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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Sep 19. 2024

단테의 별 - 1권 1부 27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12)

새벽녘에 문현아가 오줌을 지렸다. 외할머니 윤주순이 속옷을 갈아입히고 이불 위에 수건을 깔아줬다. 그제 새벽에는 쉬 마렵다고 오빠를 깨웠다가 외할머니 도움으로 오강을 이용했으나, 이번에는 깊은 잠이 들어서인지, 진짜 불장난한 속설 때문인지 소변을 가리지 못하였다.

문승협이 아침에 키를 씌워 소금을 얻어오라고 장난쳐 문현아를 울렸다. 사실은 또 이불에 오줌 싸지 않게 하려는 장난을 빙자한 질책이었다. 마당 빨랫줄에 널려있는 이불을 보니 외할머니와 행랑어멈에게 미안해서였다. 행랑어멈이 괜찮다며 겨우 달래어 문현아를 다시 목욕시켰다.

이우철이 점심 지나 소 풀 뜯기러 가려고 조카들과 집을 나섰다. 가는 동안 문현아를 소등에 태워주려 했지만 무섭고 싫다며 실랑이하였다. 행랑아범이 지게를 지고 옆을 지나갔다.

“오늘이나 낼 눈 올 거 같은께, 땔감나무좀 해오께.”

“얼로 가요?”

“쩌그 거시기, 앞산에 갈라고. 얼로 간가?”

“우리는 듬봉너머 언덕으로 갈라고라.”

“소 깔도 많이 해오소. 승협도련님허고 현아아씨도, 망태에다 가득해오쑈잉.”

“하하하, 아저씨, 조심이 다녀오세요.”

발채를 묶어서 지고 가는 이우철지게에 낫과 망태가 담겨있었다. 이우철이 왼손에 지겟작대기를 들고 오른손으로 소 줄을 잡았다. 문승협은 문현아손을 잡고 쫄랑쫄랑 따라갔다.

이우철은 저수지너머 언덕에 소를 풀어놓았다. 낫으로 풀을 베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듬성듬성 모아둔 풀무덤이 꽤 많아졌다. 잠시 쉬면서 봄을 기다리는 버들가지를 꺾어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호기심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조카들에게 버들피리를 하나씩 만들어 주었다. 문승협남매는 버들비리시연에 몰입하였다. 외삼촌을 따라 하던 문승협이 두어 번 시도 만에 성공해 동요‘섬집아기’를 그럴싸하게 연주했다. 문현아는 잘 안되어 가리켜달라고 문승협에게 졸랐다. 그러는 사이에 이우철이 풀무덤을 가져다 지겟작대기로 세운 지게발채에 담아 놓고 산등성이까지 올라간 소를 끌어왔다. 적당히 풀을 담은 가벼운 망태를 문승협에게 메게 하고 집으로 향하였다. 문현아는 가는 동안에도 버들피리불기에 계속 실패했다. 집에 다다라 피식 소리만 나던 버들피리에서 삐 소리가 나니 엄청 좋아하였다.

먼저 와있던 행랑아범이 문승협의 망태기를 받으며 과장하여 칭찬했다.

“와따메, 승협이가 소깔을 무자게 했다잉.”

“하하, 네. 어? 저건 뭐예요?”

“잉, 저거는 내가 해 온 땔감이제.”

문승협이 우쭐대다 집채만 한 나무무더기 앞에 세워진 지게에 사람키 세배정도 높이로 쌓여있는 땔감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이요? 에이 거짓말. 저 지게를 새끼줄로 묶은 것도 어려워 보이지만, 메는 것은 불가능한데요?”

“그라믄, 내가 저 지게를 다시 메믄 믿어줄 테여?”

“네.”

“좋았어, 잘 봐라잉. 읏짜.”

“우아, 정말 대단하시다.”

행랑아범이 등태에 등을 대고 밀삐를 어깨에 걸었다. 오른손에 지겟작대기를 잡고 왼손으로 무릎을 짚어 힘쓰더니 단번에 일어났다. 불신에 가득 찼던 문승협은 탄성을 지르며 경이로워하였다.

“여그는 삼촌이랑 아저씨가 정리할 텐께, 느그는 씻고 들어가그라..”

“언능 방에 가봐, 오늘 맛난 거 해준다드라.”

“네, 삼촌이랑 아저씨도 빨리 오세요.”

문승협남매가 씻고 방으로 들어갔다. 외할머니와 행랑어멈이 반죽덩어리를 주먹크기만큼 떼어 밀가루를 바른 둥그런 빨래방망이로 눌러 폈다. 다시 돌돌 말아 칼로 썰어 탈탈 터니 칼국수가 되었다.

“오늘 소깔한다고 수고했은께, 우리 손주들 많이 묵어라잉.”

“외할머니, 소깔이 뭐예요?”

“소가 먹는 풀, 소밥, 소여물이어.”

“오늘 승협이가 소여물을 많이 해왔은께, 칼국수 많이 묵어야겄다.”

“아니에요, 저보다도 아저씨를 많이 주세요.”

