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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Sep 18. 2024

단테의 별 - 1권 1부 26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11)

어느 누구도 떠오르는 태양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어김없이 1977년 새해가 밝았다.

북한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평화협정체결을 촉구하였다. 박정희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대북식량원조 제의와 동시에 남북불가침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철수를 반대 않는다고 밝혔다. 북한이 남북불가침협정을 거부하는 대신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안하여 남북화해무드가 주목받았다. 하지만 미국대통령 지미카터의 4~5년 내 주한미군철수계획은 안보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보건사회부가 의료보호사업실시를 발표하였다. 생활무능력자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의 효시로 국민들에게 크게 환영받은 신년뉴스였다.

 

문승협이 동네친구들과 자치기를 하다 상점유리창을 깼다. 연말연시를 맞아 집에 온 할아버지 문재환이 호되게 야단쳤다. 문승협은 유리창을 깼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웠다. 대문 앞에서 할아버지에게 욕설을 들으며 뒤통수를 얻어맞아 충격과 공포에 떨었다. 그 와중에 막내이모 이항경이 찾아왔다. 문재환은 뜻밖의 사돈처녀와 맞닥트려 당황했다.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몸 둘 바를 몰랐다. 이항경은 애써 모른 체하며 예를 갖췄다.  

“안녕하셨소 사돈어른.”

“오메, 사돈처녀가 으짠 일이요?”

“조카들이 방학인께, 외갓집에 데려갈라고 왔어라.”

“아 그라요, 그라믄 아그들 올 때는 으짠다요?”

“걱정마시쑈, 방학 끝날 때쯤 다시 데려다줄께라우.”

문재환이 문승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승협은 짐을 챙기러 부리나케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부인은 잘 계시지라?”

“예, 덕분에 잘 있어라우.”

대화가 없어 잠시 어색한 사이, 문승협이 문현아와 싸놓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으나, 차비하고 남으믄 뭐 사 묵어.”

“네, 다녀오겠습니다.”

“외갓집에 가서는 오늘멩키로 사고 치지 말고잉?”

“예.”

“사돈어른, 그럼 가볼께라.”

이항경이 가방을 받아 들고 앞장섰다. 문승협은 할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쥔 채 허겁지겁 뒤따랐다.

이항경은 택시를 타고 부두로 갔다. 배시간표를 보며 고민하다 철선을 타기로 하였다.

목포에서 외갓집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잠깐 철선을 탄 후 버스를 두 번 갈아타거나, 여객선을 좀 오래 탄 후 버스를 한번 타야 했다. 비용과 시간은 비슷하였지만, 연결차편이 맞지 않으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 타는 배시간이 중요하였다.

줄곧 말이 없던 이항경이 철선에 오르고 나서야 문승협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마디 했다.

“아까 많이 놀랐드만, 머리는 안 아프냐?”

“예, 괜찮아요.”

“으짜다 그랬어?”

“동네친구들이랑 자치기 하다가요.”

자치기놀이는 짤막한 나무토막을 긴 막대로 쳐서 날아간 거리로 승부를 겨뤘다. 30㎝ 가량 긴 막대를 ‘채’라 하고, 10㎝ 가량 짤막한 나무토막을 튕겨 오르기 쉽게 양쪽 끝을 어슷 깎은 것을 ‘알’이라 하였다.

문승협이 자치기를 하다 손이 시려 큰고모에게 크리스마스선물로 받은 손 모아 장갑(벙어리장갑)을 끼었었다. 채를 쥐고 알을 튕겨 힘껏 휘둘렀는데, 하필 장갑에서 빠져나간 채가 상점유리창을 관통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유리창값은 얼마대?”

“500원이요.”

“짜장면값이 50원 인디 무자게 비싸다잉. 그래서, 유리창값은 으쨌냐?”

“할아버지가 상점아저씨한테 줬어요.”

“오빠 용돈 있잖아, 없어?”

“있어.”

“용돈 있었으믄, 니가 줘 불지 그랬냐.”

