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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별 – 2권 1부 25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25)

by 태양을 품은 별

국회는 야권이 공동발의 한 ‘이철희∙장영자사건 국정조사위원회 구성결의안’과 ‘국무총리 해임 공동결의안’을 부결시켜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전두환대통령이 신임 외무장관에 이범석, 안기부장에 노신영을 각각 임명하였다. 보사부가 전남목포시를 의약분업시범지역으로 선정했다. 용인자연농원이 ‘우주관람차’ 놀이기구를 개장하였다. 강만길교수 등이 쓴 ‘한국민족주의론 1권’과 김지하시집 ‘타는 목마름으로’가 출간되었다. 이스라엘군이 남부레바논을 침공하여 중동지역에 또다시 전쟁의 암운이 감돌았다.


문승협은 정난희와 만남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 주가 더디게 지나갔다. 토요일도 마다하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다. 밤늦게 들와와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낮에 우연히 시립도서관휴게실서 만난 부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하였다.

“승협이 오빠, 저 기억하요?”

“그럼, 부용경동생 부현지.”

“정난희의 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라.”

“하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예, 오빠도 잘 지내셨지라?”

“응, 그럭저럭. 용경이는 서울서 잘 지내니?”

“요즘 통 연락도 없어라, 내 인생 살기 바쁜께 관심도 없고.”

“용경이가 공부만 열심히 하나 보네.”

“난희랑은 잘 만나요?”

“아, 너한테 우리 만난다고 이야기했나 보구나?”

“그라믄 난희랑 사귀기로 했소?”

“…….”

“대답 없는 거 본께 뭔 뜻인지 알겄네요. 난희가 비밀로 하랍디까?”

“응? 하하하.”

“그 가시나는 나랑 친하다믄서, 지 신상에 관한 일은 나한테도 비밀로 합디다.”

“친구들에게 다 말할 순 없지 않을까?”

“난희한테 무용친구들은 있는디, 나 같은 일반친구는 벨로 없어라.”

“친구 많은 게 나쁘진 않지, 그렇다고 꼭 좋지도 않아.”

“오빠는 난희가 어디가 좋으요?”

“…….”

“하기사, 고교얄개영화에 나온 배우 강주희를 닮아서 이쁘긴 하제.”

“어, 그러고 보니 진짜 비슷하네.”

“눈이 크고 이쁜 얼굴은 선천적 인디, 체형관리랑 무용실력은 피나는 노력으로 이룬 결과여라우.”

“하하하.”

“정난희목표가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이화여대무용과에 입학하는 거여라. 서울도 아닌 지방고등학교에서는 하늘에서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여 갖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지라.”

“아, 그렇구나, 처음 알았다.”

“오빠, 난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지라? 으째, 내가 쪼께 말해주까요?”


정난희의 무용실력은 중학교2학년 때 두각을 나타내고, 중학교3학년이 되어 꽃을 피웠다. 중학생들이 참가한 전국무용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했다. 또래들 중 정상급무용수였다. 중학교1학년 때는 재능이 없으니 그만두라는 굴욕적인 말에 좌절도 있었다. 천재적 소질이 있는 아이들과 경쟁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독종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악착같이 연습하였다. 무용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로 정평 났다. 칭찬이 자자해 유명한 무용교수들이 제자로 삼으려 했다. 다들 이화여대무용과입학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하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유명콩쿠르대회를 별렀다. 무용에 인생을 건 집념의 아이였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넘쳐 도도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었다. 누구에게 주눅 들거나 꿀리지 않게 키우려는 집안환경과 가정교육에 영향받았다. 무용하는데 들어가는 레슨과 작품비에 가정수입전부를 쓸 정도로 부모가 올인했다. 그로 인한 부담과 장녀기질이 더해져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고, 부모의 강요와 압박을 당연시하며 복종하였다. 무용을 위해서는 주도적이고 막무가내고집에 무척 이기적이었다. 일반사람들에게 낯설고 독특한 습성도 지녔다. 무용하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경쟁하는 속에서 자연스레 습득한 그들만의 언행이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군계일학이 된 만큼 자존심과 자기주장도 세졌다. 상위클래스의 우월감과 실력유지를 위하여 강해야 하고 강한척해야 하는, 그래서 강해진, 어찌 보면 모든 것이 무용 때문에 형성된 인격이었다.


문윤아가 아침 먹으라며 문승협을 깨웠다. 밥상머리에 앉아 투덜거렸다.

“하필 현충일과 일요일이 겹치냐, 휴일을 도둑맞은 기분이야, 그치 언니?”

