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6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36)

by 태양을 품은 별

나아지긴 했으나 일요일아침에도 뻐근하였다. 전화기옆에서 뒹굴며 정난희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려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별일 없었냐는 첫마디에 뜨끔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어진 질문에 가슴이 철렁했다.

“참, 오빠 혹시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녀?”

“아 아니.”

“어, 지레 겁먹은 목소린데? 만약 그러면 나랑 끝이야.”

“아 알았어. 근데, 갑자기 불량배는 왜?”

“요즘 고등학생들이 패싸움하고 난리래.”

“그 그래?”

“응, 엊그제도 홍인고하고 덕일고 학생들이 싸웠대.”

“난 싸움 같은 거 안 해, 아니 못해.”

“하긴, 오빠가 싸우면 소가 웃을 일이지.”

“그 그럼, 난 평화주의자야.”

“아무튼 그런 일에 절대 휘말리지 마라고, 알았지?”

“넵,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오빠, 다음 주 토요일에 뭐 해, 약속 있어?”

“아니, 전혀 무계획입니다만.”

“그러면, 우리 학교 축제에 올래?”

“진짜? 정말?”

“뭘 그렇게 놀라?”

“아니, 조 좋아서.”

“호호, 그럼 2시에 우리 학교 정문에서 봐.”

문승협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볼을 꼬집었다. 아픈 것이 꿈이 아닌 생시였다. 사람들 앞에 함께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정난희가 축제에 초대하다니 놀랄 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TV를 틀었다. 1870년대 위스콘신 등을 배경으로 한 ‘초원의 집’이 방영됐다. 소녀 로라잉걸스의 가족과 가축들을 통해 개척시대를 묘사하였다. 일요일아침 MBC에서 방송했다가 1년 만에 다시 송출한 미국드라마였다. 작년에 KBS‘월튼네 사람들’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 몰입하였다.

“어이 아드님, 어제도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던데, 아드님은 언제 공부하시까요?”

“하하 어머님, 머리도 쉬워 줘야 공부가 잘된답니다.”

“TV를 보면 머리가 시달려서 더 피곤할 거 같은데요, 비겁한 핑계 갔습니다만.”

“핑계라뇨, 미국개척시대에 로라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척 궁금해서 그럽니다.”

“로라하고 가축들은 엄마가 돌볼 테니, 아드님은 도서관을 가든 공부하는 것이 어떻소?”

문승협은 엄마등살에 떠밀려 책가방을 챙겨 들었다. 대문을 열고 나오다 집 앞에 낯선 아이들이 있어 주춤했다. 우장일패거리가 아닌지 덜컥 겁이 나면서 식은땀이 났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을 실감하였다. 태연히 지나치면서 보니 제원여고생들을 기다리는 아이들 같았다. 우장일패거리였다면 어찌했을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하였다.

시립도서관에 다다라 도서관모퉁이에 모여있는 아이들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우장일패거리를 신경 안 쓴다면서도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서관에 입장하는 자신모습이 웃겼다. 천영기와 이담이 열람실로 들어서는 문승협을 보고 일어났다. 책가방을 자리에 내려놓는 문승협을 휴게실로 데려가면서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너희들 왜 그래,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괜찮해?”

“뭐가?”

“아니다, 어제는 뭐 했냐?”

“왜, 나 기다렸냐?”

“잉, 어제 내내 기다렸다야. 하도 안 오길래, 느그 집에 전화할라다가 말았다.”

“잠이 부족해서 푹 쉬었어.”

“그것이 아니제, 허벌나게 어마무시한 대사를 치렀은께 피곤해서 쉬어야 했겄제.”

“무슨 대사?”

천영기와 이담이 의미심장한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사의 의미는 청화고 김일광이 오면서 알았다.

“아야 일광아, 소문 들었냐?”

“뭔 소문아?”

“오거리서 노는 모영욱을 발라버린 게 누군지는 알제?”

“잉, 뒷개에서 잘 나간다는 우장일이라드만.”

“그라믄, 그 우장일을 허벌창 내분 게 누군지 아냐?”

“그런 야그는 못 들었는디?”

“아조 따끈따끈한 소식인디, 으째, 알려주까?”

“누군디, 누가 그랬대?”

“그 누군가가 바로 여그, 이 문승협이어.”

