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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별 – 2권 1부 26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26)

by 태양을 품은 별

어김없이 6월 월말고사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문승협은 밤잠을 설쳐가며 성적 올리기에 고군분투했으나,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얼 몸살감기에 걸렸다. 하필 목포지역 84개 약국이 보사부의 의약분업강행에 항의하며 휴업하는 때라 약도 먹지 못하고 시험을 쳤다.

월말고사가 끝나는 날 서울반포대교가 개통되었다. 일본문부성의 새 고등학교역사교과서검정이 언론매체에 보도되어 파장을 일으켰다. ‘침략’을 ‘진출’로, ‘출병’을 ‘파견’으로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분노한 대한민국국민들이 정부대응을 예의주시하였다.

문승협은 약 없이 힘겹게 몸살감기를 이겨냈다. 일요일아침 일찍 일어나 반도패션 죠다쉬청바지에 코오롱스포츠 파란색긴팔티셔츠를 입고 집을 나섰다. 정난희와 산행 갈 생각에 아침공기가 상큼하게 느껴졌다.

7시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정난희를 기다렸다. 들뜬 마음에 시큼한 대합실냄새마저도 향기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줄 달린 동그란 등산모자와 진한갈색선글라스를 쓴 여학생이 손을 흔들었다. 타이트한 청바지에 흰색반팔티셔츠와 얇은 회색카디건을 걸친 정난희가 유난히 예뻤다.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다 어깨에 멘 큰 가방과 손가방을 보고 얼른 뛰어가 받아 들었다. 작은 손가방이 더 무거워 의아했다. 대합실로 들어가면서 정난희신발을 보았다. 새로 출시되어 유행하는 러닝화였다. 공통점을 발견하곤 싱글거렸다.

“와, 우리 같은 운동화다.”

“뭐가, 난 흰색이고 오빠는 파란색인데?”

“색상은 다르지만 같은 메이커잖아.”

“아, 같은 프로스펙스라고. 호호, 그러네.”

“오는데 힘들지 않았어?”

“그냥 조금 그랬어. 오빠는 어디 간다고 나왔어, 설마 나 만난다고 하진 않았겠지?”

“응, 어제저녁에 아침 일찍 도서관 갈 거라고 말해놔서, 아마 도서관에 간 줄 알 거야.”

“잘했어, 괜히 나 만난다면 집에서 걱정하실 거야.”

문승협은 정난희에게 뭐라 말하고 나왔는지 물으려다 참았다. 공연히 껄끄럽게 하기 싫었다. 매표소에서 월출산도갑사행 버스표를 산 뒤 버스승차장으로 갔다. 문득 지난번 무용선생과 마주친 이후 정난희생활에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

“응. 오빠는?”

“시험기간 내내 몸살감기 걸렸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버스가 승차장으로 들어와 대화가 중단되었다. 둘은 차표를 개찰하고 버스에 올랐다. 일요일인데도 승객이 많지 않았다. 정난희가 뒤쪽 좌석으로 가 앉자, 문승협은 가방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앉았다. 어깨가 맞닿아 통로 쪽에 최대한 붙었다.

“오빠, 이쪽으로 좀 와.”

“난 괜찮아, 편하게 앉아.”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그게 뭐야, 이리 좀 오라고.”

“아 알았어, 안 불편해?”

“응, 괜찮아.”

“불편하면 말해.”

“응. 참, 그래서 약은 먹었어? 열은?”

문승협은 그렇지 않아도 어깨가 맞닿아 기분이 묘한데, 갑자기 정난희손이 머리를 짚어 놀랐다. 가까이 다가온 정난희얼굴에 심장이 예고 없이 벌렁거렸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고 숨을 멈췄다. 정난희손이 떨어질 때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신이 아찔하였다. 정난희가 손을 뗐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문승협에게 어디 불편하냐고 물었다. 문승협이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문승협은 월말고사에 대해 물어볼까 봐 감기몸살을 핑계 삼으려 미리 말한 것이었다.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해 양심이 찔렸다. 뜻밖에 걱정스레 대해준 정난희에게 창피하면서도 감격했다.

“약간 미열이 있긴 한데?”

“괜찮아, 지금은 다 나았어.”

“다행이다.”

“그때 그러고 나서 별일 없었어?”

“언제?”

“저번에 무용선생이랑 마주쳤잖아.”

정난희가 대답 없이 차창밖을 내다봤다. 문승협은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찜찜하였다. 정난희표정을 살폈으나 크게 변화는 없었다. 화제를 돌리려 궁리하다 잠자코 있었다. 어느덧 버스가 시내를 빠져나갔다. 잠시 말없던 정난희가 차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오빠, 네 잘못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해줘.”

“왜, 뭘 잘못했는데?”

“남자들은 여자가 원하면 그냥 들어주면 되는데, 꼭 이성적으로 따지더라.”

“네 잘못 아니야, 괜찮아.”

