이지 않게 씹어 삼킨 뒤 말해야 했다. 밥그릇과 국그릇 들고 먹거나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서도 안된다. 어른과 식사속도를 맞춰야 하며, 식사가 끝난 후 수저를 오른쪽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숭늉은 두 손으로 들고 마셔야 하는 등, 식사 때마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받듯 십계명처럼 교육받았었다.

식사가 끝나고, 문경준은 별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항리와 문현아가 쟁반에 빈 그릇을 담아 부엌으로 가져갔다. 문승협과 정난희는 교자상을 맞들어 부엌으로 옮겼다. 정난희가 이항리의 만류에도 문현아와 함께 설거지를 도왔다. 문승협과 문윤아는 거실에서 TV를 봤다. 문윤아가 부엌 쪽을 자꾸 힐끔거리는 문승협을 째려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입을 삐쭉 내밀었다.

“왜, 오빠한테 여자친구 생기니까 샘나냐?”

“내가 왜? 오빠가 바보 같아서 그런다.”

“내가?”

“응,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계속 쳐다보잖아.”

“하하, 걱정되니까 그렇지.”

“걱정할 것도 많네, 여기가 무슨 도살장이야?”

“윤아야, 난희 예쁘지?”

“으이그, 팔불출이 따로 없네, 그게 동생한테 물어볼 소리야?”

“하하, 그냥 네 생각을 물어본 거야.”

“예쁘긴 한데, 저 언니 말이야, 아니다.”

“왜 말하다 말아, 뭔데?”

“저 언니 좀 쎄 보여, 오빠가 꼼짝 못 할 거 같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해?”

“오빠는 몰라? 못 느껴? 아주 눈이 멀었구만.”

문승협과 문윤아가 속삭이는 중에 정난희가 씻은 과일을 가져왔다. 과일을 깎아 접시에 예쁘게 놓았다. 안방을 노크하고 들어가 문경준에게 주고 나왔다. 깎아 논 사과를 포크로 찍어 문승협과 문윤아에게 하나씩 건넸다. 거실로 온 이항리와 문현아에게도 주었다. 이항리가 흡족해하며 정난희에게 먹으라고 권하였다. 사과를 들고 정난희행동을 지켜보던 문승협이 헤벌쭉했다. 문윤아가 사과를 먹다 어이없어하며 문승협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이항리가 왜 오빠를 치냐고 가볍게 혼냈다. 문윤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정난희를 쳐다보았다. 정난희도 귀엽다는 듯 문윤아를 바라봤다. 문현아는 괜찮은지 오빠표정을 살폈다. 이항리가 과일을 먹으며 정난희의 엄마에 대해 물었다. 정난희는 가사와 무용을 뒷바라지하느라 바쁘다고 답하였다. 과일을 다 먹어갈 즈음, 문승협이 은근슬쩍 눈치를 살폈다.

“난희야, 내방 구경할래?”

“오빠, 응큼하다?”

“야 문윤아, 뭔 소리야?”

“둘이 오빠방에 가서 뭐 할라고?”

“뭘 뭐 해, 그냥 구경하는 거지.”

“그럼 문 열어놔.”

“호호, 걱정되면 막내아가씨도 같이 가요.”

“그래요, 내가 가서 감시해야겠다.”

“오빠, 나도 갈래.”

문윤아가 의심을 이유로 문승협방에 같이 가려했다. 오빠의 이성교제에 질투와 호기심이었다. 문현아는 어울리려고 덩달아 나섰다. 문승협은 멋쩍어하며 엄마동의를 기다렸다. 이항리가 고개를 끄떡여 승낙하였다. 남은 과일을 챙겨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딸들에게 방해하지 마라고 했다. 문승협이 정난희와 동생들을 인솔하여 자기 방문을 열었다.

“언니.”

“응?”

“아니, 현아언니 말고 난희언니.”

“왜요, 막내아가씨.”

