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10)
KBS한국방송공사가 남산시대를 끝으로 여의도청사로 이전하였다. 각계각층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방송통폐합을 예고했다. 박정희대통령의 육사 2기 동기이자 동향후배인 건설부장관 김재규가 제8대 중앙정부장에 취임하였다. 여전히 어수선한 시국에 국민들의 언행이 각별히 통제받고 있었다.
오성희선생이 박진숙의 동생 학교문제를 부탁한 최선경과 문승협을 불렀다. 방과 후에 박진숙부모의 서명을 받으러 박진숙을 대동해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문승협은 박선숙의 재입학을 부탁한 장본임에도 이틀째 감기로 누워있는 동생 문현아 때문에 동행할 수 없었다. 가장 눈이 많이 온다는 대설을 지나 해가 짧아지는 동지를 목전에 둔 12월의 쌀쌀한 날씨 탓이었다.
오성희선생과 최선경이 서명받고 박진숙집을 나섰을 때는 땅거미가 일찍 깔려 어둡기도 하거니와 춥기까지 했다. 최선경은 궁금해할 문승협에게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오성희선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중간에서 헤어져 문승협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그것은 구실에 불과하였다. 모레가 문승협생일로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 초대한다는 말이 없어 물어볼 작정이었다. 문현아건강도 궁금했다. 듬성듬성 켜진 가로등에 연무까지 끼어 유난히 어둠이 짙은 날씨인데도 호랑이 같은 문승협할머니 때문에 초인종 누를 엄두조차 못 냈다. 하는 수없이 집 앞 계단에 앉아 무턱대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추위와 어둠 속에서 기다린 지 30여분쯤 지나 집안쪽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내심 기대한 문승협목소리는 아니었다. 문승협남매에게 힐난하며 야단치는 할머니 박옥춘목소리였다.
박옥춘이 대학진학문제로 히스테리를 부린 막내딸 문희경에게 받은 화를 애먼 문승협남매에게 푸는 중이었다. 손녀 문현아가 아파 시중드는 신세한탄을 활시위로 삼았다. 아들 문경준과 며느리 이항리의 험담을 화살로 엮어 쏘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문승협남매를 향해 날아가 정확히 심장에 꽂혔다.
최선경은 하겠다면서 하지 않은 문승협말이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전해 들어서 반신반의하였던 문승협가정사가 생각보다 심각해 마음 아팠다. 계속되는 문승협할머니의 막말을 더 이상 듣기 민망하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런 상황인 줄도 모르고 문승협생일초대나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비참한 마음으로 할머니비난을 듣고 있을 문승협남매가 상상되자 괜히 왔다는 자책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잠자리에 누어서도 떠나지 않는 문승협 생각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만약, 내가 오늘 안 사실을 승협이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승협이가 가뜩이나 상처받아 자존감도 낮아졌을 텐데, 자존심마저 무너져 나를 안 보려 할지도 몰라. 이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하고 앞으로 묻지도 말아야겠다. 승협이 생일은 어떡하지? 생일초대가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려나? 생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승협이에겐 중요해. 애들이랑 깜짝 생일파티를 할까? 그럼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승협이 상황을 설명해서 설득하긴 더 위험하고, 승협이가 싫어할 수도 있고, 그냥 나 혼자 축하할까…….’
최선경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새 뒤척여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했던 생각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하였다.
등교하자마자 김철종을 찾아갔다. 김철종과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갔다. 갑자기 나타난 문승협 때문에 황급히 대화를 멈추고 태연 한척했다.
“있잖아, 글피 토요일이 내 생일인데. 점심에 학교 앞 분식집에서 할까 하는데, 어때?”
“거봐라, 내가 뭐라디, 승협이도 생각이 있을 거라고 안 하디.”
“무슨 말이야?”
“아 아냐, 네 생일에 무슨 선물이 좋을지 물어봤어. 그렇지 철종아?”
“잉, 그라제. 우린 선물 야그했어, 맞어.”
“선물은 됐고, 시간은 어때, 괜찮아?”
“응, 난 좋아.”
“아따 초대한 사람 맘이제, 별 걸 다 신경 써.”
“아래층에 민주랑 정주는 선경이가 좀 전해주라.”
“그래, 그럴게.”
“근디, 이정주도 초대할라고?”
“뭐 어때, 서로 친해지면 좋잖아.”
최선경이 문승협말을 듣고 황급히 가다가 멈춰 섰다. 김철종을 부르더니 문승협 모르게 뭐라 하고 다시 쏜살같이 갔다. 문승협눈에는 평소와 달리 덤벙대는 최선경행동이 조금 수상해 보였다.
최선경은 경솔한 김철종 때문에 밤잠을 설쳐가며 짜낸 계획이 들킬뻔해 철렁하였다. 문승협의 뜻밖제안에 마음 놓이면서도 김철종입을 비밀로 단속해야 했다. 생일이 별거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문승협을 생각하는 최선경에겐 중요하였다. 조금이나마 위로되길 바라며 문승협을 잘 알고 이해하는 김철종과 박진숙까지 셋만 모여 축하하기로 계획했었다. 계획이 망가졌어도 괜한 고생을 사서 했다기보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좋았다. 문득 평상시와 다름없는 문승협모습이 애처로웠다. 마음속으로 괴로워 힘들어할 문승협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결코 문승협에게 내색하지 말아야 해서 심난하였다.
최선경생일에 왔던 아이들이 분식집에 모였다. 아직 감기로 불편한 문현아만 빠졌다.