“뭐라고라고라, 승협이가 우장일을 조져부렀다고?”

“잉 그랬단께, 그것도 엊그제 그랬단다야.”

“아야, 거짓갈을 해도 쪼까 그럴싸하게 해라?”

“음마, 진짜란께.”

정보통 천영기가 혼자만 아는 천기를 누설하는 마냥 들떴다. 문승협은 당황을 숨기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허, 우리 또래에서 제일 쌈 잘하는 아그가 우장일인디, 말 같은 소리를 하란께.”

“담이야 뭐 하냐, 니도 같이 들었잖애.”

“나도 듣기는 들었는디, 나는 긴가 민가 하다야.”

“염병하네, 담이 니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제?”

“승협아, 니가 직접 진실을 말해 보그라.”

“응, 내가 그랬어, 이 주먹으로다가 아조 뽀사부렀다.”

“우하하, 연설하네, 니가 그 째깐한 주먹으로? 허풍도 적당히 해야제, 만화나 영화라믄 내가 믿어주께.”

“그치, 못 믿겠지. 영기가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아주 소설을 쓴다 소설을.”

문승협은 절대 못 믿겠다는 김일광에게 편승하여 오히려 과장했다. 적극적으로 아니라 하기엔 우습고, 사실이라며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영웅심에 들떠 만용을 부릴까 봐 조심하였다.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스스로도 놀란 자신의 싸움실력이었다. 천영기는 시인도 부인도 않는 문승협태도에 능글맞게 웃었다. 뭔가 짐작했다는 표정을 버젓이 들어냈다. 다들 실상을 묻어두고 열람실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천영기가 이후 또 한 번 진실확인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문승협이 이도 저도 아닌 말로 어물쩍 화제를 돌려 피해 갔다. 모두 잡담을 뒤로하고 공부하다 저녁 9시 넘어 도서관을 나섰다. 문승협은 집으로 가는 길어귀와 골목 여기저기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보복이란 단어가 이렇게 심리를 압박하는지 처음 알았다.

다음날 등교하니 뜻밖의 일들이 펼쳐졌다. 수시로 와서 꽂히는 아이들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평소 친하지 않은 다른 반 아이들까지 찾아와 괜찮냐는 격려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어색한 미소를 짓느라 입가에 경련이 올 지경이었다. 정작 관심 많을 노병돈과 이병규는 쉬는 시간마다 부산하게 오갈 뿐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야간자습시작을 30분쯤 남겨놓은 시각, 노병돈과 이병규가 이삼식을 데리고 문승협을 찾았다. 둘은 자신들 부탁으로 이삼식을 도와준대 대해 공치사하였다. 이삼식은 눈앞에서 목격한 문승협과 우장일의 대결을 영웅담처럼 늘어놓았다. 말미에는 일장연설했다. 5.18때 광주시민들이 폭력과 힘에 굴복하지 않고 공정과 정의로 저항한 것처럼, 우리들 방식으로 대항하면 학교폭력은 없어질 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승협생각은 달랐다.

“아니, 학교폭력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지금처럼 강자가 약자를 괴롭힐지, 아니면 약자 간에 분풀이나 강자끼리 갈등일지 모르지만,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고 진화할 거야.”

“그래도야, 요번 일은 니가 나섰은께 이만치 된 거여.”

“맞어, 나는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야.”

“아니야, 원래 내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어.”

문승협은 질게 뻔한 무모한 싸움을 감수해서라도 우장일의 잘못된 행동을 학교에 공식고발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학교폭력이 공론화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담배심부름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우장일에게 얻어터진 사실을 명분 삼아, 학교폭력에 미온적으로 대처한 학교 때문이라는 비판도 염두하였다. 그동안 우장일이 저지른 일들이 학교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혀지길 바랐다. 학교가 피해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경각심조성과 합법적 징계절차를 거쳐 응당한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장일패거리에게 집단폭행을 당하더라도 절대 패싸움으로 변질돼서는 안 되고,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였다. 더 나아가 노병돈과 이병규가 당한 것처럼 음성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학교폭력까지 막거나, 설사 그러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행위들이 죄악이라는 사실만큼은 알리고 싶었다. 우장일과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바람에 다양한 형태의 나쁜 사례들이 학교의 직접조사 없이 수면아래로 잠겨버려 아쉬웠다. 그래도 불의에 용기를 내 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교훈만큼은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라고 알고 본께야, 우장일이랑 모영욱이 괴롭힌 아그들이 한둘이 아닌갑서.”