“호호, 엎드려 절 받기네. 나 무용선생한테 엄청 혼났어, 그것도 애들이 다 있는 앞에서. 그딴 정신으로 무슨 무용이냐, 그냥 무용 때려치우라면서 쥐 잡듯이 하더라.”

“…….”

“무용은 균형이거든, 근데 내 중심이 자꾸 무너진다, 오빠 때문에. 상상에서는 오빠와 하늘을 날아도 안정적인데, 현실에서는 평지인데도 내 마음이 자꾸 흔들려. 오빠가 생각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생각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

“하지만, 고민 안 해. 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할 거니까. 그리고 오빠, 이런 일은 여자가 말하기 전엔 묻지 않는 거야.”

“미 미안.”

“아니야, 오빠는 잘못 없어.”

“…….”

“오빠, 앞으로는 내가 오빠에게 더 많이 미안할 거야, 잘 참아 줄 수 있지?”

“응, 그럴게. 잘 참을 테니까, 걱정 마.”

무용이 삶이자 생명처럼 여기는 정난희가 본인의 잘잘못을 알고 뭔가를 결심했다. 더욱 독한 마음으로 무용에 정진하기를 각오하였다. 문승협에게 이해와 잘 참아달라는 다짐을 받았다.

문승협은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했다. 자신 때문에 곤경을 겪은 정난희에게 미안하였다. 강한 믿음을 주어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팠다. 원한다면 뭐든 언제 까지든 참을 자신도 있었다. 자신을 의식한다는 생각에 기분 좋았지만, 정난희가 흔들린다는 말에 안타까웠다. 이런 경우를 두고 무용수에게 남자가 장애물이 된다는 말인가 싶었다. 더 잘해야겠다고 각오했다.

마침 버스가 영산강하구언입구를 통과하였다. 정난희가 차창에 바짝 다가앉아 하구언풍경을 감상했다. 하구둑 위를 지날 때는 반쯤 일어나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신기하다, 저쪽이 강이고, 이쪽이 바다인가?”

“맞아, 여기 처음 와봐?”

“응, 작년에 완공했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1월 초 용경이 서울친구들 왔을 때 같이 오지 그랬어.”

“아, 그땐 그럴만한 일이 있었어.”

“목포 하고 영암을 연결해서, 월출산에 가는 시간이 엄청 단축됐다더라.”

“그래서 내가 오늘 월출산도갑사를 가자고 한 거야.”

“그랬구나, 근데 안경 안 써도 잘 보여?”

“콘택트렌즈 끼었어, 어머님이 나 안경 쓴 거 은근히 신경 쓰시더라?”

“우리 엄마가?”

“응, 그래서 이왕 쓸 거 빨리 장만한 거야.”

“하하하.”

“왜 웃어?”

“아니, 우리 엄마가 신경 쓴다면서, 너도 우리 엄마를 신경 쓰니까.”

“치, 오빠라면 안 그러겠어? 우리 엄마에게 흠 잡히고 싶냐고?”

“당연히 아니지.”

하구둑을 벗어날 즈음, 정난희가 혼잣말로 ‘하구둑을 걸어보고 싶다’며 중얼거렸다.

버스가 영암에 진입하여 월출산도갑사를 향해 열심히 달렸다. 둘은 잠시 말없이 버스에 몸을 맡겼다. 정난희가 선반 위 손가방을 내려달라 하여 비닐봉지를 꺼내 좌석그물망포켓에 넣었다. 다시 손가방을 뒤적이더니 과자와 음료를 들어 보였다. 손가방을 발아래 좌석 밑에 내려놓고 과자봉지를 뜯어 내밀었다. 문승협은 과자 두 개를 집어 하나를 정난희에게 줬다.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꿀꽈배기과자는 이름 그대로 꿀맛자체였다. 문승협이 과자봉지에 손을 넣다 정난희손과 부딪혔다. 정난희가 쑥스러워하는 문승협에게 과자봉지를 건넸다. 문승협은 과자봉지를 받아 정난희가 먹기 편하게 들었다. 정난희는 과자 하나를 입에 물고 그물망포켓에 있는 비닐봉지를 가져다 무릎에 펼쳤다. 삶은 달걀을 정성스레 까서 종이에 싸 온 소금을 찍어 문승협에게 권하였다. 한입 베어 먹기를 기다렸다가 또 소금을 톡톡 뿌려주었다. 아침대용으로는 제격이었다.

“일찍 나오느라 아침 못 먹었지?”

“응, 너도 먹어. 이리 줘봐, 내가 까줄게.”

“아냐, 내가 할게. 이거 두 개도 오빠가 다 먹어.”

“바빴을 텐데, 언제 이렇게 준비했어?”

“어허, 그런 거 묻지 말랬지.”

“아, 순간 궁금해서, 미안.”

“그렇다고 죄인처럼 그런 표정 짓지 마.”

“…….”

“이거 준비하면서 엄마한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어, 너한테 말하기 창피해.”

“그게 왜 창피해?”