“그러게, 현충일이 월요일이었으면 하루 더 쉴 텐데.”

“오빠는 안 그래?”

“아쉽지만 별도리 없잖아.”

문윤아와 문현아가 어이없다는 듯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문승협은 정난희를 만날 생각에 빠져 동생들 말을 무시했다. 서둘러 밥을 해치우고 씻으러 갔다. 문윤아가 문승협뒤통수를 째려보았다.

문승협이 집을 나서 걸음을 재촉하였다. 정난희가 자기 집 앞 버스정류소에서 잠깐 보자고 했었다. 무용연습시간이 빠듯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문승협은 따로 시간을 내주지 않아 서운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나자 보채지 말고 무용을 최우선해달라던 사귀는 조건 때문이었다. 오히려 짬을 내어 만나자는 정난희에게 감사했다. 바쁜 와중에 이렇게라도 만나는 게 어디냐며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정류소에서 기다렸다.

“오빠, 일찍 왔네?”

“아냐, 방금 왔어. 가방이 꽤 크다, 내가 들어줄까?”

“괜찮아, 무용복세탁해서 가져가는 거야.”

“이리 줘, 내가 들을 게.”

“그래 그럼. 우리 무용실까지 걸어가자.”

“버스안타고?”

“응, 버스 타면 금방 헤어져야 되잖아, 걸어갈 정도는 시간 있어.”

“잘 있었어?”

“응, 무용 때문에 좀 피곤한 거 빼곤 괜찮아. 오빠는?”

“나도 잘 있었어, 그런데 일주일이 엄청 안 가더라.”

“오빠, 내가 공부에 집중하라고 했지?”

“응, 열심히 하고 있어.”

“근데, 왜 시간이 안 가?”

“아 알았어, 더 노력할게. 그렇지만, 자연스레 생각나는걸 내가 어쩔 순 없잖아?”

“그래, 그것까진 어쩌겠어. 하지만, 그것도 놔두면 습관 된단 말이야.”

“알았어, 전념할게. 근데, 너는 내 생각 안 나?”

“안나, 하나도 안나.”

“정말?”

“응, 생각나도 안나.”

“생각은 나는구나?”

“아니, 생각 안 한다고.”

“피, 좀 서운하다.”

“그럴 시간에 공부해, 난 무용할 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오빠, 이사도라던컨 알아?”

“처음 들어보는데?”

“여자친구가 무용하는데, 무용에 대한 기본상식은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안, 앞으로 연구할게.”

“오빠도 공부해야 하니까 연구는 됐고, 나 만날 때마다 하나씩 알아가면 돼.”

“그 정도 시간은 괜찮아, 권해줄 만한 책 있어?”

“어허, 그 정도라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공부하라고.”

“아 알았어.”

“이사도라던컨은 현대무용의 어머니야, 현대무용의 창시자로 내 롤모델이기도 하지”


‘이사도라던컨’은 무용계의 혁명가로서 영광스러운 수식어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였다. 20세기 세계무용계가 이사도라던컨을 계승할 것이냐 극복할 것이냐를 두고 화두에 휩싸일 정도였다. 마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칼마르크스’ 문제로 큰 혼란을 겪었던 것과 유사하였다.

이사도라던컨은 어린 시절부터 형식적이며 기교적인 전통발레의 엄격함을 거부했다. 창작무용을 예술 수준으로 끌어올려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였다. 자유로운 율동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바탕으로 춤을 췄다. 20대에 접어들어 영국으로 건너갔다. 대영박물관의 고대그리스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몸짓이 자신의 춤과 같음을 확인하고 고전적 춤사위를 부활시켰다. 노출이 많은 고대그리스드레스를 입고 맨발로 자유롭게 무대에서 춤추자, 기존 발레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당대 예술인들의 찬사가 빗발쳤다. 조각가 ‘로뎅’등 그 시대의 수많은 화가, 시인, 사진작가, 소설가들이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러시아의 천재적인 혁명시인으로 칭송받던 ‘세르게이 예세닌’과 결혼했으나,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다 헤어져 말년을 초라하고 가난하게 보냈다. 그녀의 죽음도 삶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이사도라던컨의 붉은 스카프끝자락이 자동차뒷바퀴에 감기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문승협은 이사도라던컨의 최후를 듣고 안타까웠다. 정난희가 아랑곳없이 이사도라던컨의 불행해진 인생이 남자 때문이라며 거듭 강조했다. 발레리나에게 남자는 방해자라는 지론을 강하게 피력하였다. 문승협이 남자도 남자 나름이라며 샐쭉댔다. 무용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유용한 점이 분명 있을 거라고 반박했다. 정난희는 유치원 때부터 선생님과 선배들에게 들은 진리라며 힘줘 말하였다. 선택에 의해 진화한 무용계의 자연선택설 같은 진화론적 학설이라고 주장했다.