“호호, 아저씨가 해온 땔감나무 보고 놀랐냐?”

“네 아줌마. 와, 그 지게를 어떻게, 정말 놀랐어요.”

“밥 묵고 맨날 한일이 그건디 뭐, 호호호.”


다음날 오전 문승협남매가 집안일 돕기 방학숙제로 오리와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점심 먹은 후 책 읽기와 방학숙제를 하려고 책가방을 챙겨 다락에 올라갔다. 썰렁한 냉기가 돌아 내려갈까 말까 망설였다. 외할머니가 올라와 구석에 있는 멍석을 깐 뒤 가져온 신앙촌담요를 펴주고 내려갔다. 멍석 위에 올라가 담요를 덮자 차츰 온기가 돌았다. 외할머니가 숯불이 담긴 동그란 화로를 들고 다시 올라왔다.

“춥지야, 안 춥냐?”

“괜찮아요, 있을만해요.”

“여그다 놔둘 텐께, 건들지 말고 가만 둬라잉. 불나믄 큰일 난께, 알았쟈?”

“네.”

“그라고, 이 짱돌도 만지믄 큰일 난다잉.”

“네.”

외할머니가 불고무래로 화로를 편편하게 하여 부젓가락으로 불돌을 덮었다. 행랑어멈이 주전자와 삼발이를 들고 올라와 덮어놓은 불돌을 다시 가장자리로 옮겨 정렬했다. 가져온 삼발이를 가운데 놓고 주전자를 올렸다. 외할머니와 행랑어멈이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해졌다. 화로열기와 주전자에서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가 다락에 퍼졌다.

방학숙제가 끝나갈 무렵, 행랑어멈이 부등가리에 새 숯불을 담아왔다. 꺼져가는 숯과 타고 남은 재를 들어내고 부등가리에 담긴 새 숯불을 화로로 옮겼다. 외할머니가 안대청마루 저장고에서 고구마와 옥수수를 소쿠리에 담아왔다. 화로가운데 숯불에 고구마를 놓고 가장자리 불돌 위에 옥수수를 올렸다. 문승협이 마무리하던 방학숙제를 멈추고 구경하였다. 꾸벅꾸벅 졸던 문현아도 화로 앞으로 다가앉았다.

“외할머니, 뭐예요?”

“잉, 찰옥시시 하고, 밤고구마여.”

“숙제는 안 하고 계속 졸기만 하더니, 먹을 거 오니까 잠이 깨냐?”

“피, 이제부터 하면 되지 뭐.”

“자, 묵어봐. 뜨건께 조심해.”

“앗 뜨거.”

외할머니가 입으로 불어 충분히 식혀줬음에도 구워진 찰옥수수는 뜨거웠다. 문승협이 베어 물다 입술이 델뻔했으며 참을성 없는 문현아도 마찬가지였다.

“와, 쫀득쫀득하고 달아요.”

“외할머니, 맛있어요.”

“잉, 천천히 많이 묵어.”

문승협은 입가에 검댕이를 묻힌 동생을 닦아주며 먹었다. 문현아는 먹느라 바빠서 턱에 검댕이 묻은 오빠를 모른 체했다. 찰옥수수 한 개를 다 먹어갈 즈음, 윤주순이 밤고구마를 젓가락으로 하나씩 찔러보고 뒤집었다. 잠시 뒤 다시 찔러보고 고구마를 소쿠리에 들어냈다. 문승협은 외할머니가 구워서 까준 밤고구마를 그냥도 먹고 김치를 얻어서도 먹었다. 동치미랑도 먹으면서 최선경이 읽으라고 준 책 ‘황순원의 별’을 읽었다.

불현듯 소설책에 등장하는 동생과 자기 자신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이는 엄마와 비슷하다는 느낌이었다. 이 소설책을 권한 최선경마음은 알았으나, 엄마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엄마가 미운 자기 마음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마실을 다녀온 이우철과 행랑아범도 다락으로 올라와 동참하였다. 찰옥수수와 밤고구마를 더 가져와 구워 먹고 화로도 다락도 말끔히 정리해 줬다.

밤이 깊어진 만큼 내린 눈도 깊어졌다. 이대로 쌓이면 세상이 덮일 만큼 많이 내렸다.


이우철이 늦잠 자는 조카들을 깨워 눈썰매 타러 가자고 하였다. 문승협남매는 빨리 놀고픈 욕심에 밥을 된장국에 말아 후딱 먹어치웠다. 털모자와 장갑으로 중무장하고 비료포대를 하나씩 챙겨 저수지언덕으로 향했다.

이미 동네아이들이 점령하여 놀고 있었다. 비료포대를 이용하거나 스키처럼 만든 대나무를 탔다. 문승협남매가 순서에 맞춰 타려고 줄 섰으나 동네아이들에게는 순서가 없었다. 위에서 타고 내려가는 아이와 중간에서 끼어들어 타는 아이가 부딪쳐 넘어지기도 하였다. 문승협 등을 툭 치고 지나가며 텃세 부리는 아이도 있었다. 계속 끼어들어 타는 동네아이들 때문에 조카들이 좀처럼 엄두를 못 내자, 이우철이 나서 순서대로 타라고 한마디 했다. 동네아이들이 입을 실룩거리며 째려보았으나, 그중 단단해 보이는 한 아이가 한마디 보태어 상황을 정리하였다.

