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13)
보수신문을 대표하는 조선일보에 양주동박사의 사망기사가 실렸다. 인간국보 제1호를 자처했던 국문학자 양주동박사가 걸출한 학문과 재주, 익살과 술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고달픈 삶을 마감하였다. 영문학자이기도한 그는 시인이자 평론가였고 수필가이자 재담가였다. 평생을 구두 한벌과 허름한 옷으로 만족한 구두쇠였다. 민족적 자각에서 어문학연구의 길로 들어선 이래, 향가연구에 빼어난 업적을 남긴 불세출의 학자며 기인이었다.
문희숙과 이민현이 상견례를 하고 1년 후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문희숙이 신부수업과 취미생활을 겸해 꽃꽂이와 서예를 배우려고 하였다. 때마침 서예학원에서 서예문화저변확대를 위하여 한 명 비용에 두 명이 배울 수 있는 특별행사를 했다. 문승협은 중학교입시준비 때문에 태권도를 중단하였으나, 큰고모 문희숙의 강권으로 뜬금없이 서예를 배우게 되었다. 작은 고모 문희경은 결국 대입본고사를 치르지 못하고 대학 가는 것을 포기했다. 고등학교졸업식도 전에 태선화학주식회사에 입사해 출근하였다.
개학날 등굣길 학생들 발걸음은 언제나 그렇듯 천근만근 무거웠다. 기나긴 겨울방학이었음에도 벌써 끝났다는 아쉬움에 표정 또한 어두웠다. 문승협만 최선경을 만난다는 들뜬 마음에 표정도 발걸음도 가벼웠다.
문승협이 쉬는 시간에 아무 용무 없이 아래층 6반 교실을 지나가며 힐끗 보았다. 밝은 얼굴로 친구들과 대화하는 최선경모습을 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개학첫날은 오전수업만 하고 일찍 끝났다. 문승협은 놀자는 김철종유혹을 뿌리치며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최선경을 만나려고 집으로 가는 길 골목에서 기다렸다. 30여분 후 최선경이 제갈민주와 지나갔다. 문승협은 차마 부르지 못했다. 그렇게 지나쳐가던 최선경이 골목으로 불쑥 들어왔다.
“앗, 깜짝이야.”
“뭘 그리 놀라시나, 문승협씨.”
“어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승협씨, 놀란 모습이 귀엽네요.”
“존댓말 하지 마, 나 혼내거나 화났을 때 존댓말해서 무서워.”
“나 화 안 났는데요.”
“그럼 왜 그러는데?”
“혼낼 일은 있은께 그라지라.”
“혼낼 일?”
“오호라, 혼날 일이 뭔지 모른다는 반문이렸다. 매를 버시는 구만.”
“알았어. 혼내더라도, 저기 들어가서 혼내. 너 많이 추워 보여.”
쌀쌀한 날씨에 최선경입술이 파르스름했다. 문승협이 가까운 오뎅집으로 데려갔다. 따끈한 오뎅국물을 떠 담아 오뎅을 하나 놔주고, 자기도 오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외갓집 갔었다며?”
“어떻게 알았어?”
“바로 그 어떻게 알게 한 것이 혼날 일이야.”
“아, 미안.”
“미안하긴 해? 왜 미안한데?”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못했고, 그래서 미안해.”
“뭐야, 내가 뭐라 할 줄 알고 미리 연습했어?”
“아니야. 외갓집에 있을 때, 너 생각나서 전화하려다가, 너도 나처럼 궁금하겠구나 했지.”
“그래도 내 생각은 났구나. 근데, 왜 전화 안 했어?”
“할 수가 없었어. 거기는 지금 신 전화선을 놓고 있대, 옛날 전화선은 떼어가고.”
“그렇다면 가기 전에라도 전화하지 그랬어, 얼마나 궁금했는데.”
“막내이모가 예정보다 일찍 와서 데려갔어, 갑자기 가는 바람에 전화할 경황이 없었어.”
“이런, 분명 죄는 있으나 벌을 줄 수가 없네?”
“참, 너 생일하고 내 음력생일이 같아. 엄마가 그러는데, 내 음력생일이 11월 19일이래, 신기하지?”
“아 진짜? 그럼 천생연분인가?”
최선경은 무의식 중에 천생연분이란 말이 튀어나와 바로 수습하려 했으나, 더 쑥스러워하는 문승협을 보고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오뎅집 아주머니가 피식 웃어 조금 창피하였다.
“아줌마, 웃자고 한 농담이에요, 호호호.”
“호호호, 내가 보기엔 진심인 거 같은디?”