“오늘 승협이 니를 찾아온 다른 반 아그들 있잖애, 그 아그들도 다 당했는 갑드라.”

“썩을 놈들. 근디 말이어, 우장일이나 모영욱은 으째서 아그들을 괴롭혔으까?”

“사랑보다 미움을 먼저 배워서 그래, 꼭 사랑이 아니라도 미움이 아니었으면 달랐을 거야.”

“참, 오늘 우장일이 무단결석했드라?”


다음날 새벽 5시경에 서울, 부산, 대전, 광주 등 전국 9개 도시에서 UFO출현소동이 벌어졌다. 보통 UFO는 특정지역에서 소수사람들에게 목격되는 경우가 흔한 반면, 이번에는 비슷한 시간대에 여러 지역에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발견된 특이한 사례로 주요 일간지사회면에 자세히 실렸다.

이날저녁 OB베어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삼성라이온즈를 4승 1패로 꺾고 프로야구원년우승을 차지하였다. 안타제조기 장훈을 잇는 백인천이 41세 나이에 타율 4할 1푼 2리로 야구역사의 대기록을 세웠다.

OB베어스는 지난 1월 6개 구단가운데 가장 먼저 창단식을 갖고 충청남도대전에 연고지를 둔 한국최초프로야구단이었다. 공식구단명은 ‘두산프로야구단 OB베어스’였다. 충남대전에 둥지를 틀기까지는 지역연고주의를 고집한 군부정권의 깊은 개입과 지역감정조장이 숨어있었다. 경인, 전라도, 충청도의 1순위기업들은 프로야구단창설에 난색을 표했다. 그나마 경인권과 전라도는 군부정권의 강력한 스크린, 섹스, 스포츠라는 3S정책영향으로 삼미슈퍼스타즈와 해태타이거즈가 참여하면서 어찌 해결됐지만 문제는 충청권이었다. 프로야구참가의사는 있으나 MBC에 밀려 연고지를 구하지 못한 두산에게 삼성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OB베어스가 충청도로 갔다가 3년 후에 서울로 오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두산은 충청도에 연고가 전혀 없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용하였다. 다만 다른 5개 구단이 이를 공증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정권의 비호를 받고 서울을 연고지로 한 MBC가 반대했지만, 군부정권이 받아들이도록 압박하여 결국 성사되었다.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OB베어스는 폭발적인 어린이야구단회원가입증가로 활짝 웃었다. 야구팬들이 단일시즌22연승에 최다 24승을 이룬 OB베어스투수 박철순을 불사조라 부르며 열광하였다. OB베어스 1루수 신경식도 다리를 쫙 벌려 내야수송구를 받아내는 모습에 학다리라는 애칭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목포시내고등학교에 가을운동회와 축제기간이 다가왔다. 여자고등학교는 운동회와 연계하여 축제를 했다. 남자고등학교는 올해 처음 축제를 하거나 앞으로 도입할지 말지 논의만 있었다.

문일고는 체육의 날에 운동회를 체육대회로 개최하고, 축제는 내년부터 시행키로 하였다. 오전에 청백팀으로 갈라 씨름과 줄다리기 등이 이어졌다. 학교체육대회에서 야구와 권투경기가 처음 시도되어 관심을 끌었다. 문승협은 평소 좋아하는 야구시합에 참가했다. 1루수를 보면서 신경식의 포구동작을 흉내 내며 깔끔히 받아내 박수를 받았다. 고등학생이라선지 학부모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노병돈엄마가 점심시간에 찾아왔다. 아들을 일깨워줘서 감사한 마음으로 만든 특별한 김밥이라며 문승협에게 내밀었다.

“우리 병돈이가 맨날 쳐묵고 살만 쪄서 무자게 걱정이었는디, 인자 쪼깐 살맛 난다.”

“아따 엄니는 별말을 다하요.”

“니가 힘든 것이 나 때문이었단께는 가심이 찢어지드라. 승협이 니 덕분이다야.”

“아니에요 어머니, 병돈이가 생각이 깊어서 그래요.”

“내가 참다 참다 어쩔 수 없어서 이혼했제만, 편모가정의 자식생각을 못했어.”