“아야 느그들, 탈라믄 이 짝으로 올라와서, 여그서부터 타고 내려가.”

그 아이가 올라오는 방향과 타고 내려가는 출발지점만 정해줬을 뿐인데, 동네아이들이 군말 없이 따라 바로 질서가 잡혔다. 문승협은 한 시골마을 작은 저수지언덕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고, 세상 어디든 힘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깨우쳤다. 그 힘이 주먹이든, 돈이든, 백이든. 그러나 아무리 질서가 목적이라도 그런 힘에 의한 강요가 억압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법과 자율이 중요하며, 적어도 사회에서 발휘되는 힘은 정의로운 법으로 공인되어야 한다’는 전교회장선거 때 엄정한선생말이 떠올랐다.

비로소 문승협남매가 썰매를 타려 하였다. 단단해 보이는 아이가 이우철에게 말을 걸며 문승협을 가리켰다.

“성, 누구다우?”

“잉, 내 조카여.”

“몇 학년인디라우?”

“인자 6학년 올라가제, 너는아?”

“나도 6학년 올라간디.”

“승협아, 잠깐 이리 와 봐. 야도 6학년 이라냐, 둘이 친구 해라.”

“어? 나 너 알아.”

“옥동국민학교, 이름이 재규던가?”

“음마, 으째 아냐?”

“3학년 땐가 왔을 때, 너네 집에서 잠잔 적도 있어.”

“아, 그 서울놈? 맞제?”

“응, 오랜만이다.”

“하도 오래돼갖고 몰라보겄다야.”

외할머니집과 골목길을 사이에 둔 건너편집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다. 문승협이 3년 전 추억 속 친구를 기억해 낸 것이 동네아이들의 경계심과 거부감을 무너뜨렸다. 어느새 서로 동화되어 썰매를 탔다. 문현아는 동네아이들과 노느라 동생을 망각한 오빠가 못마땅했다. 이우철이 눈앞에 오빠를 두고도 오빠를 잃은 문현아눈치를 알아채고 전담하여 눈썰매를 태웠다. 문승협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엉덩이와 바짓가랑이에 장갑까지 축축이 젖을 정도로 동네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았다. 조금 지칠 즈음 낯익은 실루엣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승협아! 현아야!”

“엄마? 엄마, 엄마아.”

문승협은 비료포대를 팽개치고 뛰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또 뛰어가 엄마품에 안겨 눈물부터 쏟았다. 문현아도 뒤늦게 알고 뛰어가다 미끄러졌다. 이우철이 일으켜 안고 데려갔다. 문현아가 외삼촌품을 밀고 엄마품에 안길 때까지, 문승협은 엄마를 으스러지게 꽉 껴안고 울었다. 동생에게 엄마품을 양보하고 떨어져서도 계속 울었다. 엄마품에 안긴 문현아도 울었다. 엄마 이항리도 외삼촌 이우철도 눈물을 흘렸다. 동네아이들이 무슨 일인지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지만, 문승협은 전혀 괘념치 않았다.

“오메오메 내 새끼들, 잘 있었냐.”

“엄마, 흑흑흑.”

“아들, 인자 그만 울어, 여그 엄마 왔잖애.”

“끄억끄억, 엄마, 왜 갑자기 사투리를 해?”

“호호, 고향에 왔은께 그라제.”

“누나, 지금 오는 길이오?”

“응, 집에 갔더니, 여기서 썰매 탄다 길래.”

“자, 집에 가끄나, 썰매는 나중에 또 타고.”

문현아는 엄마품에 안겨 가면서 울음을 멈췄다. 문승협은 집에 도착해서도 진정되지 않아 어깨를 들썩였다. 큰외삼촌 이우대에게 한마디 들었다.

“누가 죽었냐, 그만 울어.”

“냅두쑈, 아그들이 오랜만에 엄마본께 그라그만.”

“자식 팽개치고 간 엄마가 뭐가 좋다고.”

“우대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누나, 내가 틀린 말했소? 말이야 바른말이제.”

“그만해, 아그들이 듣고 있그만.”

“어무니, 나도 맘 상한께 한 소리요.”

“오빠, 엄니가 그만하라 하요 안.”

“으째 나만 갖고 그라냐.”

“어허이 참말로.”

외할머니 윤주순이 위엄 있게 목소리를 약간 높이자, 티격태격하던 형제자매 간 말싸움이 끝났다. 문승협은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엄마를 타박하는 큰외삼촌이 미웠다.

며칠 전 광주에 갔던 이항경이 언니 이항리와 만나서 함께 왔다. 이항경이 한 박스 사온 라면을 끓여 점심으로 먹었다. 윤주순이 저녁에는 닭백숙을 해 먹자고 하였다.

“엄마, 어떻게 온 거야?”