“말하면 상상할 거 아냐, 그게 싫어.”

“상상 좀 하면 어때, 난 네가 날 위해 준비했다는 게 감격스러운데?”

“난 싫어,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준비하는 것도 처음이고, 자존심 상한단 말이야.”

문승협은 어떤 심리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자존심 상할 정도로 싫다는데 별 수 없었다. 설득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정난희를 받아들였다.

정난희는 새로 깐 달걀을 먹고 목이 메었다. 손가방에서 바나나우유를 꺼내 문승협에게 줬다.

영산강하구언개통으로 단축되어 도갑사정류소까지 평소 1시간 정도 걸렸다. 왕인박사유적지일원에 이르러 행락객버스들이 서행하였다. 사람들이 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풍취를 즐겼다. 양쪽길가에 도열한 벚꽃나무에는 만개했던 4월 벚꽃을 대신하여 6월 버찌가 열렸다. 땅바닥에 떨어진 포돗빛 열매와 자국의 정체는 버찌였다. 화양연화를 보낸 벚꽃 잎이 남긴 흔적이었다. 터널처럼 파릇파릇 우거진 초록의 향연이 이어졌다. 실록이 푸르다 못해 눈부셨다. 여기저기에 피어난 철쭉과 장미가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반시간 정도 더 걸려 도갑사정류소에 도착했다.

문승협이 과자봉지에 달걀껍데기를 담아 그물망포켓에 넣었다.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작은 손가방을 챙겼다. 정난희를 앞세워 버스에서 내리자, 809미터 월출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월출산을 병풍 삼아 도갑사가 자리하였다. 도갑사입구에는 480년 된 팽나무가 천명을 품은 듯 초연이 서있었다. 일주문을 지나니 해탈문이 나왔다. 해탈문 너머로 보이는 도갑사의 첫인상은 말끔함이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였다. 서기 880년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 년이 훌쩍 넘은 고찰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여러 난리를 겪어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1977년엔 탐방객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당우가 전소됐다가 작년 1981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국보 제50호 해탈문은 속세를 벗어나 불교세계로 들어가며 번뇌를 벗어나 근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좌우양쪽에서 익살스럽고 깜찍한 금강역사상, 청사자를 탄 지혜의 표상인 문수보살, 흰 코끼리에 앉은 실천의 상징인 보현보살동자상이 노려보았다. 보물 제1134호로 지정된 유일한 목조상이며, 보통 사찰에 있는 무서운 사천왕상은 없었다. 해탈문 넘어 우측에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와 운판이 자리했다. 광제루에 들어서 마주한 대웅보전은 단정한 지붕선의 건물과 금빛 찬란한 단청이 묘한 대비를 이뤘다. 화려함이 그지없었다. 절마당 중축선에서 동쪽으로 약간 비껴선 보물 제1433호 5층석탑이 커다란 느티나무를 친구 삼았다. 좌우양쪽 석등을 세운 대웅보전이 다포식팔작지붕에 외부 와부瓦部는 중층重層,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이루어졌다. 법당문과 수미단은 각종 꽃들과 12지신상, 인물상, 벽사문양 내외벽화, 반야용선 등으로 장엄하고 아름답게 치장하였다. 대웅보전주불단에는 삼존불을 봉안했다. 좌측에 약사여래좌상, 가운데에 석가모니, 우측에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었다. 불상 뒤에 일반탱화가 아닌 무표정한 목각후불탱화가 보였다. 불전불상 위에는 다채로운 장식으로 만든 단집의 모형인 천개라고도 하는 닫집이 신기하였다. 목각삼장보살도와 목각신중탱, 관음32응신도가 화려함을 더했다. 대웅보전을 나와 우측으로 올라가니 국사전에 도선국사와 수미왕사 진영이 근엄하였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본 천불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 뒤로 셀 수 없는 작은 불상들이 촘촘했다. 고즈넉이 자리한 진화문 부도밭부도와 커다란 석조는 예스러웠다. 명부전 앞은 오래된 삼층석탑이 지켰다. 명부전주불단에 지장보살이 시왕과 권속들을 들러리 세운듯했다. 산신단이 있는 산신각사이를 지나면 등산로와 연결됐다.

산행 초반 등산로는 경사도가 미미해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기 안성맞춤이었다. 산을 올라가니 보물 제89호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한 미륵전에 가는 길이 있었으나, 돌에 조각한 미륵부처님은 그냥 지나가기로 하였다. 대나무잎과 소나무숲이 바람에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하늘 맑고 신선한 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키 높은 나무가 하늘을 가리어 그늘진 구간이 많았다. 상쾌한 숲공기를 만끽했다. 1시간 반쯤 걷다 보니 코를 자극하며 폐부 깊숙이 스며들던 피톤치드냄새가 무뎌졌다. 등산로가 완만하고 날씨마저 선선해서 크게 힘들지 않았지만, 미왕재 억새밭을 앞두고 조금 가팔라졌다.