“엄니, 더 나은 행복을 위한 이혼은 축복하라고 승협이가 그랍디다, 인자 그런 말 마쑈.”

“어머니, 병돈이도 병돈이지만, 어머니도 행복하셔야죠. 지난날은 잊고 밝은 미래만 생각하세요.”

“아따 뭔 아그가 이렇게 이정스러우까잉.”

노병돈엄마가 메인 목소리였지만 환한 표정이었다. 노병돈은 장기원에게 사과받고 괴롭힘에서 벗어난 후, 엄마와 허심탄회한 대화로 마음속 상처를 치료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전보다 모자간의 정이 더욱 돈독해졌다.

오후에는 축구와 배구 등 구기종목결승전이 진행됐다. 특히 농구경기가 학년별 반대항으로 오전부터 오후까지 열띤 응원 속에 펼쳐졌다. 항상 그렇듯 체육대회피날레인 이어달리기로 모든 종목이 종료되었다.

일부학생들이 체육대회를 마치고 술 취해 비틀거리며 몰려다녔다. 학교 주변을 단속하던 학생주임에게 걸려 기합 받았다. 문승협은 여러 게임을 치른 야구와 농구경기로 파김치가 되어 곧바로 집에 갔다.

다음날 토요일오전수업은 체육대회여파로 모두 엎드려 자면서 초토화됐다. 선생들도 수업진행보다는 자습시간을 주어 쉴 수 있게 편의를 봐주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3교시로 수업을 단축하여 하교시켰다.

문승협은 경주마처럼 부리나케 집으로 뛰었다. 서둘러 점심을 챙겨 먹은 뒤, 정난희에게 돋보이려는 욕심에 잔뜩 멋 부리고 다시 집을 나섰다.

목화여고정문에 도착한 시간은 2시 10분 전이었다. 교문위에 ‘제3회 동백제’를 경축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축제에 초대하고 초대받은 학생들이 북적댔다. 축제를 즐기려는 만남으로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한적해졌다. 정난희가 교문안쪽 나무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불렀다. 돌아보는 문승협에게 들어오라며 손짓하였다.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응, 오빠 오래 기다렸지. 아까 왔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알은체 못했어.”

“괜찮아.”

“이거 입장권이야, 이따 강당에서 무용공연 있거든.”

“근데 왜 그렇게 숨어있어?”

“아,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그러면, 나 축제구경은 어떡해?”

“오빠 혼자 둘러보다가 공연시간에 맞춰와, 나는 지금 가서 또 연습해야 해.”

“어제 운동회는 잘했어?”

정난희가 대답 없이 싱긋 웃으며 급히 건물 속으로 사라졌다. 문승협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축제입장만 시켜주고 가버려 뻘쭘하면서도 무용연습 때문이라니 이해했다. 정난희와 시립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한 짧은 만남 이후 한 달여만인데 금세 헤어져 아쉬웠다. 한 시간쯤 뒤 다시 만날 기대로 서운함을 달랬다. 지나가는 남녀학생들이 유명인을 발견한 것처럼 힐금거렸다. 낯선 시선이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축제를 구경해야 할지 막막하던 차에 꽃다발을 파는 학생들이 보였다. 정난희공연을 축하하려고 하나 샀다. 밝은 표정에 바삐 오가는 목화여고학생들과 축제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피해 교정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못가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는 김영후와 강원종을 마주쳤다.

“아따 이게 누구신게라, 문승협씨 아니오?”

“아까 학교에서는 암만 불러대도 못 듣고 사라지드만, 여그서 본다잉.”

“학교에서 언제 불렀어?”

“수업 끝나고 파할 때, 목청이 터져라 몇 번을 불렀는디, 앞만 보고 뛰어가드라.”

“아, 그랬구나. 근데, 무슨 일로?”

“무슨 일이 긴, 여그 같이 오자고 불렀제.”

“뭔 바쁜 일인가 했드만은, 옷도 싹 바꿔 입고 멋 부린 것이, 여그 올라고 그랬그만?”

“정난희 보러 왔냐?”

“하하, 그래, 맞아.”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니가 쌩까분 줄 알았다잉.”

“아니야, 내가 왜 그러겠어.”

“근디, 정난희는?”

“아, 무용공연연습 중이라서 혼자 돌아보려고.”