“어젯밤에 기차 타고, 아침에 내려서 막내이모 만나 버스 타고, 또 버스 타고 왔지.”

“아니, 그거 말고.”

“아, 우리 애기들 보고 싶어서 왔지.”

“윤아는 어디 있어, 잘 있어?”

“응, 서울 큰 이모집에.”

“왜 안 데려왔어?”

“차도 오래 타야 하고, 또 여러 번 갈아타야 하니까 힘들어서.”

“그래도 데려오지, 보고 싶은데.”

이항리는 아이들을 동생 이항경방으로 데려갔다. 함께 드러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문승협은 엄마와 동생의 대화를 듣다가 만나자마자 이별을 걱정했다. 엄마가 맡겨놓고 온 막냇동생 때문에 머지않아 곧 갈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윤주순이 찐 옥수수와 생고구마를 가져왔다. 고구마를 깎다 이항경에게 다락에서 곶감 한 줄을 끊어오라고 했다. 이항경이 곶감을 가져와 꼭지를 떼어내고 이항리에게 먹어보라며 줬다.

“엄마, 곶감이 엄청 달다. 우리 집 감이요?”

“잉.”

“뒷동산에 있는 감나무?”

“잉, 가을에 행랑아범이 따서 깎고 묶은 것이어.”

“많이 있음 갈 때 좀 싸갈까? 문서방이 좋아하는데.”

“그래라, 옥시시랑 고구마하고 싸줄 텐께, 갖고 가.”

문승협은 아빠와 싸울 때는 죽어라 싫다면서도 곶감을 좋아한다고 챙기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요?”

“아빠? 아빠도 잘 있지.”

이우철이 쪽문을 열고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행랑아범이 닭을 잡는데 구경하려면 가자고 하였다. 문승협남매가 부리나케 일어났다. 문승협이 동생신발을 챙겨주다 문틈으로 보이는 방안을 보았다. 외할머니와 엄마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으면서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귀는 방으로 쏠렸다.

“엄마, 으짜믄 좋을지 모르겄소.”

“또 뭔 일인디 그라냐, 참고 살아야제.”

“가시나한테 또 눈이 팔려갖고, 인자는 사업도 팽개쳐부렀어라우.”

“니가 봤냐?”

“일찍 올 것인디, 그거 확인하려다 오늘 온 거예요.”


문경준이 채권자들 설득에 노력하는 한편, 회사정상화를 위해 여기저기 술접대를 다니면서 술집아가씨와 염문설이 나돌았다. 못 마시는 술에 취해 외박까지 하여 이항리에게 더욱 의심받았다. 속을 끓이던 이항리가  남편의 바람피운 현장을 잡으려고 마음먹었다. 방학을 핑계로 아이들 보러 다녀오겠다며 속이고 몰래 남편을 미행하다 들켰다. 결국 문경준과 대판 싸운 뒤 예정보다 늦게 내려온 것이었다.


문승협은 막내이모가 데리러 오고, 엄마가 나중에 온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모든 게 엄마계획이라는 사실에 허탈했다. 아빠가 사업을 팽개쳤다든가 바람피운다는 말도 그렇지만,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아빠를 감시하다 늦게 왔다는 말이 더 충격이었다. 자식들 보고 싶은 마음보다 그걸 핑계로 이용했다는 엄마를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하였다. 행랑아범이 닭장에서 씨암탉을 잡으려고 사투를 벌였다. 문승협은 착잡한 심정으로 올라갔으나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행랑아범이 이리저리 잘도 피하는 닭들 중에서 잽싸게 한 마리를 잡아 이우철에게 건네고, 금세 또 두 마리를 잡아 닭장에서 나왔다. 양손에 닭을 한 마리씩 들고 우물가로 가자, 닭 한 마리를 든 이우철과 문승협남매가 쫄쫄 뒤따랐다. 행랑아범이 닭목을 비틀어 숨통을 끊고 칼로 목을 따 피를 뺐다. 옆에 서있던 행랑어멈이 닭을 넘겨받아 펄펄 끓는 솥단지에 넣었다. 그렇게 닭 세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닭 잡는 과정마다 반응하는 문현아 때문에 다들 웃었다. 행랑아범이 닭목을 비틀 땐 ‘꺅’하고 소리 지르고, 칼로 목에서 피를 뺄 땐 ‘아프겠다’며 인상 쓰고, 뜨거운 물에 넣을 땐 ‘뜨겁겠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후 닭 잡는 과정에서도 문현아반응은 계속되었다. 뜨거운 물에서 꺼내 닭 털을 뽑을 땐 ‘따갑겠다’하고, 닭 목을 칼로 칠 때는 ‘으악’하고 소리를 질러 또 한 번 웃겼다.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낼 땐 손으로 입을 막고 숨죽여 지켜보면서도, 모래주머니껍질을 벗기고 썰어서 참기름장에 찍어 ‘아’ 하니 입을 쩍 벌렸다. 문승협에게도 맛보라며 입을 벌리라고 했지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문현아의 ‘고소해, 먹어봐’라는 말에 용기 내 입에 받아 넣고 인상 쓰며 오물거렸다. 행랑어멈이 닭똥집이라며 놀렸으나, 문현아는 아랑곳없이 더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행랑아범과 이우철도 군침돌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비위가 약한 문승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행랑어멈이 손질한 닭을 부엌으로 가져가자, 문승협은 문현아와 엄마에게 갔다.