“그 아저씨가 한사코 집으로 가자면서 끌고 갔어요.”

“그 아저씨 좀 이상해, 맨날 술만 먹고.”

“느그 할아부지도 그렇다잉, 그깟 500원 땜시 손자한테 욕하고 때린다냐.”

“할아버지가 때렸어?”

“이젠 괜찮아.”

“근데 이모, 엄마가 막내이모 내일 온다고 했는데?”

“잉, 일이 있어서 오늘 왔어.”

이항리가 시부모에게 신년인사차 전화했었다. 문현아와도 통화하면서 막내이모가 데리러 갈 거라고 알려줬으나 예정일보다 하루 일찍 왔다.

문승협일행은 여객터미널에서 철선을 타고 목포 앞바다를 건넜다. 용당부두에서 해남까지 버스를 타고 간 후 다시 대흥사행시외버스를 탔다. 문승협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농촌풍경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기존 흙길이 확장되어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예전에 없던 전신주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초가집일색이던 농가들이 군데군데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다. 수업시간에 배웠던 새마을운동일환으로 짐작하였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산업화와 더불어 사회전반이 발전을 거듭했다. 급속한 경제개발이 도시중심으로 이뤄지면서 도시와 농촌 간 소득격차와 불평등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71년부터 농촌근대화전략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정부 주도와 지원으로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이 아닌 공장·도시·직장 등 사회전체 근대화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새마을운동은 주민 스스로가 협동과 노력을 통해 생활태도와 정신자세를 혁신하고, 경제·사회·문화와 생활환경을 개발·발전·개선해 나가는 지역사회개발운동이자 사회혁신운동이었다. 농촌근대화와 지역균형개발전략이며 의식개혁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대체로 긍정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부의 광범위한 대중동원에 이용되어 폭압적 파시즘의 유신지배체제유지를 도모했다는 부정평가도 상존했다.

 

문승협일행은 해 질 녘에 삼산면 돌고개에서 내렸다. 큰 저수지 둑방길을 지나 논둑길을 걸었다. 동네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하였다. 붉은빛 석양을 배경 삼아 초가지붕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풍경이 아름다웠다. 외갓집 가는 길은  언제나 어린 문승협에게 포근한 정감을 주었다. 30분쯤 걸어 외갓집에 도착했다. 어미 삽살개 한 마리와 강아지 세 마리가 문승협일행을 반겼다. 반갑게 짓는 삽살개소리에 외할머니 윤주순이 정재에서 나왔다. 한복 치마에 손을 닦고 양팔을 벌리자, 문승협남매는 달려가 안겼다. 윤주순이 양팔로 품어 안고 한 명씩 볼을 비벼주며 다시 안아주었다.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못살겠다는 둘째 딸 이항리의 결혼생활이 마음 아팠지만 어쨌든 당사자들 책임이었다. 아무 죄 없는 손주들이 부모 잘못 만나 상처받는다고 생각하니 불쌍해서 가슴이 미어졌다.

“오구오구, 울아그들 오느라 고생했쟈?”

“외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그려 그려 잘 왔다, 이 할무니도 무자게 보고 자펐어. 잘 있었냐?”

“네.”

“어무니, 누구 왔소?”

해양대학교에 다니는 작은 외삼촌 이우철이었다. 행랑채와 붙어있는 외양간에서 쇠죽을 쑤다 수건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행랑채에 살며 농사와 집안일을 돕는 행랑아범 박씨가 뒤따랐다.

“외삼촌, 안녕하세요.”

“오메, 내 이쁜 조카들이 왔네.”

“아 냄새, 뭐 하다 온 거예요?”

“소 밥 줄라고 소밥 하다가 왔제.”

“아따, 승협이 도련님하고 현아애기씨가 오랜만에 왔소잉.”

“호호호, 아저씨는 아직도 애기씨래, 저번에 안 하기로 해놓고는.”

“얼른 손 씻고 밥묵자.”