“저짝으로 쭉 돌아가믄 여러 가지 볼만해, 이따 우리도 강당으로 갈 거여.”

“그래, 그럼 강당에서 보자.”

김영후와 강원종이 걸음을 옮기자, 뒤쪽에 서먹하게 있던 여학생 두 명이 따라갔다. 문승협은 축제를 맞아 미팅한 것으로 짐작하였다. 친구들을 불러 세워 놀려주려다 참았다. 몸을 돌려 강원종이 말해준 방향으로 걸었다. 길양쪽에 시화가 줄줄이 세워졌다. 방문객발길을 붙잡고 있는 이젤 앞에 섰다. 한참 화제인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영화를 연상케 했다.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갈매기그림 위에 ‘리처드바크소설 갈매기의 꿈’ 문구가 쓰였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집중해서 보니 ‘닐다이아몬드’의 OST ‘Be’가 귓가에 맴돌았다. ‘밤 바밤 바~Solitary man’도 절로 흥얼거려졌다. 닐다이아몬드곡 중 좋아하는 노래였다. 한걸음 옆 추상화를 바탕으로 ‘만해 한용운’의 시가 눈에 띄었다. ‘님의 침묵’도 좋았으나 ‘복종’에 관심이 갔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로 시작하였다.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구절에 꽂혔다. 정난희를 생각하는 자기 마음 같아서 몇 번 되뇌어 읽었다. 계속해서 ‘이해인의 벗에게, 김춘수의 꽃, 헤르만헤세의 방랑’을 새긴 시화들이 뽐냈다.

시화가 끝나는 지점 교실에 명성윤과 조운대가 보였다. 시낭송회가 열리는 교실이었다. 마침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가 발표됐다. 뒷자리에 앉은 장기원까지 모두 심취한 모습이었다. 시낭송만큼 시쓰기와 시외우기가 유행했다. 웬만한 학생은 시집 한 권쯤 갖고 있었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교실을 나왔다.

복도끝쪽 멀리서 기타 소리가 들렸다. 어쿠스틱기타로 컨트리와 포크송을 공연하는 교실이었다. 목화여고학생들이 ‘Carpenters의 Top of the world와 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를 연주하였다. 앞자리에 앉은 홍지아를 발견하고 알은체할까 망설였다. 제원여고친구들과 함께 있어 그냥 뒤에서 관람했다. 이어서 ‘Simon &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와 The Sound Of Silence’를 연주하였다. Simon & Garfunkel은 1970년 해체 후 재결합을 반복했지만, 20세기 최고의 포크듀오라 평가받는 전설적 그룹이었다. Bob Dylan, Rolling Stones, Beatles, Beach Boys 등과 수십 년 걸친 사회혁명에 반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966년 발표한 ‘The Sound Of Silence’는 최근 역주행 중이었다.

계속 듣고 싶었으나 무용공연시간이 임박해 실내강당으로 서둘러 갔다. 정난희의 무용후배들이 강당입구에서 입장권을 확인하였다. 문승협을 알아보고 자기들끼리 수군대면서도 직접적으로 아는 체하지는 않았다.

“아그들아, 저그 승협이 온다.”

“언제 나타난가 했드만, 인자 나타난다잉.”

“어이 문승협씨, 오랜만이요잉.”

“우와 이게 누구야, 너희들 어떻게 다 모였어?”

“목화여고에 댕기는 현기정이가 초청해 불고, 우린 이렇게 짠하고 와 불었제.”

차여선과 제갈민주 등 국민학교여자동창들이었다.

“팜플렛 본께는 정난희독무가 있드만, 여자친구 무용하는 거 보러 왔그만?”

“으 응, 그렇게 됐어.”

“이 눔 시끼, 쑥스러워하기는.”

“그 꽃다발은 뭐대?”

“아야, 즈그 각시 줄라고 가져온 거 겄제.”

“으째, 인자 최선경이는 잊었냐?”

“아따 가시나, 언제 적 일이디 그라냐.”

“호호, 내가 쪼까 그랬나?”

“하하, 아니야, 괜찮아.”

“간만에 승협이 손잡고 같이 무용구경해야 쓰겄다.”

“아야, 정난희가 무용하다 보고 쓰러지믄 으짤라고?”

“호호호, 그라믄 나는 좋제, 승협이 꼬셔불 찬슨께.”