정난희가 더운기운에 회색카디건을 벗어 허리에 감싸 맸다. 문승협도 긴팔소매를 팔꿈치쯤 걷어 올렸다. 조금 힘겨워하는 정난희에게 용기 내어 손을 내밀었다. 정난희가 기다렸다는 듯 덥석 잡았다. 억새밭에 다다라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면서 문승협팔을 당겼다. 문승협은 손잡는 것으로도 두근거리는데 맨살이 맞닿은 팔짱을 끼니 심장이 나대기 시작하였다. 행여 팔에 땀이 맺힐까 봐 노심초사했다. 처음으로 정난희팔을 몰래 훔쳐봤다. 의외로 거뭇한 솜털이 나있어서 귀여웠다. 땀에 쓸려 누운 솜털은 더욱 검고 선명하였다. 정난희목덜미를 타고 또르륵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눈에 띄었다. 문승협눈은 거기서 더 나아가 흰색반팔티셔츠에 비친 브래지어를 보았다. 정난희가 다른 손에 쥔 손수건으로 땀을 찍어냈다. 문승협과 눈이 마주치자 약간 상기된 얼굴로 씩 웃었다. 문승협은 들키지 않으려고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완전범죄를 위해 말을 걸었다.

“힘들지.”

“아냐, 견딜만해.”

“조금만 올라가면 평탄한 억새밭이야.”

“응, 오빠는 괜찮아?”

“그럼, 난 거뜬해.”

눈앞에 나타난 억새밭은 문승협이 상상한 은색 억새풀이 아니었다. 푸른 억새대만 쉴 새 없이 바람에 날렸다. 그래도 허리께 자란 억새가 능선에 펼쳐져 나름 볼만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몇 명 안 보이던 등산객들이 억새밭 여기저기에 있었다. 정난희가 다가오는 한 무리를 보고 얼른 팔짱을 풀었다. 사람들 시선에 쑥스러워하며 산봉우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정난희의도를 간파한 문승협이 재빨리 천황봉이라고 답하였다. 능선을 타고 흐르는 거친 월출산암릉이 멋졌으나 흔한 인간계풍경이었다. 사람들이 다 지나가고 안보이자, 정난희가 다시 팔짱을 꼈다. 올라올 땐 높낮이로 거리가 있었지만, 평지를 나란히 걸으면서 몸이 밀착됐다. 문승협이 팔에 정난희가슴이 닿자 흠칫했다. 정난희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팔을 놓았다. 문승협은 앙큼한 속마음을 들킨 마냥 머쓱하였다. 땀이 배지 않는 손을 내밀었다. 정난희가 샐쭉하며 다시 잡았다.

정상으로 향할수록 기암괴석이 나타났다. 마그마가 천천히 식으면서 만들어진 주름형태였다. 탐방로가 없는 봉우리가 노적봉이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천황봉이라 짐작할 뿐, 어디가 사자봉인지 향로봉인지 분간이 안 됐다. 산을 오른 지 3시간이 되어 갈 즈음, 풍화작용으로 9개 풍화혈이 생겼다는 구정봉에 도착했다. 넓은 바위 곁으로 우뚝 솟은 바위가 하나 더 얹혀있었다. 바위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 구멍처럼 비좁은 통로를 지나니 구정봉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하나 둘 세가며 아홉 개 구멍을 찾아보았다. 산 아래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가 보였다. 디딜방아를 찧어 도술로 조화를 부렸다는 전설이 있었다. 구정봉 동북쪽으로 천황봉이 우뚝 솟았고, 향로봉이 지척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천상계경치라고 할 만큼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정난희가 풍치를 감상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승협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였다. 길도 없는 아슬아슬한 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약간 경사 있는 옴팡진 바위에서 위아래좌우를 살폈다. 발길이 뜸한 후미진 곳이었다. 적당하다 싶었는지 자리 잡고 앉았다. 문승협에게 손가방을 달라해서 이것저것 꺼냈다.

5미터 앞이 까마득한 낭떠러지라 아찔했으나, 시야가 탁 트여 멋진 풍광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었다. 잘 엄폐되어 주위 방해 없이 둘이 있기에는 천혜의 장소였다.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벽틈에 뿌리내리고 자란 작은 소나무들이 절경이었다.

정난희는 캔음료 두 개와 작은 물통을 굴러가지 않게 내려놓았다. 마치 예전에 와본 사람처럼 익숙하였다. 보자기로 싸인 물건을 꺼내 풀었다. 매화그림이 그려진 사각 3단 찬합이 나왔다. 문승협은 그제야 손가방이 무거운 이유를 알았다. 찬합에는 김밥과 유부초밥, 과일이 들어있었다. 정난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자랑하듯 어서 칭찬해 달라는 눈치였다.

“우아 맛있겠다, 네가 만든 거야?”

“어때, 그럴듯해?”

“응, 대단해, 이거 준비하느라 고생했겠다.”