이우철이 우물가로 가 펌프질 하여 손을 씻게 해 주었다. 수건으로 문현아손을 닦아주고 들어 안았다. 문승협은 건네준 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외삼촌을 따라 안채로 걸어갔다.

남쪽 이어서 낯에는 따뜻한 날씨였으나, 밤이 되자 1월의 한겨울날씨를 되찾아 찬기운이 돌았다. 울타리 너머 으슥한 대나무숲에서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외갓집이 작년여름에 왔을 때와 달랐다. 예전에는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었는데 펌프가 설치되었고, 전기가 들어와 등불과 호롱불을 켰을 때보다 무척 밝았으며, TV안테나도 있었다. 아까 버스 타고 오면서 봤던 도로확장, 농촌주택개량, 전기공급 등 새마을운동의 영향이라고 추측하였다.

문승협이 면석 앞에 놓인 디딤돌을 건너뛰어 기단으로 올라갔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댓돌에 신발을 벗고 안채로 들어갔다. 방바닥은 구들장위에 한지를 깔고 방수기능도 있는 콩기름을 발라 윤기가 흘렀다. 밥 하며 불을 때서 뜨끈뜨끈했다. 방문에 손바닥만 한 창이 생겨서 신기해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방 안에서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볼 수 있게 띠살문 가운데에 유리로 만들어 놓은 미세기문이었다. 때마침 큰외삼촌 이우대가 마실 갔다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 왔소?”

“큰외삼촌, 안녕하세요.”

“잉? 내일 온다드만 오늘 왔다잉.”

이우대는 한마디 하고 본체만체했다. 문승협남매가 더 이상 말없는 큰외삼촌을 바라보며 뻘쭘해하였다.

외삼촌들은 말이 없는 편이었다. 작은 외삼촌 이우철은 조카들을 예뻐해서 잘 놀아주며 친절한 반면, 큰외삼촌 이우대는 많이 무뚝뚝했다.

어색한 분위기에 이우대가 TV를 켰다. 행랑아범부부가 안채 뒷문으로 저녁상을 들여왔다. 뒤이어 온 윤주순이 달걀프라이접시를 밥상에 내려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내 새끼들 많이 묵어라잉.”

“네 할머니.”

“느그 할무니하고 고모들이 잘해주냐?”

“오빠는 아그들한테 별 걸 다 묻소.”

“으째야, 외삼촌이 그런 것도 못 물어본대?”

“아니 그것이 아니라.”

“왜 그요 누나, 뭔 일 있었소?”

“내가 데리러 간께, 승협이가 즈그 할아부지한테 혼나고 있드라.”

이항경이 목격한 그대로 말했다. 윤주순이 밥 먹다 얹힌다며 그만하라고 하자, 이우철이 다독였다.

“승협아 괜찬해, 남자가 놀다보믄 그럴 수도 있어.”

“네.”

“엄마한테는 자주연락 오냐?”

“오빠 그만 하란께는 참말로.”

“누나, 그냥 밥 묵어. 성도 그만 묻고 얼른 식사하쑈. 내 조카들 맛나게 묵어라잉.”

문승협은 엄마를 묻는 큰외삼촌질문에 목이 메었다. 문현아도 다를 바 없었다. 이를 눈치챈 윤주순이 문현아에게 물을 먹였다. 문승협에게도 전을 집어 올려주며 등을 토닥였다. 문승협은 그제야 소고기육전과 나물반찬에 저녁을 먹었다. 좋아하는 반찬으로 상차림해준 외할머니가 고마웠다. 모처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맛있게 먹어서 행복하기까지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외갓집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안채와 연결된 안대청문을 열고 불을 켰다. 안대청구석에 수수깡과 볏짚을 엮어 만든 구황작물저장고가 있었다. 까치발로 들여다보니 고구마와 감자 같은 것들이 가득하였다. 천장에는 봄에 뿌릴 씨앗 같은 종자들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대청다락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그대로 있었다. 45도 정도 기울어진 사다리를 타고 대청다락입구까지 올라갔다. 어둑한 다락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자 갑자기 무서웠다. 차마 올라갈 용기가 않나 예전처럼 추수한 식재료와 곶감 같은 과실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며 얼른 내려왔다. 외갓집에 농사지은 쌀과 작물들을 보관하는 큰 광이 3개가 있었지만, 추운 겨울에는 당장 먹을 간식거리와 농작물 일부를 안대청과 다락에 보관하곤 했었다.