문승협은 무용과 자연도태설이 무슨 상관이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시간에 갑론을박하는 것이 아까웠다. 남자무용론을 절대 신봉하는 정난희입장에 반론을 접었다.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피하자며 그냥 수긍하였다. 문득 정난희와 대화에서 자신의 대답이 계속 ‘알았어’로 귀착되어 감을 느꼈다.

문승협이 반발심에 자신이 그 진리를 깨트리는 최초 남자가 되겠다고 장담했다. 정난희가 그렇게 마음먹은 남자가 왜 없었겠냐며, 그런 남자들이 나중에는 지쳐서 스스로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정난희의 콧방귀에 오기가 생겼다. 그들과 다르다는 걸 꼭 보여주겠다며 재차 의욕을 보여줬다. 정난희가 그럼 한번 지켜보겠다고 다독여 웃어넘겼다. 자신감에 주먹을 불끈 쥔 문승협을 몰래 바라보았다.

정난희는 문승협이면 그런 남자일 수도 있겠다고 상상했다. 남자친구가 무용에 독이라는 말에 동감하면서도 어폐가 있음을 알았다. 무용수에게 남자무용론은 남자자체가 아니었다. 사랑에 빠진 무용수가 무용을 등한시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자기중심적 계산이라고 생각하였다. 문승협을 남자친구로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문승협이라면 언제나 자신을 바라봐주고 뭐든 다 들어줄 것 같았다. 어떤 행동을 해도 이해해 주리라는 지극히 개인감정이 가미된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진심이 담긴 문승협의 눈빛에서 답을 찾았다. 그것이 정난희가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하는 이유이며, 사랑이었다.

문승협의 말과 행동은 정난희가 그동안 이성에 대해 들어왔던 선입관과 달랐다. 보통 여학생들이 사회통념으로 아는 남학생들과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문승협은 다르다’는 생각이 이성교제를 하지 않겠다는 작심을 바꿔놓았다. 예전에는 무용연습에 잡념과 상념 없이 몰입했으나, 문승협을 만난 이후에는 불현듯 떠올랐다. 몇 번 반복되더니 무용연습 중에도 보고 싶어졌다. 점점 집중력이 흩어지는 날이 늘어나면서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무용하다 마음대로 안되면 투정 부리고 힘들면 의지하고 싶었다. 날씨가 좋거나 또래 남녀커플이 지나가는 걸 보면, 문승협과 놀고 싶은데 무용을 해야 해서 짜증 났다. 문승협 때문에 무용수본분을 망각하게 하는 망상들이 꿈틀댔다. 결국 정난희사전에 있을 수 없는 계획을 세웠다. 오늘 무용실까지 가는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문승협을 만나자고 한 것이 그 증거였다.

정난희는 시내를 관통하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사람들을 피해 인적 드문 길을 골라 이리저리 걸었다. YMCA부근에 도착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조금 남아 좀 더 이야기하려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오빠, 이번 월말고사 끝나는 일요일에 뭐 해?”

“아직은 별일 없는데?”

“그럼 그날 비워놔.”

“왜?”

“아니 왜라니, 내가 비워놓으라면 네 해야지.”

“하하, 넵.”

“그렇지, 그런 태도 아주 맘에 들어.”

“궁금하다, 무슨 계획인지.”

“거기, 정난희 아니니?”

“어머!”

세련되게 차려입은 30대 여자가 골목입구에서 매서운눈빛으로 정난희를 불렀다. 정난희가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주춤하다 얼른 여자에게 뛰어가 인사하였다. 예상치 못한 무용선생출현에 난감했다. 고개 숙인 채 쩔쩔맸다.

“너 여기서 뭐 하니?”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있었어요.”

“쟤는 누구야?”

“아, 친구오빤데, 무용실 가는 길에 만났어요.”

“요즘 연습 때 해찰 부려서 무용권태긴가 했더니, 그게 아니고 저 애 때문이구나?”

“아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보니까 딱 답이 나오는구만. 너희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아니?”

“…….”

“이번 동아콩쿠르에 불참했으면, 다음 주 있을 대회준비에는 집중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죄 죄송합니다.”

“동아콩쿠르에 고등부가 처음 생겨서 참가 않겠다고,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길래 이상하다 했다.”

“…….”

“얼른 무용실로 가.”