“에이 막내아가씨가 뭐예요, 그냥 이름 불러요, 말도 놓고요.”

“호호,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윤아야, 왜 불렀어?”

“아, 오빠방에서 이상한 냄새나지 않아요?”

“이상한 냄새?”

“문윤아, 너 왜 그러냐,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언니 온다고 청소해서 그런지, 오늘은 별로 안 나네.”

“야, 창피하게 그럴 거야? 너 자꾸 그럴 거면 나가.”

“동생한테 왜 그래요?”

“평소에는 안 그러던 얘가 오늘따라 이상한 소리 하네.”

“내 남동생 훈희방에서도 냄새나던데, 사춘기 지나는 남자에게서 다 나나 봐.”

정난희가 등뒤로 숨은 문윤아를 편들었다. 문윤아는 문승협에게 혀를 날름하며 거보라는 듯 눈을 흘겼다. 정난희가 책상으로 가 훑어보았다. 눈에 띈 아기천사도자기인형 한 쌍을 만져보았다. 문승협은 순간 출처를 물을까 봐 걱정하였다. 다행히 귀엽다며 지나쳐 마음 놓았다. 홍지아가 중학교수학여행선물로 준 아기천사도자기인형 한 쌍은 문승협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웃고 있었다. 정난희가 책장 앞으로 갔다. 표지가 금박글씨로 된 60권짜리 세계문학전집에 시선이 멈췄다.

“오빠, 이거 이거 다 읽었어?”

“아니, 다 읽지 못했어.”

“그럼 어떤 걸 읽었어?”

문승협이 오래전에 읽은 것으로 ‘톨스토이의 부활,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5대 희극, 로미오와 줄리엣,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등을 짚었다. 작년에 읽은 것으로는 ‘펄벅의 대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빅토르위고의 장발장, 알렉상드르뒤마의 몽테크르스토백작’을 가리켰다.

“최근에는?”

“최근에는 바빠서 읽지 못했어.”

“그럼, 절반 정도 읽은 건가?”

“응, 앞으로 계속 읽어야지.”

“다음에 읽을 때 있잖아, 이렇게 읽어봐. 테스, 폭풍의 언덕, 여자의 일생, 데미안, 작은 아씨들, 주홍글씨, 노틀담의 꼽추, 제인에어, 닥터지바고. 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꼭 읽고, 알았지?”

“응, 알았어.”

문승협은 작은 고모 문희경이 사놓은 세계문학전집 덕에 또래에 비해 독서량이 적지 않았으나, 정난희는 훨씬 많았다. 정난희가 마치 선생이 제자에게 지도하듯 했다. 문승협은 정난희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문승협과 정난희가 책들을 살펴보는 사이, 문현아가 자기 방에서 지난달 초 창간한 경향신문사‘레이디경향’을 가져왔다. 문윤아까지 여자 셋이 둘러앉아 의견을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보았다. 문승협은 세 명에게서 잠시 소외되었다. 동생들을 허물없이 대하는 정난희가 달리 보였다. 혹시나 하고 가슴 졸였던 도발적 발언이 없어 안심하였다. 평소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행동도 없었다. 동생들도 거부감이 없어 보여 기분 좋았다. 더구나 정난희를 관찰하던 부모표정으로 보아 별문제가 없었다. 부모를 대하는 태도나 식사예절마저 흠잡을 데 없는 정난희가 빛나 보였다. 설사 가식이더라도 정난희가 무척 예뻐 보였다. 친구들에게 들은 정난희평판으로 집초대를 고민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자신 또한 친구들처럼 생각한 점은 나쁜 선입관이라며 반성하였다. 미안한 마음에 정난희를 더 포용하고 이해해야겠다는 각오까지 다졌다.

거실에 괘종소리가 여덟 번 울렸다. 이항리가 너무 늦기 전에 바래다주라고 했다. 정난희가 안방을 찾아 문경준에게 인사하였다. 대문까지 따라 나온 이항리와 동생들의 배웅을 받았다.