밤이 깊어지자 큰외삼촌은 사랑채로, 막내이모는 곁채로, 작은 외삼촌은 별채로 갔다. 행랑아범 박씨 부부도 뒷정리를 마치고 행랑채로 갔다. 전기가 들어오니 행랑아저씨가 조금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전기가 안 들어왔을 때는 집안 곳곳에 있는 등불을 끄느라 바빴다. 마당을 밝히는 몇 개의 석등까지 끄러면 꽤 시간이 걸렸다. 항상 잠자리에 들기 전 소등을 확인했는데 지금은 몇 개의 전기스위치만 내리면 되었다.

윤주순이 딸 부부나 왔을 때 사용하는 원앙금침을 깔았다. 베개를 하나씩 품고 지켜보던 문승협남매가 이부자리 위로 폴짝 올라갔다. 서로 외할머니 곁에 자겠다며 티격태격하였다. 곧 외할머니를 가운데자리에 눕게 하여 공평히 공유하기로 타협했다. 윤주순이 양쪽 가장자리에 누운 손주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자다가 쉬 마려우믄, 할무니 깨워라잉. 아니믄, 문 앞에 요강 있은께, 거기다 눠.”

“네 할머니.”

문승협은 외갓집에 왔을 때마다 요강을 무척 유용하게 이용했다. 요강을 애용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변소가 돼지우리와 조금 떨어져 있으나 대낮에도 어린아이에게는 위협적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꺼질 듯 말듯한 초롱불을 들고 아래마당 헛간과 외양간 사이에 있는 변소까지 가기가 여간 번거로웠다. 설사 부지런 떨더라도 갔다 오는 사이에 잠이 달아나 다시 잠들기 어려웠다. 특히 늦은 밤과 새벽녘에 늑대와 호랑이 같은 짐승소리가 나서 무서웠다. 무엇보다 밤만 되면 여우가 묘지에 나타나 간을 빼먹는다는 작은 외삼촌이야기는 치명적이었다. 공포가 배가 되어 밤마실은 물론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 없었다.

윤주순이 일어나 불 끄고 눕자, 문승협남매가 가운데 윤주순을 바라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문승협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팔베개를 해주며 꽉 안아주는 외할머니가 너무 좋았다. 문현아도 경쟁적으로 외할머니품을 파고들었다. 문승협은 영원히 기억될 외할머니냄새를 맡으며 깊은 잠에 빠졌다. 문현아도 포근한 외할머니품에 안겨 잠들었다.

윤주순이 새벽녘에 요강을 찾는 손주들을 돌보려고 잠에서 깼다. 소변을 누고 다시 잠든 어린 손주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성정이 불같은 할머니와 깐깐한 고모들 틈에서 부모 없이 크고 있는 외손주들이 걱정되었다. 어제 할아버지에게까지 혼났다는 외손자 문승협은 특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아이답지 않은 생각과 언행들이 자주 눈에 밟혔다. 어쩔 땐 눈치 보며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에 마음 아팠다.


문승협이 일찍 일어나 하얀 삽살개  마리를 달고 다니며 아래마당에 있는 오리와 소를 둘러봤다. 윗마당과 이어지는 담벼락에 있는 토끼장을 구경하다 무심코 외갓집을 바라보았다.