정난희가 빨개진 얼굴로 문승협에게 왔다. 문승협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말없이 무용복가방을 건네받았다. 줄행랑치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무용선생이 정난희뒷모습을 주시하다 문승협에게 고개 돌렸다. 공손하게 인사하는 문승협을 잠시 째려보다 걸음을 옮겼다.

정난희가 우연히 만난 친구오빠로 둘러댔으나, 무용선생은 믿지 않았다. 다음 주에 대회가 있는데도 남학생과 있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남자친구라면 몸서리치던 아이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른 제자도 아닌 자기 관리에 철두철미한 정난희여서 한번 놀랐고, 어려운 무용동작을 완성했을 때 성취감에 기뻐하던 모습과 흡사해 두 번 놀랐다. 더욱이 이제껏 정난희를 지켜본 바로 가장 환한 표정이었다. 필시 남학생에게 보통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무용선생은 ‘동아무용콩쿠르’ 참가를 강제하다시피 독려했었다. 정난희의 대학진학뿐 아니라 무용인생에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지난겨울 정난희부모에게 동아무용콩쿠르출전을 동의받았다. 입상을 목표로 이화여대무용과교수에게 거액의 작품비와 레슨비까지 지불하였다. 그런데 정난희가 대회를 두 달여 앞둔 시점에 올해는 불참하고 내년에 참가하겠다고 했다. 갑자기 특별한 사유도 없어 언짢았다. 요즘 어디에 정신이 팔렸는지 무용연습태도마저 불량해 몹시 화난 상태였다. 못마땅한 여러 감정이 섞여 정난희를 단단히 야단치려다 길거리라서 차마 못하였다. 남학생을 불러 무슨 관계인지 신원을 파악해 정난희부모에게도 알릴 생각이었지만, 늦으면 곤란한 약속이 있어 다음 기회로 미뤘다.

문승협은 뻘쭘히 골목을 나왔다. 정난희에게 별일 없을지 걱정되었다. 남자친구가 아닌 친구오빠가 되어 서운하면서도 정난희입장을 이해했다. 정난희의 무용실이 근처임을 알게 된 건 큰 수확이었다. 말없이 가버린 정난희에게서 언제쯤 다시 연락이 올지, 막연하게 기다려야 하는 심란한 마음으로 시립도서관에 갔다.


정난희와 어정쩡히 헤어지고 며칠이 지났다. 정난희부모에게 인사하기 전까지 사귀는 걸 비밀로 한터라 집에 전화할 수 없어 답답했다. 궁금한 소식을 기다리는 조바심 속에 문승협의 학교생활은 계속되었다.

문승협이 점심시간에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친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윙스멤버들이 험악한 태도로 에워쌌다. 싱어를 다시 뽑았으니 인계하러 토요일방과 후에 음악학원으로 오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음악학원에 도착했을 때는 윙스멤버들이 다 모여있었다. 문승협을 향해 둘러앉아 새로운 메인보컬이라며 3반 주신을 소개하였다.

주신은 조용필모창을 잘하기로 학교에서 유명했다. 그런 이유로 장홍기가 주도해 결정하였다. 주신의 성적이 전교꼴찌 수준이었다. 학교에서 정한 윙스멤버자격조건인 전교 50등 이내에 미달했으나, 충족한 지원자가 없어 문제 삼지 않았다. 그만큼 문승협의 후임싱어를 선정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더군다나 메인보컬 한 명이 바뀌었을 뿐인데 밴드의 색깔과 실력이 현저히 나빠져 곤혹스러웠다. 문승협에 대한 악감정이 쌓였다.

윙스멤버들이 거친 말투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문승협을 죄인 다루듯 하였다. 문승협은 자기가 원흉이라는 죄책감에 참았다.

“어찌 됐든 나 때문에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내가 특별히 인계할 거 있으면 말해주라.”

“야 이 쪼다새끼야, 인계할 놈이 생각해야제, 그 새대가리는 뒀다 어따 쓸래?”

“…….”

“음마, 니가 눈을 부릅뜨믄 으짤 것인디?”

“야 강동우, 말 조심해라.”

“조심 못하겄다 씨발놈아, 이 호로새끼 대가리를 확 조사불란께.”

“그래, 내가 미안한 게 있으니 오늘까지만 참는다.”

“어허, 니가 안 참으믄 으짤래 이 븅신새끼야. 으째, 나하고 한번 떠보까?”

리더 강동우가 인신공격과 욕을 서슴지 않았다. 문승협은 순간 불끈했지만 멤버들의 분노를 이해해 감내하였다. 이 순간만 참아내면 나아질 거라 여겼다. 감정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해결하려 했다.