막내이모 이항경까지 합세해 세 모녀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승협남매가 들어가자 급히 화제를 돌렸다. 외할머니 윤주순이 이불을 들추며 이리 들어오라고 손짓하였다.

“엄마, 오빠 생일 땐 왜 전화 안 했어?”

“지 지난주에 엄마가 맞춰서 온다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그랬어, 미안해.”

“내 생일은 지난달 12월 11일인데?”

“아, 내 정신 좀 봐. 맞다, 음력생일이랑 헷갈렸다.”

“음력생일은 언젠데?

“11월 19일. 엄마가 깜박했어, 미안해 아들.”

“괜찮아, 이미 지나갔는데 뭐. 그런데, 내 음력생일이 11월 19일은 맞아?”

“응, 맞아, 그건 확실해.”

“으째서 너는 엄마가 돼갖고, 아그들 생일도 왔다 갔다 하냐.”

문현아가 오빠생일을 챙기지 못한 아쉬움에 뜬금없이 한 말이었다. 윤주순은 자식생일도 못 챙기는 딸에게 핀잔줬지만 딸도 손주들도 다 불쌍했다. 문승협은 생일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자신의 음력생일이 최선경생일과 같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궁금해진 최선경에게 통화라도 하고 싶었으나 당장 방법이 없었다. 최근 신식전화로 교체 중이어서 며칠 전 구식전화를 철거한 상태였다. 답답한 마음에 농촌전화보급이 늦은 이유를 더딘 새마을운동으로 탓하였다.

행랑아범이 닭백숙이 다 됐다고 알리자 모두 안채로 모여들었다. 행랑어멈이 푹 고은 닭 세 마리를 커다란 쟁반에 담아 들고 왔다. 윤주순이 닭다리를 뜯어 남자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문승협은 닭다리를 들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토종씨암탉의 쫄깃한 식감에 감탄했다. 행랑어멈이 닭죽을 쑨 솥을 가져와 큰 대접에 퍼담아 나눠줬다. 윤주순이 뜨거워서 잘 못 먹는 손주들을 보며 행랑어멈에게 바가지에 찬물을 떠 오라고 하였다. 동지팥죽 먹을 때처럼 찬물바가지에 띄운 닭죽이 담긴 그릇을 저어서 먹기 좋게 식혀줬다.

“뜨건 거 잘 묵어야 처가복 있는디, 뜨건 거 잘못 묵는 우리 승협이는 으짜스까.”

“장가 안 가고 외할머니랑 살면 되죠.”

“뭐? 호호호.”

“하하하, 호호호.”

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밤이 깊어 각자 방으로 돌아가자, 윤주순이 이부자리를 깔아 자리배정하듯 베개를 놓았다. 문승협은 배려심 깊은 외할머니에게 또 반했다. 방문으로부터 윤주순, 문승협, 이항리, 문현아 순으로 누웠다. 엄마품을 그리워하는 손주들 마음을 읽고 엄마양쪽으로 눕게 하였다. 문승협남매는 엄마를 껴안고 오랜만에 행복하게 잠들었다. 윤주순은 순탄치 않은 딸의 결혼생활과 부모사랑을 갈구하는 손주들 걱정에 잠을 설쳤다. 문승협이 새벽녘에 잠을 뒤척이는 외할머니를 보듬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외할머니내음이 좋아 더 바짝 다가가며 ‘외할머니가 우리 외할머니여서 좋아, 고마워요’라고 잠결에 속삭였다. 윤주순은 비몽사몽간에 중얼거리는 문승협을 바라보며 볼을 만지다 꼭 품었다.


이항리가 점심을 먹은 후 모처럼 친정에 왔으니 친척집에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동생 이항경과 이우철을 앞세워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햇볕에 녹은 길이 질퍽하여 걷기 불편했다. 옆동네 사는 친척들 집에 가려면 산등성이를 올랐다가 내려가야 해서 어른도 힘겨웠다. 아이들은 말할 나위 없었다.

이항리는 친척어른들에게 인사시키면서 전에 왔던 엄마의 작은집이라고 기억을 찾아내라 했지만, 문승협은 긴가 민가 어렴풋한 기억뿐이라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하였다.