“어머님, 저녁 맛있게 먹고 잘 놀다 갑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자주 놀러 와, 조심해서 가고.”

“네, 안녕히 계세요.”

“언니 잘 가요, 다음에 또 봐요.”

“그래, 다음에 만나서 또 재미있게 놀자.”

“잘 가요, 안녕.”

“안녕.”

“승협아, 집까지 잘 바래다주고 와.”

“네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정난희가 아홉 시까지 들어가면 된다며 집까지 걸어가자고 했다. 유달산입구로 가는 언덕길양쪽에 오렌지빛가로등이 듬성듬성 도열하였다. 가시거리가 10미터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정난희가 어둠에 용기를 얻어 가까이 다가가 슬며시 손을 잡았다. 문승협은 기분 좋게 움찔하였다. 지난번 처음 손잡았을 때는 경직된 무감각이었다면, 이번에는 둘의 관계를 이어준 연대감이었다. 정난희생각도 같은지 표정은 어떤지 궁금해 슬쩍 봤다. 정난희가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문승협이 넌지시 집에 온 소감을 물었다.

“가족들이 환영해 줘서 좋았고, 화목한 가정 같아서 인상 깊었어.”

“다행이다. 다른 불편한 건 없었어?”

“음, 고등학생여자친구를 마치 며느리면접 보는 것 같아서 조금 그랬어.”

“그래, 나도 좀 그렇긴 하더라.”

“하지만 이해해, 부모님 입장에선 그럴 수 있으니까.”

“고마워, 이해해 줘서. 근데, 우리 사귀는 것에 너무 부담 갖지 말았으면 좋겠어.”

“부담은 무슨, 어쩌면 마땅히 치러야 할 과정인데 뭐.”

문승협이 교제하는데 압박받지 마라며 앞으로 관계를 은근히 물었다. 정난희는 당연한 절차라며 사귐을 인정했다. 다만 몇 가지를 조심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일종의 사귀는 조건이었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모른 체하기, 만나자고 보채지 않기, 무용이 남자친구보다 최우선이니 이해해 주기, 공부에 더욱 집중하기 등을 요구했다. 문승협은 숨겨진 남자라는 느낌이 들어 께름칙하였다. 불만스러워도 합당한 거부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아를 버리는 대신 운명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알았어, 노력할게.”

“노력 갖고는 안돼, 꼭 그래야 해. 안 그러면, 나 남자친구 사귀는 거 힘들어.”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할게.”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럼 너희 집에 승낙받는 건 어떻게 해?”

“그 그건 상황 봐서, 여건이 되면 소개할 테니까, 그때까지 조르지 마.”

“…….”

“그리고, 오늘 오빠집에 간 거,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자.”

“왜?”

“혹시 소문이 돌아서, 우리 엄마나 아빠가 알면 큰일 난단 말이야.”

“알았어. 참, 전에 코롬방제과에서 만난 남자는 뭐야?”

“아, 귀찮게 쫓아다니는 선밴데, 잘 말해서 정리했어.”

“그래?”

“오빠, 나 못 믿어? 나 오늘 오빠집에 갔잖아.”

정난희가 구체적인 설명 없이 오히려 핀잔주었다. 그 남자문제는 그렇게 스리슬쩍 넘어갔다.

문승협은 정난희를 바래다주면서 몇 가지 찝찝하였다. 딱 꼬집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인생 첫 여자친구가 생긴 기쁨이 앞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몸이 붕 떠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집에 가까워질즈음 찝찝함 중 하나가 떠올랐다. 다름 아닌 정난희가 인상 깊었다는 ‘화목한 가정 같다는’ 말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면서 ‘우리 집이 정말 화목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문승협이 안방문을 열고 다녀왔다며 보고했다. 문경준이 서로 공부하면서 건전하게 만나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평온한 아버지표정에 마음 놓였다.