“연설한다 참말로, 여선이 니는 아직까정 승협이한테 미련 있는 갑다잉.”

“그래, 둘이 쪼개지기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왜?”

“염병 시끄럽다, 언능 가서 자리에 앉자.”

공연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군무와 독무로 한 시간 남짓 진행되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무대가 암전 됐다. 문승협은 준비한 꽃다발을 어찌할지 고민했다. 공개석상에서 남자친구등장을 싫어할 정난희를 배려해 나중에 만나서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단상에 올라가 꽃다발을 주고픈 마음이 꿈틀거렸다. 차여선이 손에 쥔 꽃다발과 단상을 교대로 바라보는 문승협동태를 의미심장하게 살폈다. 무대에 다시 불이 들어오고 무용수들이 커튼콜을 하러 나왔다. 차여선이 갑자기 문승협을 일으켜 무대 쪽으로 떠밀었다. 여자동창들도 차여선을 거들어 강제로 밀어 내보냈다. 문승협은 꽃다발을 전해주려는 사람들과 섞여 어정쩡히 단상에 올랐다. 정난희가 다가오는 문승협을 보고 당황했다. 주위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문승협은 차갑게 변한 정난희표정을 본 순간 아차하였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돌아서면서 괜한 욕심을 부렸다며 자책했다. 마음 상해 있을 정난희를 걱정하였다. 무대를 내려가면서 강렬히 바라보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반갑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서울로 전학 간 채정이었다. 김부일과 채영이도 함께였다.

“정이야, 오랜만이다, 언제 왔어?”

“네, 어젯밤에요, 잘 있었어요?”

“응, 나야 뭐 그렇지.”

“아따, 채정이 오랜만이다잉.”

“어머,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유명인이 되드만 더 이뻐졌다잉, 니 테레비에 나온 거 봤어, 무자게 반갑드라야.”

“목포가 낳은 연예인이잖애, 목포의 딸.”

“아녜요, 저한테 과분한 말씀이세요.”

“뭔 소리여, 목포의 자랑인디, 채정이 파이팅.”

“호호호,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동창들이 학교후배였던 채정이와 인사를 나눴다.

“승협오빠, 우리 갈게요, 나중에 봐요.”

“승협아 가께, 학교서 보자.”

“그래, 학교에서 보자. 정이야 잘 가, 영이도 잘 가라.”

채정이가 바쁜 듯이 가겠다고 하자, 김부일과 채영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따라갔다.

“채정이 눈빛을 본께, 아직도 승협이를 좋아한갑다?”

“아야,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 야그다.”

“그건 그렇고, 승협이 니는 뭐 하러 단상에 올라갔냐?”

“야, 너희들이 등 떠밀어서 올라간 거잖아.”

“우자지간에 올라갔잖애, 그라믄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어, 목적이 뭐여?”

“목적은 무슨, 그냥 꽃다발 주려고 올라간 거야.”

“근디, 으째 정난희표정이 고따구로 찌그러진대?”

“느그 사이 안 좋냐, 보기에 영 걸쩍지근하드라?”

“그래? 나는 몰랐는데?”

“염병, 우리가 다 봤그만 그라네, 느그 뭔 일 있제?”

“아 아냐, 공연하느라 힘들어서 그랬을 거야.”

“아니믄 다행인디, 나는 으째서 니 맴이 다칠까 비 걱정되까잉. 안그냐 아그들아?”

“긍께, 순진한 우리 승협이 휘둘릴까 비 말이어.”

“음마, 느그는 뭐 한다고 쓸잘데기없이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냐, 둘이 알아서 하게 냅둬 부러.”

“그래도 친군께 그라제.”

“아야 승협아, 우리도 갈란다, 다음에 보자잉.”

“응, 그래, 잘 가.”

여자동창들이 흐뭇한 장면을 기대하며 단상에 올라간 문승협을 지켜봤었다. 뜻밖의 쌀쌀한 정난희태도에 많이 언짢았다. 함께 있어 알 수 없는 문승협과 정난희의 좋고 나쁜 분위기가 여자동창들에게는 쉬이 목격됐다. 사랑이든 증오든 스스로 표정을 못 보고 감정을 놓치는 어리석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문승협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정난희를 만날 생각에 강당을 나와 교문앞으로 갔다. 약속되지 않아 무작정 기다려야 해서 초조했다. 학교를 빠져나가는 인파 속에 정난희가 있을지 몰라 일일이 살폈다. 학교관계자 몇 사람을 마지막으로 육중한 교문이 닫혔다. 축제를 마쳤다는 듯 교문을 환하게 밝힌 조명등마저 꺼졌다. 낙심하여 버스정류소로 걸음을 옮기는 찰나 학교안쪽에서 여학생들 목소리가 들렸다. 수위실옆 쪽문이 열리고 한 무리 여학생들이 나왔다.