“아녜요, 진짜 농담이라니까요. 여자가 자존심이 있지, 어찌 그런 말을 해요.”
“얼굴이 빨개졌그만 그라네, 얼굴이 빨개졌으믄 진심이어. 여자가 그런 말 하믄 으짠단가, 괜찬해.”
“아주머니 얼마예요?”
문승협이 당황해하는 최선경을 구해주려는 마음에 서둘러 오뎅값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왔다.
“선경아, 아까 내가 너 기다리는 건 어떻게 알았어?”
“민주가 갑자기 혼자 간다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네가 골목에서 기다린다더라.”
“아, 제갈민주가 나를 봤구나.”
“바보같이, 그냥 부르지 그랬어.”
“민주랑 같이 가서 그랬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럴걸 그랬다.”
“방학 동안 연락도 없고 그래서, 나 삐졌어. 각오해, 당분간 괴롭힐 거야.”
“넌 내가 궁금해?”
“넌 내가 안 궁금해?”
“아, 어떻게 해야 이 죄를 씻을까.”
“그럼, 일기 쓴 거라도 보여주든가.”
“하하,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 잘 쓰고 있어.”
“호호, 나도.”
문승협은 엄마도 가져주지 않은 관심을 최선경에게 받아 생경했다. 좋으면서 부담스러운 미묘한 감정이었다.
“내일인가 모레인가, 6학년 반편성 발표한대.”
“우리는 같은 반은 안 되겠지만, 좋은 담임이었으면 좋겠다.
6학년은 남중여중으로 갈라지는 중학교를 대비해 남녀 따로 반편성하였다.
문승협이 6학년 3반, 최선경은 6학년 8반이 되었다. 반배정다음날 선배들의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졸업식 노래’를 후배들의 1절에 이어 선배들이 2절을 불렀고, 마지막 3절을 선후배가 합창했다. 감정이 격해져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후배들이 선배들을 배웅하려고 강당 앞에 두 줄로 도열하였다. 선배 남강과 박현이 문승협에게 다가가 또 보자는 짧은 인사와 악수를 했다.
졸업식이 끝난 교정에는 졸업기념사진을 찍는 학생과 부모들로 넘쳤다. 졸업생들이 밀가루를 들고 쫓고 쫓기거나 뒤집어쓴 채 뛰어다녔다.
봄방학이 시작되고 설날이 다가왔다. 부모 없이 보내야 하는 문승협에게는 예년과 다를 바 없는 침통과 고단함이 반복된 설날이었다. 할머니에게 환영받으며 부모와 다녀간 사촌동생들이 부럽고, 집에서나 진외가와 종갓집에서까지 엄마아빠를 흉보는 할머니행태는 변함없었다. 그로 인한 측은지심으로 쳐다보는 친인척들의 이상한 눈빛도 여전하였다. 다른 점이라면 예비 큰 고모부 이민현이 다녀갔다. 친인척들을 오랜만에 만나는 기쁨에 행복한 명절이어야 하건만, 문승협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행사이며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감기몸살이었다. 그저 용돈 정도만 충전될 뿐 말 그대로 마음에 상처뿐인 민족 대명절 설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방송부학생들은 봄방학기간에도 매일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방송부를 처음 도입했기에 방송기기작동법과 방송기술을 습득하고 방송부개국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오성희선생이 방송부지도선생으로 임명된 것은 문승협과 최선경에게 기쁨이었다.
오성희선생이 방송부장 이정주를 통하여 방송부 첫 모임을 고지했다. 새롭게 설치한 교무실 옆 방송실에 문승협과 최선경, 차여선과 김진철까지 방송부총원 다섯 명이 모였다. 오성희선생안내로 유리벽안 실내스튜디오와 방송장비를 둘러보고 회의탁자에 마주 앉았다. 오성희선생이 방송설비 구입과 설치가 계획보다 3개월 정도 늦어져 방송개국도 순연된다고 하였다. 봄방학동안 방송프로그램편성확정과 방송장비숙련에 최대한 집중해서 신학기개학과 동시에 열리는 방송개국행사가 차질 없도록 하자며 당부했다. 회의를 통해 방송프로그램을 정하기로 하고, PD와 아나운서 그리고 방송작가와 방송설비로 업무를 나눴다. 만일을 대비해 분장된 업무를 복수로 담당하게 하였다. PD는 방송부장 이정주가 Main을, 방송부차장 최선경이 Sub를 맡았다. 아나운서는 문승협과 최선경이 Main을, 김진철과 차여선이 Sub를 담당했다. 방송설비는 김진철이 Main을, 이정주와 문승협이 Sub를 전담하였다. 작가와 취재는 방송부원전원이 책임지기로 했다.