용마루에서 추녀마루를 거쳐 서까래로 이어지는 수려한 기와지붕, 안정감을 주는 단단한 나무로 된 기둥과 대청마루, 따뜻해 보이는 짚과 흙을 섞어 만든 토벽, 천연나무틀에 한지를 발라 숨을 불어넣은 방문, 유난히 한옥이 멋있어 보였다.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삽살개가족이 기단과 대청마루 사이공간에 기거했다. 누하주(아래기둥) 옆을 통로로 삼아 부지런히 들락날락하였다. 외갓집에 올 때마다 기둥과 서까래를 잇는 누상주(위기둥)를 보듬고 돌아 쪽마루에서 대청마루를 지나 툇마루까지 뛰어다녔다. 그렇게 놀다 마루 끝 들란대 너머로 떨어져 어른들을 혼비백산시켰던 일이 기억났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놀다 들어와 덧문과 사분합문이 활짝 열어진 안대청마루에 누워있자면,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훑고 사라지는 느낌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우철이 아침을 먹으며 연을 만들자고 하였다. 문승협은 뛸 듯이 좋아했고, 문현아도 덩달아 신났다.

행랑아범이 낫을 두 자루 가져와 이우철에게 한 자루 건넸다. 문승협남매를 데리고 대나무숲을 훑어보았다. 대나무숲이 아래마당부터 텃밭과 닭장이 있는 뒷마당 동산까지 울타리처럼 빙 둘러 이어져있었다.

행랑아범과 이우철이 적당한 참대나무를 몇 개 꺾어 내려와 잔가지를 쳐내고 1미터 정도로 잘랐다.

별채로 갖고 가서 방바닥에 종이비료포대를 깔고 둘러앉아 대나무를 갈랐다. 연살이 고르지 않으면 한쪽으로 기운다며 낫으로 섬세하게 다듬어 여러 개 만들었다. 한지를 직사각형으로 잘라 세 번 접은 후 뾰족한 부분을 둥그렇게 잘라 다시 펴니 정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방패연모양이 되었다. 이우철과 행랑아범이 경쟁적으로 방패연을 하나씩 만들었다. 다른 한지를 정사각형으로 잘라 90도 돌려 가오리얼굴을 만들고 연살에 풀을 발라 붙였다. 가오리연에는 꼬리를, 방패연에는 태극문양을 붙였다. 문현아는 연을 다 만든 줄 알고 좋아했다가 금세 심드렁했다. 이우철이 아직 남았다며 벽장에서 얼레와 명주실타래를 꺼냈다. 명주실타래를 문현아양손에 끼워주며 납작 얼레에 다 감을 때까지 그대로 있으라고 하자 다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외삼촌, 이거 언제 다 준비했어요?”

“이 명주실만 새로 샀고 다 있던 것이어. 너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 왔을 때도 썼는디, 기억 안 나?”

“아, 기억났어요.”

“외삼촌, 나 팔 아파.”

“이리 줘, 오빠가 할게.”

문승협이 문현아양손에 낀 명주실타래를 옮겨 받았다. 이우철이 납작 얼레 두 개에 명주실을 나눠 감았다. 행랑아범이 풀이 마른 연에 목줄을 달았다. 이우철이 가오리연목줄을 납작 얼레 명주실과 연결하여 하나씩 쥐어줬다. 문승협남매가 신나서 연과 얼레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조카들이 마당을 뛰어다니며 연을 날리는 사이, 이우철과 행랑아범은 새 명주실타래를 꺼내어 육각얼레에 빠르게 감았다. 연싸움을 하기 위해 명주실에 사를 먹이려고 준비하였다. 사기를 빻은 가루에 달걀흰자와 풀을 섞어 사기풀을 만들었다. 행랑아범이 명주실마리를 옷핀구멍에 통과시켜 사기풀에 담갔다. 이우철은 사기풀을 통과한 명주실마리를 네모얼레에 묶어 감았다. 이우철과 행랑아범은 사를 먹인 명주실이 마를 때까지 네모얼레에서 육각얼레로 옮겨 감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렇게 마무리된 명주실을 방패연목줄에 연결하였다.