문승협은 걷거나 엄마의 어떤 재촉도 견딜만했으나 힘든 건 따로 있었다. 엄마는 가는 곳마다 아빠와 할머니에 고모들까지 험담하고 신세한탄으로 동정받았다. 더욱이 그런 엄마말을 듣고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친척어른들 시선이 너무 싫고 힘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가서 쓸데없는 말 말고, 인사만 하고 와’라는 외할머니의 신신당부를 문승협도 기억하는데, 엄마는 언제 잊었는지 멈추질 않았다. 보다 못한 외삼촌과 이모가 중간중간 그만하라고 말려도 보았다. 그때마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내 입장이 되면 그런 말 못 한다. 오죽하면 이러겠냐. 서운하다’는 엄마말은 문승협을 올가미로 꽁꽁 묶어 옥죄는 느낌이었다. 하물며 이항경과와 이철우가 잔뜩 위축되어 우울해하는 조카들을 보다 못해 밖으로 데려 나와도 이항리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친척들이 칭찬하는 말마저도 문승협에게는 기쁘거나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색한 미소만 짓게 하는 굴욕감을 주었다. 문승협은 문득 엄마는 나에게 행복이자 괴로움이라는 복합된 감정을 느꼈다.

엄마의 외삼촌집에서 저녁 먹은 후 출발하였다. 빌려 든 손전등을 비춰가며 칠흑 같은 눈길을 더듬듯 걷는 밤길이 무척 고생이었다. 더욱이 어둠 속 여우 같은 동물소리는 문승협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

윤주순이 집에 도착한 손주들을 반기며 별일 없었냐고 물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항경과 이우철을 보고 짐작 간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주들이 잠들자, 윤주순이 딸 이항리를 다시 한번 타일렀다. 친척집이든 어디를 가서도 시댁이나 남편을 절대 흉보지 마라고 하였다.

“아그들이 모른 것 같아도, 다 알아들어야. 그란께, 아그들 생각해서라도 흉보고 그러지 마.”

“뭐 으짠다우, 없는 소리 한 것도 아니고. 괜찬해요, 애기들도 알건 알아야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안 하냐. 결국 돌고 돌아 다 알아야, 세상에 비밀은 없단께. 그런 말 들으믄 아그들도 맘이 안 편하고, 누워서 침 뱉는 것이어.”

“또 그 소리요, 알았소 알았어. 알았은께, 인자 그만하고 주무시쑈.”

이항리는 엄마충고를 또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들었다. 윤주순은 딸이 처한 상황과 입장도 이해하지만, 손주들이 커갈수록 받을 상처도 배가 되리라는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밤새 또 함박눈이 내렸다. 문승협이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다 별채에서 두문불출하는 작은 외삼촌을 찾아갔다. 이우철이 행랑아범과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작은 외삼촌, 뭐 해요?”

“잉, 꿩 잡을라고.”

“꿩이요?”

“꿩 잡아갖고 승협이 줄라고.”

“그건 콩이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잡아요?”

“다 방법이 있제, 인자 거의 다 됐어.”

이우철이 송곳으로 콩에 구멍을 내면, 행랑아범이 구멍에 하얀색가루를 넣고 촛농으로 메웠다.

“하얀색가루는 뭐예요?”

“싸이나여, 청산가리. 사람도 묵으믄 죽은께, 절대 손대지 마라잉.”

“독약이네요, 그걸로 어떻게 잡아요?”

“이러코롬 만들어갖고, 눈 온 다음날 꿩이 다니는 밭두렁 같은데 뿌려놓으믄 돼야.”

“그러면 꿩이 그걸 먹고 죽는구나.”

“그라제, 다음날에 가 갖고 싹 집어 오믄돼제.”

정오가 지나 햇볕이 났다. 이우철과 행랑아범이 따라가겠다는 문승협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행랑어멈도 빨래바구니를 이고 나왔다.

“어디 가시오?”

“꿩 잡을라고 약 놓으러. 이녁은 어디 간가?”

“빨래가요.”

“으째 집에서 안 하고.”

“옷을 삶았는디, 펌프가 얼었는가 물이 안 나와라.”

“뜨건 물 좀 찌크러보제.”

“해봤는디 안됩디다.”

“그라믄 찬물에 고생하소.”

“갔다 오께라, 손 얼지 않게 조심하쑈.”

“호호, 일 없어라우. 승협이도 조심히 갔다 와라잉.”

“네, 다녀오세요.”

문승협은 얼핏 본 빨래바구니에 동생과 자기 옷이 있어 미안했다. 멀리 보이는 마을공동우물빨래터에 아주머니들이 많이 나와있었다.

이우철과 행랑아범이 문승협손을 한쪽씩 나눠 잡고, 집 뒤 눈 덮인 밭두렁을 지나 산자락까지 올라갔다. 햇볕이 잘 들어 눈이 녹아 꿩이 잘 다니는 곳에 약을 뿌렸다. 겨우 한 시간여 돌아다녔음에도 마을어귀에 다시 내려왔을 때는 신발과 바짓가랑이가 눈에 흠뻑 젖어 발이 시렸다.

“낼 점심 전에 와보믄 되겄지라?”

“쫌 이른디, 점심 먹고 한 3시쯤 오세.”

다음날 이우철과 행랑아범이 집에 들어올 때는 깃털이 풍성한 꿩 두 마리가 든 망태를 메고 들어왔다. 긴 꼬리털을 뽑아낸 다음은 닭 잡는 과정과 같았으나, 내장은 빼내자마자 불에 넣어 태워버렸다.