“선생님, 제안이 있습니다.”
“그래, 뭔데?”
“저희들부터 중학교입시가 없어지고 추점제로 변경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만약 그대로 입시가 있으면, 저희들이 방송부를 1학기만 맡게 되잖습니까?”
“그렇지, 짧으면 6개월이고 길면 1년이지.”
“그래서, 향후 방송부인계를 대비하고, 당장은 취재기자와 작가 그리고 방송설비기술요원으로 활동할 5학년 방송부원들을 추가모집했으면 합니다.”
“음, 일리 있는 말이구나. 인원에 관한 문제니까, 교무회의에서 의논해 볼게.”
“하나 더 있는데요.”
“응.”
“가능하다면, 다른 학교 방송부는 어떻게 운영되는지, 견학하면 어떨까 해서요.”
“아, 그건 내가 교무회의에서 이미 말해놨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이어 방송프로그램 구성과 내용을 토론하였다. 정규방송은 아침방송과 점심방송으로 하루 두 번 편성하고 교내방송제목을 ‘우리들 세상’으로 임시 정했다.
다음날 방송부모임에서는 축사와 포부, 축하공연 등 개국방송행사내용을 확정 지었다. 방송설비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시험방송을 통해 방송연습을 하였다. 큐사인과 마이크를 주도하려고 옥신각신 장난치기도 했다. 오성희선생이 써온 시나리오를 읽는 연습으로 마무리하였다.
이튿날 오성희선생인솔로 방송부가 있는 광주학교에 견학을 다녀왔다.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었으나, 최선경은 견학을 다녀오는 내내 속상했다. 오가는 과정에서 차여선과 문승협이 최선경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속으로 삭일뿐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견학을 다녀온 후에도 차여선에게 시나리오 읽는 연습을 도와주는 문승협을 보고 폭발일보직전이었다. 이 또한 참고 넘겼다.
문승협은 다정하기만 하던 최선경태도가 쌀쌀맞게 바뀐 자초지종을 몰라 억울했으나 감내하였다.
마음에 담아둔 최선경의 화는 애먼 곳에서 터졌다. 최선경이 이른 시간 방송실에 들어섰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회의탁자 위에 책 한 권과 문승협의 책가방이 놓여있었다. 책을 보니 황순원의 소설 ‘별’이었다. 문승협에게 읽으라며 줬던 책이라 무심코 들춰보았다. 책사이에 끼워져 있는 편지를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승협님, 이거 뭐예요?”
“선경님이 읽으라고 주신 책이잖아요.”
문승협이 개국방송연습을 위해 일찍 왔었다.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내다 화장실이 급해 얼결에 책을 꺼내놓고 다녀왔다. 책을 들고 싸늘한 표정으로 묻는 최선경에게 존댓말로 답했다. 불길함에 지레 겁먹어서였다.
“아니요, 여기 끼워져 있는, 이 편지 말이에요.”
“아, 그 그건, 광주에 아는 누나가 보낸 편진데?”
“내가 알기로는, 서울에 사는 큰 이모딸 말고 누나가 없는 거로 압니다만.”
“아, 할아버지 도안광산 비서였어. 지난여름에 갔었잖아, 그때 처음 봤어.”
“이 아가씨는 몇 살인가요, 이자연?”
“나보다 많아, 대학생이야. 이번에 대학생 됐대, 전남대음악과. 편지 봐도 돼, 진짜야.”
이자연이 첫 번째 보내온 편지에는 오해할만한 내용이 있었지만, 이번 편지는 전남대학교음악과에 입학했다는 내용정도였기에 내심 안심하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봉투글씨가 낯익네요? 지난여름방학 곤충채집통에 쓰인 글씨가 여자글씨였는데, 동일인물인가 봐요?”
“응? 마 맞아요.”
문승협은 여름방학숙제를 냈을 때 했던 최선경말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소위 말하는 여자의 촉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지난여름 왜 이자연의 이야기를 숨겼스까?”
“그 그게.”
문승협이 선뜻 답변을 못하고 우물쭈물 댔다. 최선경은 기회다 싶었는지 아니면 마음을 비우고 싶었는지, 광주학교로 견학 갈 때부터 불편했던 속마음을 이야기하였다.