좋은 기분으로 동생들 방에 들러 분위기가 어땠는지 물었다. 오빠여자친구에게 시기할 법 한대, 예쁘다 똑똑해 보인다는 새초롬한 몇 마디가 끝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엄마에게도 물었다. 이항리가 앉으라면서 정난희평가를 시작했다. 첫 대면에 큰절을 대견해하고, 또랑또랑 대답하는 것을 총명하게 보았다. 입맛 돋우는 간장을 먼저 맛보고, 음식을 가림 없이 잘 먹어 복이 있다는 등, 바른 식사예절로 보아 가정교육도 잘 받았다며 칭찬하였다. 상차림과 설거지를 돕고 동생들에게 상냥함까지 다 예뻐 보였지만, 안경 쓴걸 유일한 흠으로 꼽았다.

“엄마, 난희 시력은 괜찮데, 시력 나쁘면 렌즈도 못 껴.”

“음마, 벌써 편드냐? 나중에 내 손주들이 눈 나빠서 안경 쓸까 봐 그러지.”

“별걱정을 다한다, 내가 눈이 좋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벌써 무슨 손주타령이야.”

“그건 모를 일이여, 앞날을 누가 안 다냐. 너 절대로 난희한테 푹 빠지면 안 된다.”

“맞아, 오빠가 여자친구 만나느라 공부를 등한시할까 봐 걱정이다.”

“문윤아씨, 오빠걱정은 붙들어 매시고, 너나 공부 열심히 하세요.”

“엄마, 너무 걱정 마. 아빠가 말한 대로, 같이 공부하면서 건전하게 사귈게.”

“말처럼 그게 어디 쉽간디?”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염려 마셔.”

“썩을 놈,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여자친구 사귀는 게 그렇게 좋냐?”

“하하, 그냥 그렇지 뭐. 참, 아빠는 별말 없었어?”

“난희아버지가 세무서 다니냐?”

“응, 세무공무원 이랬어.”

“그건 맘에 든다더라.”

“맘에 안 든 것도 있대?”

“애가 당차고 똑똑하긴 한데, 너 휘어잡고 흔들까 봐 걱정 이래.”

“…….”

“마음 여린 너한테 난희가 상처 줄까 봐, 엄마도 신경 쓰이고.”

문승협부모는 결혼할 것도 아닌데 며느리를 염두하듯 했다. 이항리는 아들을 뺏겼다는 생각에 서운하였다. 문승협은 부모우려는 아랑곳없이 크게 책잡히지 않은 정난희가 벌써 보고 싶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정난희와 사귄다는 설렘에 뒤척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똑바로 누워 천장을 보면 정난희얼굴이 떠올랐다. 만나기로 약속한 현충일이 벌써 기다려졌다. 정난희생각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문승협은 다음날 하루종일 집에서 공부하였. 보통 일요일이면 시립도서관에 가서 공부했으나, 여자친구가 생겨도 공부에 더 집중한다는 걸 보여주려 하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녀의 이성교제를 걱정하는 부모에게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월요일아침이면 발병하는 월요병은 온데간데없이 등굣길 발걸음마저 가벼웠다. 한동안 우울감에 눌렸던 문승협에게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아침자습시간에도 정신이 맑아 다른 때보다 훨씬 공부에 집중이 잘되었다.

“아야 문승협, 주말에 좋은 일 있었냐, 얼굴이 훤하다?”

“아니, 별일 없었는데.”

“언능 이실직고해라잉, 니는 얼굴에 다 표시난께.”

“집에서 종일 뒹군 거 빼고는 없어.”

“그건 그렇고, 똥은 싸왔냐?”

“도시락도 아니고, 뭔 똥을 싸 오냐?”

“부반장이나 된 놈이 정신머릴 어따 쓰냐, 오늘 똥봉투 내는 마지막날이잖애.”

“아 맞다, 깜빡했는데 어떡하지?”