“호호, 배고프지, 어서 먹어봐.”

“음, 맛있어. 바빴을 텐데, 언제 이걸 다 만들었대?”

“엄마가 서울친척결혼식에 다녀오느라, 어제 밤늦게 오셨거든.”

“맛있다, 너도 빨리 먹어.”

“응. 오빠 천천히 많이 먹어.”

“와, 진짜 솜씨 좋은데.”

“나한테 잘 보이면, 다음에 또 해줄게.”

문승협은 기대이상으로 맛있어서 놀랐다. 배고프던 차에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좋아하는 반응에 정난희가 뿌듯해했다. 둘은 과일을 먹은 후 음료수와 물로 입가심하였다. 문승협이 빈찬합을 보자기에 싸서 손가방에 넣었다. 돌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땀이 식은 차에 오싹했다. 정난희가 카디건을 걸쳤다. 뒷마무리를 지켜보다 바위벽 쪽으로 가 기대어 앉았다. 정리를 마친 문승협에게 오라고 하였다. 옆에 와 앉은 문승협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동서남북방향을 찾아 어디가 어딘지 추측하며 서로 묻고 답했다. 전방에 펼쳐진 지역과 월출산 곳곳을 살폈다. 정난희손가락이 절벽 끝자락에 조그만 소나무를 가리켰다.

“오빠, 저기 바위틈에 자란 작은 소나무좀 봐.”

“신기하다, 어떻게 저기서 자랄까?”

“그러게, 자연의 생명력이 참 대단하지.”

“저 소나무는 우리가 여기 올 줄 알았을까?”

“그것도 그렇지만,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 있을 줄 생각이나 했어?”

“하하, 그러네. 이런 걸 우연이라 해야 할까, 인연이라 해야 할까?”

“오빠는 우연 같아 인연 같아?”

“글쎄, 우연 같은 인연 같고, 인연 같은 우연 같고.”

“피, 우린 인연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

정난희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문승협팔을 껴안았다. 바짝 다가가 문승협어깨에 턱을 댔다. 문승협은 몸이 밀착된 데다 정난희얼굴이 가까워지자 두근거렸다.

“내가 오빠를 언제 처음 봤는지 알아?”

“언젠데?”

“나 국민학교6학년 때, 목포시립문화회관에서.”

“시립문화회관?”

“응, 오빠가 덕일중합창단이었고, 합창대회에서 독창하는 걸 봤어.”

“아 맞다, 나 중학교1학년 때다.”

“그때 이후 까맣게 잊었다가, 작년 길거리에서 오빠 만났을 때 기억났어.”

“작년에?”

“응, 우연히 지나가다 영기오빠를 마주쳤는데, 그때 같이 있더라.”

“그랬구나, 난 왜 기억에 없지?”

“그다음엔 많이 봤어, 내 친구 부현지네 집에서도 봤고, 그건 기억나지?”

“응, 그건 기억나. 근데, 나 중1 때 시립문화회관에서 봤다는 건 진짜 신기하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사귀게 됐고, 지금 여기에 같이 있는 거야.”

“그럼 우리는 인연이 맞네.”

“오빠, 나 좋아해?”

“응?”

“뭐야, 왜 대답이 빨리 안 나와?”

문승협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하였다. 굳이 채근하지 않아도 같은 답이었다.

“조 좋아해.”

“나도 오빠 좋아해.”

정난희가 답변을 듣자마자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입을 맞췄다. 문승협은 정난희입술이 와닿자 눈이 동그래졌다. 감긴 정난희눈을 보고 얼른 눈을 감았다. 전기가 오듯 짜릿한 전율에 이어 요동치는 맥박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기찻길건널목차단기 내려지는 경고음처럼 땡땡땡땡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정난희는 입술만 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문승협도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있었다. 둘은 정난희가 대담하게 시도한 첫 입맞춤으로 황홀경에 빠졌다. 온 세상이 일시정지한 것 같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견디기 힘들 때까지 숨을 참아냈다. 긴 입맞춤을 언제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랐다. 어느 순간 정난희가 물러나 앉았다. 구석지고 으슥한 곳이라 안심했지만, 잔뜩 긴장하여 바람소리를 인기척으로 착각하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얼른 떨어졌다. 창피함에 고개를 돌려 먼산만 바라보았다. 문승협심장은 천지를 뒤흔들며 계속 뛰었다. 첫 키스의 여운은 붕 뜬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어졌다. 점차 잦아들면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손으로 입을 닦아내면 결례 같아서 죄 없는 입술만 오물거렸다. 어색한 정적을 떨칠 실마리를 찾았다. 조금 전 정난희가 언급했던 바위틈새에 자란 소나무를 소재 삼았다. 분재로 만들면 좋겠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정난희는 문승협의도에 공감하면서도 터무니없이 분재를 들먹여 웃겼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 말을 이어가야 해서 한마디 거들었다.

“오빠가 분재를 알아?”