차여선이 광주로 가는 버스에서 문승협 옆에 앉아 시시덕거렸고,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문승협어깨에 기대어 졸았으며, 그 와중에 문승협은 차여선에게 빠져서 최선경에게는 시선 한번 안 줬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먼저 버스에 올라 창가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 차여선이 와서 앉았다는 변명은 하지도마라며 문승협을 째려보았다. 오성희선생옆에 앉아 오가면서, 자꾸 신경 쓰여 차창유리를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고 하였다. 거기에다 견학을 다녀와서는 표준말로 시나리오연습한다며, 차여선과 둘이 마주 보면서 꿀 떨어지는 눈빛이라니, 아예 입을 맞추지 그랬냐며 문승협을 야단쳤다. 아무 감정 없이 대하는 문승협마음은 충분히 알지만, 최선경을 의식해 과도하게 표현하는 차여선행동 때문에 문승협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된다고도 하였다.
문승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처음 보는 최선경모습에 당혹스러우면서도, 최선경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가을운동회 때 김철종과 최선경이 말했던 ‘처신 잘해라’는 뜻을 확실히 이해하였다. 문제는 최선경에게 무슨 말로 어떻게 대처할지 난감했다.
최선경도 생각이상으로 자기감정에 몰입한 자신이 놀라웠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는 말이 기억났다. ‘질투는 사랑에 꼭 필요한 짐이 아닐까’라며 자신의 행위를 능동화시켰다. 속마음을 털어놨음에도 후련함보다는 어색함이 몰려들었다.
문승협은 둘 곳 잃은 최선경시선을 보면서 ‘인간에게는 모든 게 처음인 순간이 있기에 서툰 게 당연하다, 삶도 사랑도 그 흔한 우정까지도’라는 글이 떠올랐다.
“선경아, 인간에게 처음인 순간이 있어서 서툰 게 당연하대, 너도 나도 처음이잖아.”
“그래 맞아, 서툰 게 당연하지. 그런데,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서운해하는 시간을 방치하지 마. 행복해야 할 시간을 불행으로 채우는 실수야.”
“그래 알았어, 실수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그리고, 처음인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마, 인생 대부분이 처음이라더라.”
“알겠습니다, 이제 기분 푸세요.”
“책은 다 읽었지, 가져간다?”
“응, 그래”
최선경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책을 핑계 삼았다. 방금 전 문승협에게 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았다. ‘이건 집착이 아닌지, 심하면 의부증? 푸하하’라고 속으로 웃으며 자문자답했다. 점점 더 변해가는 자신의 감정을 느꼈다.
문승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는 최선경을 바라보았다. 이상적인 화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문제로 무엇이 잘못되어 그랬는지, 서로 마음을 확인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오전 내내 방송실이 조용했다. 문승협과 최선경에게 전염된 탓에 다들 눈치 보았다. 그러나 점심을 먹으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최선경이 차여선과 문승협에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허물없이 대하였다. 문승협은 대범한 최선경에게 또 하나 배웠다. 그 덕에 오후에 학교를 나설 때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승협은 집에 도착하여 대문편지함에 꽂혀있는 우편물을 꺼냈다. 처음 보는 항공우편이 있었다. 지난여름방학 외항선에서 만났던 중국인선원 진춘이 보낸 편지였다.
안부인사와 하얀 고무신을 신은 귀여운 문승협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는 서두로 시작했다. 진춘은 지금 편지를 쓰는 인도를 마지막여정으로 상해에 입항한다고 하였다. 당초 계획대로 오대양육대주를 거친 긴 항해생활에 종지부 찍고, 본래 가업을 이어받아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새로운 미래사업에 도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문승협은 진춘의 편지를 편지보관상자에 넣었다. 이자연의 편지도 상자에 보관했어야 했는데, 다급히 부르는 할머니 때문에 책에 끼워놨다가 최선경에게 들켜 곤란을 겪었다며 후회하였다. 한글로 답장해도 된다는 진춘의 말이 떠올랐다. 해외펜팔을 위해서라도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이자연에게 답장을 쓴 다음, 남은 편지지에 진춘에게도 답장을 써 내려갔다.
우리가 만난 지 반년이 지나 받은 진춘형의 편지에 감격하였으며, 배에서 선물로 준 미국산 노트와 연필도 잘 쓰고 있다. 해양대학교에 다니는 작은 외삼촌 이우철이 있는데, 나중에 선장이 되어서 전 세계를 누빌 계획이라고 하더라며 자랑했다. 계속 펜팔 하기를 희망하며, 나중에 커서 중국에 갈 테니 꼭 만나자고 하였다. 긴 겨울이 지나고 곧 내게 ‘춘, 春, spring, 봄’이 온다는 글로 마무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