“오늘 축제공연하느라 수고했어, 다들 조심히 들어가.”

“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무용선생을 둘러싼 무용부학생들이 인사하였다. 무용선생이 길을 건너자 삼삼오오 흩어졌다. 정난희와 무용부학생 몇 명이 문승협쪽으로 걸었다. 정난희후배 한 명이 문승협을 알아채고 돌아봤으나 정난희눈치를 살피며 그냥 지나갔다. 정난희는 문승협을 보았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무표정하게 지나쳤다. 문승협이 뻘쭘히 버스정류소 먼발치서 정난희를 주시했다. 정난희가 버스 타는 무용부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먼저 버스를 타고 가는 무용부학생들이 문승협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정난희가 문승협을 향해 걸으며 혹시 또 누가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문승협앞을 스쳐가면서 따라오라고 눈짓하였다. 문승협은 순간 ‘내가 창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니란 걸 알기에 고개를 저었다. 누가 볼까 걱정하는 정난희입장을 고려해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학교옆을 돌아 어둑한 가로등밑 골목에서 마주했다. 문승협이 자제하였던 마음을 풀고 다가갔다. 정난희가 쌀쌀맞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긴 안보이잖아, 누가 알겠어?”

“누가 알긴, 내가 알잖아.”

“아 알았어, 공연하느라 힘들었지?”

“아냐, 매번 하던 건데 뭐.”

“그렇다면 다행이다.”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공부나 하지, 왜 기다린 거야?”

“아, 아까 꽃다발 줬을 때, 네 표정이 안 좋아서.”

“그러게 뭐 하러 꽃다발 들고 무대에 올라와?”

“남자친군데, 그 정도도 안 되는 거야?”

“오빠, 내입장을 몰라서 그런 거야? 뻔히 곤란할걸 알면서, 내가 이미 말했잖아.”

“그래, 그래서 끝나고 만나서 줄까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미안해.”

“더군다나, 여학생들에게 떠밀려 올라오면서 사람들 이목은 다 끌고, 그게 뭐야?”

“미안, 미안한데, 나도 기분이 좀 그래.”

“왜, 친구들이 뭐라 그래?”

“내가 친구들에게 자꾸 너를 설명하게 돼.”

“그럼 남의 말이 아닌 오빠마음의 소리를 들어.”

“내 마음의 소리도 같으면?”

“오빠, 현실을 직시해, 우리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본분이 있어. 혹시, 모르는 건 아니지?”

“알아, 하지만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무슨 입장?”

“나 남자친구 맞아? 남자친구에게 신경 좀 써.”

“뭐야, 지금 나한테 위로는 못할 망정 충고하는 거야?”

“난희야, 충고는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박감의 언어야.”

“오빠, 위로는 받고 싶어 하는 이해를 따뜻하게 표현하는 공감의 언어고요.”

“에이, 너한테 말로는 못 당해.”

“서로 바라만 봐도 되고 달라도 되는데, 꼭 뭘 같이 하려 하고 같길 바라니까 싸우는 거야.”

“그래도 말로 표현해야 하는 건, 말이 상대의 가슴에 가서 꽂혀야 살기 때문이네요.”

“호호, 뭐라고?”

“그 말이 오해든, 이해든, 상처든, 치유든.”

“사람은 감정을 처리하는 속도가 다 달라, 그래서 너무 간섭하거나 독촉하면 안 돼.”

“난희야, 참는 것과 이해하는 건 달라, 공감하는 것과 인정함이 다르듯이 말이야.”

“오빠, 요즘 무슨 책 읽어?”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왜?”

“호호호, 갑자기 왜 이렇게 말발이 세졌나 해서.”

“나 배고픈데, 저녁 먹으러 가자.”

“안돼, 나 지금 빨리 집에 가야 해.”