문현아가 연날리기를 하다 윗마당에서 아래마당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걸려 넘어졌다. 문승협이 달려가 보니 문현아무릎에서 피가 났다. 이우철이 안고 가 마루에 내려놓고 옥토정기를 가져와 소독했다, 문현아의 우는소리에 달려나 온 외할머니가 살펴보면서 달랬다.

“약 발라서 인자 괜찬해. 아가, 딴 데는 안 아프냐?”

“흑흑, 다른 데는 괜찮아요.”

“그라믄 됐어, 인자 점심묵자.”

“얼른 점심묵고, 삼촌이랑 저그 산에 가서 연 날리자. 긍께 인자 그만 울어야.”

“아그가 놀라고 아픈께 우는 것이어, 좀 울게 둬라. 그래도 얼굴 안 다쳐서 다행이다.”

“그러게 바보같이 왜 계단에서 뛰어, 뚝 그쳐, 계속 울면 오빠가 안 놀아준다.”

문승협은 동생을 돌보지 못한 속상함과 안타까움에 소리 질렀다. 다정하게 달래주지 못할망정 다그친 미안함이 겹쳐 문현아를 안아줬다.

이우철이 점심식사 후 조카들과 집을 나섰다. 작은 저수지를 지나 뒷산에 올라갔다. 문승협에게 가오리연을 날리게 해 주고 동네사람들과 연싸움을 하였다. 문승협이 멀리 날아오른 가오리연을 문현아에게 체험해 보라며 얼레를 건넸다. 그 순간 행랑아범이 ‘계속 줄 줘 부러’라고 외쳤다. 곧이어 동네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나간다’라고 크게 소리 질렀다. 줄 끊긴 방패연 하나가 마치 맥 풀린 마냥 춤추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서서히 멀어지며 떨어지는 연을 주우러 뛰어갔다. 문승협도 아이들을 뒤쫓아가려 하자, 이우철이 바람 때문에 옆동네까지 날아간다며 가지마라고 말렸다. 하늘에는 외삼촌의 연이 굳건히 날고 있었다. 문현아가 갑자기 부는 돌풍에 가오리연이 높이 치솟아 올라 힘에 부쳤다. 무서운 마음에 얼레를 문승협에게 넘겨주었다. 문승협은 얼레를 감으며 연싸움에서 이긴 외삼촌이 멋있어 보였다. 이우철과 행랑아범은 연실에 살을 먹인 효과와 연싸움기술을 이야기하였다. 문승협은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가 저녁으로 새알심을 만들어 동지팥죽을 쑤었다. 손주들을 위해 팥죽 담은 그릇을 차가운 물이 담긴 큰 바가지에 띄워 뜨겁지 않게 식혀줬다. 어른들은 소금을 넣거나 그냥 먹었지만, 문승협남매는 설탕을 넣어 달달 하게 먹는 걸 좋아했다.

저녁을 먹고 다들 모여 TV를 보았다. 뉴욕 제4세계무역센터가 1975년에 착공하여 이번에 완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우철이 해양대를 졸업하면 뉴욕에 꼭 가볼 계획이라고 하였다. 외할머니품에 안겨 하품하던 문현아가 해양대는 뭐고, 뉴욕은 어디며,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다. 이우철이 구체적으로 장황히 설명하는 중에, 문현아가 어느새 잠들어 코를 골았다. 이우철이 문현아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놀림 삼아 한마디 했다.

“하하, 승협아. 현아 코 고는 소리에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겄다.”

“하하하, 그러게요. 오늘따라 심하게 고네, 많이 피곤했나 봐요.”

“너도 일찍 자그라, 내일도 잼나게 놀아야제.”

“네, 안뇽히 주무셔용 외삼촌.”

이우철이 웃으며 문승협 뺨을 톡톡치고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갔다.