“어허, 점심 먹고 칙간에 가서 싸믄 되제 뭔 걱정이어.”

아침부터 쉬는 시간마다 채변봉투를 준비하려는 학생들로 화장실이 만원이었다. 줄을 선 학생들 손에는 뜯어낸 연습장과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기다리다 지쳐 화장실문을 발로 차거나, 문위로 올라가 내려다보며 빨리 나오라고 채근하였다. 작은 돌을 던져 장난치는 짓궂은 아이들도 있었다. 용을 썼는데도 실패한 아이들은 친구가 싸놓은 변을 대용했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한결같이 집게손가락으로 변봉투를 쥐고, 다른 손은 코를 쥐어 위생적인 척하였다. 훤히 보이는 변봉투를 얼굴에 갔다 대고 흔들어 보이며 장난쳤다. 그나마 채변봉투를 가져온 아이들은 그렇게 준비하여 제출했으나,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임기응변으로 매점에서 빵을 사 먹고 남은 투명한 비닐봉지를 씻어 사용했다. 이도 어려운 학생은 쓰레기통을 뒤져 비닐을 급조해 이용하였다. 이름을 써야 하는 종이봉투는 백지연습장을 잘라 밥풀로 붙여 비슷하게 만들어 제출했다. 비닐봉지조차 구하지 못한 아이들은 연습장으로 만든 종이봉투에 변을 바로 넣고 이름을 쓰는 바람에, 변이 묻고 새어 나와서 반친구들에게 비난과 원성을 들었다. 그런 열과 성의에도 불구하고 규격에 맞지 않아 선생에게 거절당하였다. 학생들이 그렇게까지 발버둥 친 이유는 체벌 때문이었다. 채변봉투를 제때 내지 못하면 담임성향에 따라 엎드려 벋쳐 같은 기합을 받고, 고통스럽게 손바닥과 엉덩이를 맞는 것은 기본이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주번을 한 달 내내 해야 했다.

정규수업마지막시간에는 예고된 대로 결핵예방주사를 맞았다. 뜨겁게 아프다는 그 유명한 불주사였다. 두려움에 접종이 끝날 때까지 아프냐는 질문과 엄살로 시끌벅적하였다. 담임선생이 다 큰 고등학생들이 무서워한다며 조용히 하라고 야단쳤다. 몇몇 학생은 불주사를 피하려 이미 접종했다고 거짓말하였다. 하지만 왼쪽어깨에 흉터가 없음을 확인한 선생에게 혼쭐났다. 막무가내 거부하는 학생은 팔안쪽표피에 투베르쿨린을 주입했다. 가로길이가 10mm 이상 부풀어 오르면 항체가 있는 양성이라 맞지 않았다. 음성이면 무조건 접종하였다. 그동안 경험해 본 콜레라∙장티푸스∙뇌염예방주사와 확연히 다른 건 사실이었다. 후진국형 질병 중 하나인 결핵예방주사는 일회용 주사기가 없어 유리주삿바늘을 알코올램프에 소독하여 재사용했다. 접종부위가 곪은 뒤 딱지가 앉게 되어 선명한 흉터가 남았다. 긁고 비비면 더 커지고 흉해져 낳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하루종일 대변냄새와 알코올냄새가 진동하고 소란스러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문승협은 여전히 좋은 기분 탓에 사람 사는 냄새와 아늑한 교실로 미화되었다. 밉상 짓을 많이 하는 장기원마저 귀여워 보였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아름답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었다.

문승협은 야자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도 마음이 가벼웠다. 운명과 우연은 따로 가 아니었고, 어느 순간 운명이 우연으로 내 앞에 와있었으며, 그 증거가 정난희라고 생각하였다. 고심하던 이성문제는 해소되었으니, 학교성적은 노력으로 극복하리라 다짐했다. 윙스멤버들과 친구문제는 부딪혀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고뇌를 줄여갔다. 그러나 부모불화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 암처럼 자리 잡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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