“잘은 모르는데, 할아버지가 광산에 다니면서 분재를 만들거나 수석을 수집하셨거든.”

“아, 그래서 아는구나.”

“응, 특히 큰 나무 축소판 같은 분재가 멋있더라.”

“맞아, 우리 집에도 있어, 아빠가 분재에 관심 많거든.”

“궁금하다, 어떤 분재인지.”

“그 궁금증은 여기에 두고, 인제 일어나자.”

문승협의 딴소리가 입맞춤 뒤에 따라온 서먹함을 날려 보냈다. 정난희에게 평상심을 찾아주어 갈 길을 재촉했다. 문승협은 소지품들을 챙겨 들고 뒤따랐다.

격렬하지는 않았으나 문승협에게 격동적인 첫 입맞춤이었다. 둘 사이 벽이 한 꺼풀 벗겨져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곳이 첫 입맞춤을 기억하기에는 딱 좋은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둘은 구정봉에서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으로 향했다. 바람재능선을 지나면서 풍경에 압도당하였다. 문승협은 아직 가시지 않은 첫 키스 때문에 천국 같았다. 등산객들이 동서남북비경을 배경 삼아 사진 찍느라 분주했다.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엔 늘 그랬다. 와중에도 문승협의 시선과 신경은 정난희를 따라다녔다. 사진기를 준비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아빠 카메라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아냐 괜찮아, 나 사진 찍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나도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해서 카메라 생각 못했어.”

“호호, 드디어 우리 공통점을 발견했다.”

“허허, 배우처럼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왜 사진 찍기를 싫어할까?”

“네?”

“안녕, 고등학생?”

“네, 안녕하세요.”

“둘은 연인? 아니다, 고등학생이니 친구라 해야 하나?”

“아 네.”

“엿들으려 한 건 아니고, 사진 찍다 우연히 들었어요.”

“사진작가세요?”

“아뇨, 바다를 벗 삼아 사는 사람입니다.”

전문가처럼 큰 렌즈가 달린 사진기를 든 어른이 말을 걸어왔다. 경남거제에서 요트사업을 하는 30대 후반 아저씨였다. 산이 그리울 때 가끔 찾는다고 하였다. 정난희가 요트가 뭔지 몰라 되물었다. 아저씨가 짧게나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줬다. 카메라를 문승협에게 내밀며 촬영을 부탁했다. 문승협은 받아 들고 사용법을 들었다. 알려준 대로 포커스를 맞춰 셔터를 눌렀다. 사진기를 돌려받은 아저씨가 찍어주겠다고 하였다. 문승협과 정난희는 적당히 포즈를 취했다. 아저씨가 표정이 어색하다며 활짝 웃으라고 하였다. 배경을 바꿔가며 몇 컷 더 눌렀다. 명함을 주면서 사진 보내줄 주소를 물었다. 문승협은 감사한 마음으로 집주소를 알려줬다. 산과 바다에 가면 인심이 후하다고 생각했다. 아저씨가 농담을 곁들여 탤런트를 해보라며 권유하였다. 언제든 거제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문승협은 생전 처음 명함이란 걸 받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낯선 아저씨와 짧은 만남이었지만 꽤 좋은 인상이었다. 호의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눈 뒤 천황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난희는 좋아진 기분에 콧노래 부르며 한참을 걸었다. 즐겁게 허밍 하다 갑자기 문승협팔을 잡고 쳐다봤다. 거절할 수 없는 간곡한 표정으로 가곡 ‘별’을 불러달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흔쾌히 정난희가 기억하는 중학교시절 합창대회 때 느낌으로 노래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 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도 어느 게요~’

정난희가 작게 따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잠시 앉자고 하였다. 문승협이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아?”

“다리가 뻐근하고, 발바닥이 뜨거워.”

“그럼 무리하지 말고 이쯤에서 내려갈까?”

정난희가 쌓인 피로 탓에 조금 힘들어했다. 천황봉탐사를 포기하고 구정봉갈림길로 돌아섰다. 마애여래좌상과 용암사지삼층석탑도 지나쳤다. 구정봉아래갈림길에서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하였다. 향로봉오른쪽아래로 우회하여 내려갔다. 올라올 때 봤던 억새밭을 거쳐 홍계골계곡을 따라 조릿대숲을 지났다. 정난희가 동백나무숲과 편백나무숲을 지나면서 다시 힘겨워했다. 신라말기 풍수지리설 대가로 알려진 도선국사비각에서 한숨을 돌렸다. 홍예교와 용수폭포 위 정자를 지나자 도갑사가 나왔다. 문승협이 도갑사정류소에 도착해 정난희를 쉬게 하고 상점으로 갔다. 돌아갈 때 버스에서 먹거리를 샀다. 사이다를 따서 정난희에게 건넸다.

“자, 시원하게 마셔.”

“응.”

“다리는 어때?”

“이제 괜찮아졌는데, 발바닥은 아직 좀 뜨겁다.”

“저기 개울에 가서 발을 좀 담글까?”