윤주순이 뒷마당 동산에 있는 닭장에서 씨알 굵은 달걀 두 알을 골라왔다. 방금 막 한 따끈한 밥에 달걀노른자만 넣어 간장과 참기름으로 비비고 고소한 깨를 뿌려 손주들에게 아침식사로 주었다. 문승협은 예전에도 외할머니가 해줘서 먹어봤지만 입에 착착 붙는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외할머니가 해준 음식 중에 평생 기억할만한 요리였으며, 평안을 주는 외할머니냄새와 함께 뇌리에 깊이 남았다.

“오늘은 뭐 하고 놀아야, 우리 조카들이 좋아하까?”

“동네서 오늘 달집 태운다드라.”

“그라믄 쥐불놀이를 해야 쓰겄네.”

“오메, 우리 손주들 밤에 오줌 싸겄네.”

“왜요?”

“불장난하믄 밤에 자다가 오줌싸제.”

“그럼 나는 안 할래요.”

“괜찬해, 현아가 싸믄 할무니가 빨믄 된께.”

“아침나절엔 방학숙제랑 공부도 좀 하고, 이따가 느지막이 만들자잉?”

이우철이 조카들 방학숙제를 도와주었다. 산수책을 가져오라고 하여 문현아에게 나눗셈을, 문승협에게는 분수를 가르쳤다. 점심을 먹고는 조카들을 닭장에 데려가 모이를 주게 하였다. 함께 토끼풀을 뜯어 토끼장에서 먹이고 있을 때, 행랑아범이 양손에 든 깡통을 흔들며 불렀다. 꽁치와 복숭아통조림 깡통 2개에 조금 더 큰 파인애플통조림 깡통 2개를 보여줬다. 이우철이 깡통 하나를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씻었소?”

“그람, 씻었제.”

“어서 났소?”

“아까침에 돌고개 점빵서 가져왔어.”

문승협남매가 옹기종기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이우철이 연장통에서 대못을 꺼내 작은 깡통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 구멍 냈다. 행랑아범도 큰 깡통에 구멍을 뚫었다. 전신이 구멍 난 깡통에 철사줄을 꿰어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우철이 시험 삼아 돌리자 깡통에서 ‘붕붕’ 바람소리가 들렸다. 행랑아범이 부엌에서 가져온 불씨를 넣고 그 위에 작은 나무토막을 얻어 이우철에게 줬다. 이우철이 몇 번 돌리니 ‘훅훅’ 소리와 함께 깡통에 불이 확 붙었다. 이우철이 불붙은 깡통을 문현아에게 건넸다. 문현아가 오줌 싼다는 말 때문인지 무서워서인지 거절했다. 문승협이 조심스럽게 건네받아 천천히 몇 번 돌렸다. 탄력이 붙어 신나게 돌리다 놓쳐 윗마당화단에 떨어졌다. 행랑아범이 달려가 깡통을 들어 올리고 잔불을 정리하며 놀란 문승협을 안심시켰다.

이우철과 문승협이 불붙은 깡통을 하나씩 들고 앞장섰다. 행랑아범이 갈퀴를 챙겨 문현아손을 잡고 뒤따랐다.

동네논에서 쥐불놀이가 펼쳐졌다. 논두렁 여기저기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며 연기가 자욱하였다. 논가운데는 깡통을 돌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불이 번지지 않도록 주시하며 나뭇가지나 갈퀴를 든 어른들도 있었다. 문승협은 깡통을 돌리다 불꽃이 꺼질 쯤이면 행랑아범도움으로 나무를 보충했다. 이우철이 재와 불씨만 남은 깡통을 달을 향해 던지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몇 번 돌리다 힘차게 던졌으나 멀리 못 가고 몇 발짝 앞에 떨어졌다. 생각보다 별로여서 심드렁했다. 이우철이 아직 날이 밝아 그렇다면서 이따 저녁 먹고 나오면 그때가 본격적이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저녁을 먹고 나와서 본 어둠 속 쥐불놀이는 외삼촌이 가히 절정이라고 할 만큼 멋있었다.