“그럼 가자, 바래다줄게.”

“아냐, 여기서 그냥 헤어져, 그 시간에 가서 밥 먹고 공부해. 오늘 축제에 오느라 공부 못했잖아.”

정난희는 버스정류소까지만이라도 바래다주겠다는 문승협의 청마저 거절했다. 2주 뒤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가로등밑에서 빠져나갔다. 보이지 않는 초미립암흑물질로 구성된 어둠이 정난희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어둠에 덮인 세상은 태양과 빛을 반사할 뿐이어서 스스로를 밝히기 위해 부단히 움직였다. 정난희도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을 가르며 자기 갈길을 재촉하였다.

문승협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정난희에게 섭섭했다. 어둠 속에서 간간히 빛내는 정난희손에 들린 꽃다발이 위로하였다. 꽃다발이 마치 자기 자신 같았다. 어딘가에 버려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샀지만 정난희에게 의미 있는 꽃다발로 소중히 여겨지길 기대했었다. 공부나 하라던 정난희말이 떠올라 오기심에 독서실로 향하였다. 독하게 마음먹고 저녁도 거른 채 책을 폈다. 자꾸 떠오르는 정난희얼굴이 공부를 방해했다. 옆책상에 있는 마이마이카세트를 보고 가방에서 워크맨을 꺼냈다. 지난주 이담이 들어보라며 빌려준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발라드풍 최신곡들이 녹음되어 있었다.


소니워크맨 이후 삼성이 작년에 출시한 마이마이카세트가 선풍적 인기였다. 일상생활에서 부쩍 눈에 많이 띄었다. 종종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듣다가 선생에게 압수되기도 하였다. 부유한 가정이 아니면 언감생심이었기에 등하굣길에서 뺏기거나 도난사고로 소란이 일었다. 일부학생들은 부러워한 나머지 소형라디오에 이어폰을 꽂아 라디오를 청취하며 대리만족했다.


‘전영록의 종이학’에 이어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가 문승협귓속에서 울렸다.

‘하늘에 구름 떠가네 보라색 그 향기도, 이 몸이 하늘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곁에 사랑도 가네 빨간 입맞춤도, 시간이 멈춰지면 얼마나 좋을까. 비 맞은 태양도 목마른 저 달도 내일의 문 앞에 서있네. 아무런 미련 없이 그대 행복 위해 돌아설까나.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가뜩이나 정난희생각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데, 노래가사가 그리움을 더욱 자극하였다. 독서실비가 아까웠으나 책을 덮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고드는 정난희에게서 벗어나려고 가방을 챙겨 독서실을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거리의 전파사에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를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별한 것도 아닌데 가슴을 헤집는 가사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까 전 학교옆골목에서 정난희에게 서운했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10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와서 그런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리마다 계속되었다. 정난희그림자도 하염없이 따라왔다. 초인종을 누르면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다음날 시립도서관에서 만난 장기원이 목화여고축제를 꺼내며 정난희무용공연을 언급하였다. 천영기와 이담이 문승협을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에 ‘너도 갔지? 공연은 어땠냐? 재미있는 일은 없었냐?’는 질문이 담겨있었다. 문승협은 돌이켜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였다.

월요일 등교해서도 김부일에게 정난희의 무용공연뒷이야기를 또 들었다.

“니 정난희랑 뭔 일 있냐?”

“아니, 없는데?”

“정이가 느그 둘이 좀 이상하다믄서 군시렁 대드라.”

“채정이가?”

“잉, 느그 사이가 안 좋은 갑다고 걱정하던디?”

“아니야, 우리 사이좋다니까?”

“아니믄 아니제 무담시 성질이냐.”

“아, 미안. 참, 정이는 갔어?”

“잉 갔어, 니는 뭐 했는디 어제 나오란께 안 나왔냐?”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잘 갔지?”

“잘은 갔는디, 쪼까 신경쓰이드라. 니를 못 만나고 가서 그란가, 아쉬워하는 눈치였어.”

김부일이 어제 아침 채정이를 배웅하러 가자며 문승협에게 전화했었다. 문승협은 편치 않은 심경에 대충 둘러댔다. 학교생활에서 친구들 문제로 긴장의 연속인 데다, 모처럼 정난희와 만나 축제를 즐길 마음으로 갔다가 기대와 다른 결과에 속상하여 생각이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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