“호호, 아니야, 버스 오면 타고 가야지.”

땀이 식어갈 즈음 버스가 왔다. 일찍 하산해서인지 목포로 가는 승객들은 몇 명 없었다. 올 때와 같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정난희가 카디건을 벗어 무릎에 놓았다. 지친 기색으로 말없이 창문만 바라봤다. 버스가 출발한 지 10여분쯤 지나 정난희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대로 잠들듯하더니 갑자기 문승협에게 고개를 돌렸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하였다.

“오빠, 그거 알아?”

“뭘?”

“나 지지난 주 광주에서 무용대회 있었어.”

“아, 그래서 바빴구나.”

“응, 나 그 대회에서 금상 탔다.”

“우아 대단하다 진짜, 진심 축하해.”

“호호, 심사가 까다로운 권위 있는 대회였거든.”

“나 네 팬 할까 봐.”

“안돼, 난 팬하고는 안 사귀어, 팬이랑 사귀는 거 아냐.”

“하하, 존레넌과 오노요코도 결혼했잖아.”

“뭐? 그게 우리하고 같아? 어쩜 마녀라는 여자와 나를 비교할 수 있어?”

“오노요코가 왜 마녀야?”

“비틀스해체가 오노요코 때문이래, 비틀스팬들이.”

“그래도, 난 그 커플 멋있어 보였는데.”

“시끄러워, 저 큰 가방이나 좀 내려줘.”

문승협이 머쓱하게 일어나 내려주었다. 정난희가 가방을 뒤져 삼성마이마이와 이어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끼고 플레이버튼을 눌러 음악이 나오는지 확인했다. 가방을 올려놓고 앉은 문승협귀에 왼쪽이어폰을 빼어 꽂아줬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클래식음악이 울렸다.

“오빠는 클래식음악에 대해 알아?”

“잘 몰라, 가끔 작은 고모가 일요일 아침에 틀어놓아서 듣긴 했는데.”

“나는 무용하면서 자주 들어, 클래식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안정이 돼.”

“어? 이거 들어봤다, 베토벤운명교향곡인가?”

“응, 맞아. 어때, 좋지?”

“응.”

“등산하면서 들으려고 가져왔는데 깜빡했어.”

문승협은 클래식음악에 문외한이라 듣고만 있었다. 정난희가 흘러나오는 순서에 따라 열심히 설명했다. 문승협이 익숙한 곡에서는 고개를 끄떡였다. ‘멜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와 피가로의 결혼, 하이든의 시계와 놀람교향곡’이 이어폰을 매개로 둘만의 시공간으로 인도하였다. 한동안 흐르는 음률에 영혼을 맡겼다. 문승협은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렸다. ‘최선경은 피아노연주곡을 좋아했는데, 정난희는 교향곡을 좋아하는구나’. 갑자기 어깨를 툭 쳐서 생각을 들킨 줄 알고 움찔하였다. 졸음을 견디지 못한 정난희머리였다. 놀람도 잠시 정난희 옆에 앉아 최선경을 떠올렸다며 자책했다. 정난희얼굴을 곁눈질로 보았다. 스멀스멀 정난희냄새가 코를 자극하였다. 일정한 정난희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어깨에 기댄 것만으로도 싱숭생숭한데, 반팔의 정난희와 소매를 걷은 맨살이 맞닿아 기분이 야릇했다. 가슴이 또 쿵쾅거렸다. 행여 깰까 봐 편하게 자도록 왼쪽어깨를 최대한 고정시켰다. 어깨가 뻐근해질 무렵 하품이 나왔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으나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정난희는 이미 깨어 있었다. 둘은 소지품을 챙겨 버스에서 내렸다.

문승협이 피곤해 보이는 정난희에게 택시 타자고 하자 바로 동의했다. 대합실을 빠져나와 택시승강장으로 갔다. 문승협이 큰 가방을 앞자리에 싣고 정난희와 뒷자리에 탔다. 택시가 정난희집으로 향하였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정난희가 문승협손을 슬며시 건드렸다. 운전기사눈치를 살피며 몰래 손잡는 모습이 귀여웠다. 문승협이 지긋이 움켜쥐며 정난희를 바라봤다. 정난희가 마주 보며 해맑게 웃었다.

둘은 정난희집 근처 큰 길가에서 내렸다. 정난희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큰 가방에서 무용복을 들어냈다. 손가방을 바닥에 넣고 모자와 선글라스 등 소지품을 위에 올린 뒤 무용복으로 덮어 위장했다. 손거울을 꺼내어 보더니 얼굴이 탔는지 문승협에게 물었다. 괜찮다는 대답에 안도하였다. 무용을 다녀온 척 부모를 속이려는 심산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속셈을 문승협이 알아챈듯하여 뻘쭘했다. 문승협은 충분히 이해되어 괘념치 않았다. 그저 집에서 무사통과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히려 씩씩한 정난희를 안쓰러워하였다.