여기저기서 원을 그리며 도는 노랗고 빨간 불꽃이 화려했다. 어느 순간 불덩이가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별을 향해 날았다. 금세 땅에 떨어져 흩날리는 불씨들이 땅에 떨어진 별 같았다. 한편에서 활활 타오르는 달집 태우기는 땅에 있는 태양 같았다.

“와, 별똥별이다.”

“어디, 어디?”

행랑아범부부와 달집 태우기를 하며 콩을 구워 먹던 문현아가 순식간에 지나간 유성을 가리키며 외쳤다. 곁에 있던 동네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문승협은 깡통을 돌리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소원 빌 틈을 놓쳐버린 아쉬움과 동시에 엄마와 최선경의 모습이 스쳤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네아낙들이 가져온 낡은 옷가지들과 소원을 쓴 종이를 달집에 넣었다. 꺼져가던 달집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우철과 문승협도 깡통을 하늘을 향해 높이 던져 쥐불놀이와 달집 태우기를 마무리했다.

쥐불놀이와 달집 태우기는 논밭 풀 속 해충알과 쥐를 제거하고 재는 거름이 되며, 풍년과 액운 없는 건강을 기원하는 전통연례행사였다.

집에 왔을 때 TV에서 9시 뉴스를 알리는 시그널이 들렸다. 외할머니가 목욕하라고 하였다.

“현아는요?”

“행랑어멈이 씻길 것인께, 현아는 냅둬.”

“그럼 저만 목욕해요?”

“잉, 쥐불놀이해서 머리랑 온몸이 재투성인디, 언능 목욕해야제.”

“네.”

“목간통에 뜨거운 물 채우고 부를 텐께, 그때 와.”

문승협은 목욕하기 싫었지만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옷가방에서 갈아입을 속옷과 옷을 챙겼다.

윤주순이 부엌에 있는 나무목욕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찬물로 적당히 온도를 맞춰 문승협을 불렀다.

문승협이 옷가지를 부뚜막 옆 소쿠리에 내려놓고 옷을 주섬주섬 벗었다. 부엌공기가 으슬으슬 추움에도 손으로 고추를 가리고 서서 나무목욕통에 들어가기를 주춤주춤 했다. 온도를 체크하려고 슬쩍 담근 발끝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 어서 들어가라는 외할머니채근에 하는 수 없이 몸을 확 담갔다. 뜨끈함이 온몸에 퍼졌다.

“으짜냐, 안 뜨겁냐?”

“네, 참을만해요.”

“때 불리게 푹 담그고 있어, 이따 올란께.”

“네.”

외할머니가 나가자, 문승협은 목만 내놓은 채 부엌을 둘러보았다. 부엌이 엄청 넓고 높게 느껴졌다.

부엌판문정면으로 높낮이가 다른 크고 작은 아궁이 4개에 솥이 얹혀있었다. 아궁이 위쪽 벽에 걸린 대나무숲호랑이그림나무판이 연기에 그을렸다. 오른쪽에는 음식이나 그릇과 상을 보관하는 찬방이고, 그 옆 판문 쪽 벽은 찬장과 조리대가 차지했다. 찬장문에는 문승협이 모르는 한자가 한지에 쓰여 비스듬히 붙었고, 조리대 아래에 석유풍로 2개가 놓여있었다. 판문 건너 오른편에 작은 장독 여러 개와 큰 물독 두 개가 두 줄로 있고, 큰 물독너머로 나무목욕통이 자리하였다. 벽에 마늘과 식재료를 담은 자루가 걸렸고, 그 옆에 작은 판문 2개가 뒷마당과 작은 광으로 통했다.

문승협은 나무목욕통이 있는 구석 벽 위에 작은 창을 보았다. 소싯적 엄마와 목욕하면서 살창을 통해 비치는 달과 별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시 보고픈 엄마생각에 빠져있는데 외할머니가 들어왔다. 외할머니가 씻겨줘 창피했으나 어릴 적 기억이 있어 금방 적응하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목욕을 즐겁게 마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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