“왜 불에 넣어요, 꿩내장은 먹을 게 없어요?”

“저것은 먹으믄 큰일 나.”

“아, 콩에 약 넣어서 그렇구나.”

“잉 맞어. 깜박하고 놔뒀다가, 고양이나 개들이 먹고 죽은 경우가 허다해.”

“쩌그 건넛마을 덕길네는, 오리랑 닭이랑 한 여나무 마리 죽어갖고 난리 났제.”

문승협이 저녁에 먹은 꿩볶음탕은 닭볶음탕에 비해 육질이 조금 질겼다. 그러나 이우철이 꿩의 짧은 꼬리깃털에 펜촉을 묶어 문승협에게 준 전리품은 최고였다. 긴 꼬리깃털은 공작만큼은 아니어도 그동안 본 꼬리깃털 중에 제일 예뻤다.

문승협은 다음날 이우철에게 펜글씨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하루 종일 꼬리깃털 펜촉에 잉크를 찍어 연습했다. 끝날 즈음엔 오른손이 잉크범벅이었다.

이항리가 손을 씻는 문승협에게 다가갔다.

“아들, 엄마 모레 서울 가야 해.”

“벌써?”

“윤아도 걱정되고, 너희도 곧 개학하잖아.”

“우리는?”

“엄마 갈 때 같이 갈 거야.”

문승협은 엄마랑 곧 헤어져야 한다는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동안 망각했던 불안감이 다시 몰려왔다.

그 날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어차피 엄마랑 헤어질 거라면 슬퍼하기보단 며칠 남은 시간이라도 엄마랑 뜻 깁게 보내야겠다고 스스로 달랬지만, 덧없는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갔다. 엄마와 함께 있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은 번개같이 지나가버렸다. 피하고 싶은 헤어져야 할 시간은 반드시 다가왔다.

엄마와 마지막 밤은 언제나처럼 애처로웠다. 내일이면 헤어진다는 생각에 마치 이별의식을 치르듯 이부자리를 펴고 모두 누웠다. 이항리는 문승협에게 엄마 없는 할머니와 생활에서 주의사항 등을 단속하였다. 문승협은 그동안 숫하게 들어온 말이기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만 했다. 잔소리 같은 엄마말을 계속 듣다가 잠들었다. 이항리가 엄마말도 안 끝났는데 잔다며 핀잔하였다. 윤주순은 마음이 답답했지만 외손자 문승협을 안아주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어 심장이 아렸다.

윤주순이 아침에 일어나 손주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소고기뭇국을 손수 끓였다. 불쌍한 손주들이 아침을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위안 삼았다.

문승협은 외갓집을 떠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작은 외삼촌이 동행한다는 말에 발걸음이 조금 가벼웠다.

“작은 외삼촌은 목포에 왜 가요?’

“학교에 볼일도 있고, 느그랑 헤어지기 싫은께.”

“그럼 우철이가 데려다주면 되겠다.”

“누나는 으짜고.”

“나는 몰래 와서 마주치면 곤란해.”

“무슨 말이야 엄마?”

“아냐, 이따 말해줄게. 외할머니한테 인사하고, 얼른 출발하자.”

문승협은 엄마와 작은 외삼촌이 무슨 말하는지 알쏭달쏭했다. 외할머니에게 인사하라는 말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외할머니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이를 지켜보던 큰외삼촌 이우대만 빼고 막내이모와 행랑아범내외까지 눈물을 훔쳤다.

“아따, 사내새끼가 사삭스럽게 그냐. 누가 죽었냐, 울긴 왜 울어.”

“오빠, 오빠는 말을 꼭 그따구로 해야 겄소?”

“오빠한테 말하는 뽄새 봐라, 싸가지 하고는.”

“애기가 외할머니랑 헤어지기 싫은께 그란 것인디, 말을 꼭 그렇게 해야 쓰겄냐 이 말이오.”

“시끄럽다, 그만해. 느그들은 조카들 앞에서 안 창피하냐?”

이우대가 문승협 행동을 타박하자, 이항경이 막아서며 대들었다. 윤주순의 호통에 멈추었다.

“그래, 사내가 눈물이 너무 많으믄 못써. 오늘 헤어져야 다음에 또 만나제, 외할머니가 오매불망 손꼽아 지둘리고 있을 텐께, 잘하고 있다가 또 와.”

“네, 외할머니 건강하세요.”

“잉, 가서 목포할무니랑 고모들 말 잘 듣고잉.”

“네.”

“엄마, 그만 갈게요. 승협아, 이제 가자.”

문승협은 이별하기 싫었으나 눈물로 달래주는 외할머니말에 마음을 추슬렀다. 아쉬운 마음을 체념하고 외할머니품에서 떨어져 나와 발길을 돌렸다. 이항경이 문현아손을 잡고, 이우철이 문승협손을 잡고 출발하였다. 큰외삼촌 이우대가 갑자기 문승협을 불러 세우더니 돈을 쥐어주면서 귓속말을 했다.

‘이거 목포 가서 용돈으로 써. 내가 입이 좀 거칠어서 그라제, 느그들 많이 이뻐해. 아프지 말고, 알았제?’