정난희가 당분간 바빠 못 본다며 문승협을 가볍게 포옹했다. ‘연락할게, 잘 가’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문승협은 정난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억새밭에서 팔짱과 구정봉정상에서 입맞춤. 버스에서 어깨에 기대어 졸던 정난희향기와 팔의 체온. 하루 종일 요동친 심장이 안전한지 만져보았다.

집 앞에 당도하자 갑자기 우울해졌다. 황홀하고 활기찼던 즐거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집에 들어갈라치면 부모가 싸웠을까 봐 항상 긴장하였다. 부모싸움이 빈번하면 매일이 아니어도 매일 같았다. 점점 상처가 되어 스트레스로 쌓여갔다.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나갔던데, 어디 갔다 왔냐?”

“도서관에요.”

엄마 이항리가 부엌에서 저녁준비를 하며 물었다. 문승협은 생각해 둔 시나리오 대로 대답했다. 서슴없이 거짓말하여 가책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양심을 다독였다.

“얼른 손 씻고 와서 밥 먹어.”

“아빠는?”

“모르겄다, 점심 먹고 나갔는데 함흥차사다.”

문승협은 아빠가 없다는 말에 묘한 평온을 느꼈다. 행여 의심 살까 봐 간단히 씻고 나왔다. 문윤아와 문현아가 거실에 차려진 밥상 앞에 앉자, 이항리가 뜨거운 냄비를 놓고 부엌으로 갔다.

“와, 고등어김치찜이다.”

“윤아야, 너는 매워서 잘 못 먹잖아.”

“왜 이러셔, 나도 인제 어른이라고.”

“얘들아, 얼른 작은 고모한테 식사하라고 해야지.”

“갑니다 가, 작은 고모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작은 고모,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뭔 좋은 일 있겄냐, 그냥 즐겁게 사는 것이제. 근디, 으째 얼굴이 까무잡잡하다?”

“오빠, 도서관에서 공부는 안 하고 놀다 왔구나?”

“아 아냐, 날씨가 좋길래 야외열람실에서 공부했더니 그런가 봐.”

“음마, 저 흔들리는 동공은 뭔 의미까?”

문승협은 얼굴이 까무잡잡하다는 작은 고모말에 당황하였다. 막내 문윤아가 언급한 도서관에 힌트를 얻어 임기응변 둘러댔다. 퍼뜩 떠오른 클래식음악으로 화제를 돌렸다.

“고모, 클래식음악 있어요?”

“뜬금없이 클래식은 왜야?”

“아, 나도 좀 들어보려고요.”

“테이프녹음한 거 있어, 그거 주께. 전축판도 있는디, 잘못 건들믄 판에 기스난께 건들지 말고.”

“네, 고맙습니다.”

“아따 내 조카, 음악 듣는 수준이 엄청 높다잉. 테이프 여러 개 있은께, 하나씩 갔다 들어.”

다행히 더 이상 의심은 없었다. 적절한 대처에 이은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문승협은 식사를 마친 뒤 가족들과 TV를 보다 작은 고모에게 클래식테이프를 빌려 방으로 들어갔다. 추억상자에 보관해 둔 워크맨을 거의 1년 만에 꺼냈다. 최선경에게 선물 받았던 워크맨은 잘 있었다. 잠시 최선경을 생각하며 어루만지다 클래식테이프를 넣었다. 잠자리에 누워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클래식음악은 설명이 없어 누가 만든 어떤 곡인지 알 수 없었다. 취미로 삼기에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눈감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감성을 맡겼다. 낮에 있었던 첫 입맞춤이 떠올랐다. 입술을 만지며 오늘 정난희와 일들을 회상하였다. 어느 순간 잠들었다. 새벽녘에 야한 꿈을 꾸다 깼다. 꿈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정난희와 육체를 부대꼈다는 점만 어렴풋했다. 사타구니 쪽이 축축하였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으나 성지식이 없어 몽정을 몰랐다. 다른 때와 달리 분비물이 상당량 묻어있어 당혹스러웠다. 조용히 일어나 속옷을 갈아입었다. 벗은 속옷을 어찌할까 망설였다. 엄마가 알게 되면 창피하니 잘 접어 옷장구석에 숨겼다. 나중에 옷빨래와 섞어 몰래 내놓을 계획이었다. 절대 잊지 말자며 몇 번에 걸쳐 자기 최면을 걸었다. 멈춘 워크맨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예전에는 불경스러운 생각이라며 떨쳐버리려 노력했지만, 이번에는 꿈속에서 정난희를 다시 만나길 기대하였다. 정난희와의 상상의 나래를 펼수록 분기탱천 발기하여 곤혹스러웠다. 가랑이에 끼워 넣고 수그러들기를 바라다 잠들었다.

문승협은 이튿날 등교하면서 정난희가 탈없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했다. 전화하면 안 되는 형편인 데다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어 체념하였다. 이제나저제나 정난희에게서 연락이 올까 학수고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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