“자, 그동안 연습하고 공연했던 노래리스트야, 필요하면 노래 기법이랑 창법도 알려줄게.”

“그딴 것은 필요 없고, 강동우가 내준 교습비 3만 원이나 언능 토해내라.”

“잉, 탈퇴를 안 했으믄 모르까, 탈퇴했은께 당연히 그래야제. 동우 기타도 돌려주고.”

“그래, 동우 기타는 당연히 돌려줘야지. 근데, 교습비가 8천 원씩 3개월이면 2만 4천 원이잖아.”

“이자를 포함한 거여, 이자도 내야제.”

“하하, 이자? 그래, 알았다, 조만간 줄게.”

“쪼개지마 새끼야, 어디서 쪼개고 지랄이어?”

“그리고, 내가 산 싱어용 마이크하고 앰프는 기증하마.”

윙스멤버들이 인계라는 명목으로 만나자고 하였으나, 사실 강동구의 기타를 돌려받는 일 외에는 딱히 없었다. 다분히 문승협을 괴롭히겠다는 심산이었다. 문승협이 교습비와 이자까지 붙여 돌려달라는 억지에 순순히 동의하며 보컬용비품도 기증한다고 하자, 뭉쳐있던 멤버들의 공조가 흔들렸다.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내가 사정이 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아야, 누구는 사정없다냐, 이민상이 빼놓고는 우리도 다 사정이 있어.”

“맞어, 민상이는 누나들이 돈을 다 대준디, 나는 울아부지지갑서 삥땅 치다 걸려갖고 디져불뻔 했단께.”

“나도 우리 제화점에서 구두판돈 쌔비다 걸렸고, 동우도 즈그 집 점빵금고에 손댔다가 걸렸어.”

“그랬구나, 난 몰랐어, 미안하다.”

“그라고 성적도 말이여, 니만 떨어진 줄 아냐, 다 떨어져부렀어. 우리 모두 집에서 죄인이란께.”

“우리도 다 전교 50등 밑으로 떨어져 갖고, 전교 50등 이내 제한조건은 인자 유명무실해.”

“아무튼, 나 때문에 너희들에게 피해 줘서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다들 매달 들어가는 연습실사용료와 교습비로 금전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다 성적까지 떨어져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부모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음악이 좋아서 견디고 있었다.

윙스멤버들이 조금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해서인지 더 이상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다. 다만 메인보컬이던 문승협이 빠지면서 밴드 수준이 예전만 못한 터에 다음 공연곡선정도 애먹어 아쉬워하였다. 문승협의 탈퇴를 막고 싶은 미련 때문에 아직 앙금이 남아있었다.

반대로 문승협은 이로써 인계와 갈등이 해소됐으니, 이제 성적 올리기에 집중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난희집 근처를 지나면서 정난희가 보고 싶었다.


한동안 정중동이던 공안당국이 국세청을 동원하여 김지하시집‘타는 목마름으로’를 펴낸 ‘창작과 비평사’를 세무사찰에 들어갔다. 전국민주화세력은 안타까움과 무력감을 느꼈다. 목포시대안동에서 태어난 고향시인이 당하는 핍박에 목포시민사회가 술렁였다.

‘타는 목마름으로’는 1975년 발표되어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대학생과 지식인 등, 민중들에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민주주의운동에 각종 탄압이 난무하는 매우 엄혹한 시기인지라,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한 시의 분위기에 열광하였다. 암담한 현실에 절규하고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폭력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사회현실에 대해 흐느끼면서 민주주의를 ‘너’로 의인화시켜 표현하였다. 점층적인 운의 반복을 사용해 내재적 리듬을 형성함과 동시에 감정을 고조시킨 점이 특징이었다.

한국은행이 500원 주화를 시중에 유통하면서 500원짜리 지폐가 동전으로 바뀌었다. 스티븐스필버그가 제작한 SF영화 ‘E.T’가 미국전역에 개봉되어 주목을 받았다. The Extra Terrestrial의 약자로 지구 외 존재 외계인을 뜻했다.


가슴 떨리는 5월 월말고사성적이 교무실에 붙었다. 문승협성적이 전교 50등 안에 들었지만 겨우 4등 올라 48등이었다. 윙스멤버들이 ‘성적 때문에 탈퇴하더니 꼴좋다’며 비아냥댔다. 문승협은 실망과 좌절을 느꼈다.

성적공지로 웅성거리는 와중에 지난번 대변검사결과가 나와 회충약이 배포되었다. 약을 먹느라 다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남의 변을 제출한 아이들이 받은 회충약을 먹을지 말지 눈치보기에 급급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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