‘네, 큰외삼촌도 빨리 장가가세요.’

문승협은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큰외삼촌성격이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 다정한 성격이 아닌 데다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마음속으로는 예뻐하고 걱정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귓속말로 대답하며 웃었다. 이우대도 미소 지으며 문승협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이우대는 조카들이 많이 안쓰러웠다. 다들 불쌍히 대해서 자신만큼은 당당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문승협이 돌아가면 안 보이는 마을어귀에 다다라 외할머니가족에게 손을 흔들었다. 외할머니가족도 손을 흔들며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문승협은 또 눈물이 나 훌쩍였다. 한참 가다가 아쉬움에 다시 뒤돌아 보았다. 외할머니가 마을모퉁이 너머 언덕까지 뒤따라와 보고 있었다. 문승협은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외할머니를 불렀다. 멀리서 손 흔드는 외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 석별의 마음을 정리하였다.

문승협에게 외갓집으로 가는 길은 행복과 기쁨이었다. 외갓집을 떠나는 길은 불행과 슬픔이었다. 문승협에게 외갓집길은 정반대의 감정이 공존했다

문승협일행은 올 때와 달리 버스를 한번 탄 후 배를 탔다. 점심시간이 넘어 목포항만여객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이항리는 아이들과 바로 헤어지기도 뭐 하고 또 점심을 먹여야 했다. 여객터미널 근처 중국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였다. 짜장면을 비벼 문현아에게 주고 짜장면 먹는 문승협을 바라보았다.

“승협아, 할머니한테는 엄마 왔었다고 말하지 마. 엄마 온 거 비밀로 해, 알았지?”

“엄마, 집에 같이 안 가?”

“응, 엄마는 기차 타고 바로 서울에 갈 거야.”

“왜?”

“말했잖아, 윤아도 그렇고.”

“집에 안 간다는 말은 안 했잖아.”

“집은 작은 외삼촌이 데려다줄 거야.”

“아침에 작은 외삼촌한테 데려다주면 되겠다는 말이 이거였어?”

“어? 응, 미안해. 엄마가 할머니 몰래 와서, 마주치면 곤란하거든.”

“누나도 좀 거시기하다. 아그들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주든가, 마음에 준비라도 하게.”

“그러게요,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엄만 맨날 엄마만 생각해.”

“엄마가 미리 말하면, 또 현아랑 너희 둘이 울고불고 할거 아냐.”

“엄마는 우리 마음보다도 그게 걱정이야?”

“쓸데없이 말꼬리 물지 말고 그렇게 해. 현아도 엄마 만난 거 비밀로 해, 알았지?”

“응.”

문현아가 짜장면 먹다 울음을 터트렸다. 또 한 번 착잡하고 가슴 아픈 이별이 시작되었다. 문승협은 의외로 담담하게 맞이하였다. 점점 이별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느꼈다.

이항리는 식사를 마친 후 용돈을 주며 할머니에게 절대 비밀이라고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것도 잠시 기차시간에 쫓겨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찰옥수수와 밤고구마에 곶감과 참기름 등 친정엄마가 바리바리 싸준 짐을 챙겨 택시를 탔다.

문승협남매가 허겁지겁 택시 타고 가버린 엄마를 지켜보며 눈물을 쏟았다. 문승협은 기약 없는 이별을 담담하게 버텨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우철이 조카들을 말없이 안아줬다. 문승협은 등을 토닥여 주는 작은 외삼촌손길에 먹먹한 가슴을 가라앉혔다.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이별에서 회복되는 시간이 짧아짐을 느꼈다. 만약 인간에게 적응능력이 없었다면 멸종되었을 거라고 확신하였다.

문승협은 작은 외삼촌인솔로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외삼촌 말처럼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헤어질 준비라도 했을 텐데. 주어온 자식도 이렇게는 않겠다, 혹시 진짜 주워왔나’ 뜬금없는 의문부호가 찍혔다.

작은 외삼촌 이우철이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용돈을 주며 ‘씩씩해라’는 말로 아쉬운 작별을 고하였다.

문승협남매는 작은 외삼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손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광산으로 가고 없었다. 외갓집 갈 때 집에 없어서 인사를 못했던 할머니가 혼자 있었다. 한 달여 만에 만나는데도 쌀쌀맞게 대하였다.

“어떻게 왔냐? 느그끼리 왔냐?

“아뇨, 해양대 다니는 작은 외삼촌이 데려다줬어요.”

“느그 엄마는 안 왔디?”

“네.”

“에미나 자식이나. 하기사, 그 에미가 낳은 자식인디, 달라도 쌩뚱맞제.”

박옥춘이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지, 정말 모르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의미심장한 말로 화풀이했다.

문승협은 거짓말을 하여 뜨끔했으나 신신당부한 엄마를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얀 거짓말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면서도 거짓말을 시킨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문승협은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전화를 할까 싶어 엄마전화를 밤늦게까지 기다렸다.

이항리는 혹시 통화하다 시어머니에게 들킬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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