“엄마가 서울에 있고, 요즘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집에서 생일파티하기가 좀 그래. 그래서 여기서 하자고 했어, 미안하지만 이해해 주길 바래.”
“맥아리 없는 소리 하고 있네. 아야, 친구끼리 이런 것도 이해 못 하믄, 그것이 어디 친구냐?”
“긍께 말이어, 승협이 너는 가끔 쓰잘데없이 사서 고민하는 것이 탈이여.”
“생일상 차리는 엄마들이 고생인께, 내 생일엔 나도 밖에서 해야쓰겄다.”
김철종과 박진숙이 문승협의 처한 상황을 에두르고 현기정이 호응했다. 지켜보던 최선경이 선물을 전달하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이들도 덩달아 선물을 건넸다. 모두의 관심이 최선경선물에 집중되었다. 문승협이 성화에 못 이겨 풀었다.
“어? 뭣이어, 선경이 5년짜리 일기장 하고 똑같그만. 선경이 생일에 니가 선물한 그거랑 똑같은디, 표딱지 색깔만 다르네.”
“맞네 맞어, 선경이 꺼는 핑크색, 승협이 꺼는 파란색. 인자는 커플일기장까지, 느그들 진짜 사귀냐?”
“아따, 가시나들이라 섬세하다 섬세해. 난 아무 기억 도 없는디, 그것을 다 기억한다잉.”
제갈민주의 발견에 현기정이 맞장구쳐 둘의 관계를 몰아갔다. 최선경과 문승협은 웃기만 할 뿐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가병수가 딴소리로 파투 놨다.
“그라믄, 그때멩키로 엽서든 편지든 뭔가 있겄네. 그걸 보믄 둘이 뭔지 나오겄다.”
“아야, 있냐 없냐, 있으믄 얼른 읽어봐야?”
“승협아, 편지는 집에 가서 읽어, 나 지금 배고파.”
박진숙이 연서로 다시 불을 지피고 이정주와 아이들이 물증으로 둘의 관계를 확인하려 했다. 최선경이 편지를 보려는 문승협을 제지하여 모두 김 빠져했다. 둘의 긴가민가한 관계를 확인하려는 노력이 끝내 무산되었다. 김철종이 주문한 음식을 먹다가 심통 나서 한마디 던졌다.
“근디, 내가 알기로는 승협이가 일기 쓰는 거 별로 안 좋아한디.”
“뭔 소리여, 내가 다 봤는디.”
“야 진숙아.”
“아 아니, 일기장이 아니고 뭐시냐, 거시기 그 글 쓰기를 좋아한다는 말이제.”
박진숙이 문승협의 일기장을 읽었던 일이 생각나 무심코 반박했다가, 최선경의 제지에 아차 하며 황급히 말을 돌렸다. 문승협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허겁지겁 먹는 친구들 모습을 보고 부족한 음식을 더 주문하였다. 박진숙과 최선경은 큰일 날 뻔했다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다.
친구들이 배부르게 잘 먹었다며 문승협에게 인사치레했다. 문승협은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친구들을 만화가게로 이끌었다. 여자아이들은 ‘유리가면, 유리의 성’ 같은 순정만화를 집어 들었다. 남자아이들은 ‘수호지, 임꺽정, 대야망, 각시탈’등 영웅만화와 무술만화를 빼들었다.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았다.
만화는 왜색일색으로 논란이 많았다. 그래서 일본적 요소를 제거하려고 한국출판사와 작가가 다시 그려 출판하였다. 그런 이유로 한국만화는 일본만화에 비해 활발하지 않았다.
문승협이 ‘무지개행진곡’을 다 보고 일어났다. 눈물을 찔금거리며 ‘베르사이유장미’를 보는 최선경에게 달고나를 권했다. 최선경이 눈물을 닦고 쑥스러워하며 국자를 받았다. 문승협이 녹인 설탕물에 자야를 넣은 라면땅을 몇 개 만들어 만화 보느라 바쁜 친구들에게 주었다. ‘어깨동무, 새소년잡지’를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정주가 설탕 뽑기를 만들어 최선경에게 내밀었다. 최선경이 문승협을 슬쩍 보더니 거절했다. 이정주가 재차 권하자, 최선경이 마지못해 받았다. 뽑기에 집중하다 보니 이정주가 바짝 앉은 줄 몰랐다. 최선경이 뽑기에 성공해 이정주와 마주 보며 웃다가 문승협과 눈이 마주쳤다. 문승협에게 뽑기를 보여주며 흔들었다. 어색한 미소로 고개 돌린 문승협태도에 순간 뜨끔해 이정주에게 제자리로 가라고 하였다.
어둑해질 무렵 만화방에서 나와 각자 헤어졌다. 문승협과 박진숙은 집방향이 같아 함께 갔다.
최선경도 집방향이 같은 아이들과 갔다. 최선경은 방향이 다른 아이들과 다시 한번 갈라지고 이정주와 단둘이 가게 되었다. 갑자기 물건을 빠트렸다며 이정주에게 먼저 가라 하고 부리나케 만화방을 향해 뛰었다. 헤어질 때 문승협 눈빛이 어른거렸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갔다. 숨이 차올라 걸어가는데 만화방 앞에 누군가 서있었다. 기대도 잠시, 모르는 아이였다. 실망한 마음으로 숨을 고르며 문승협집방향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어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등뒤 최선경집방향에서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문승협이었다. 최선경은 금세 만면희색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
“헉헉헉, 너 또 아플까 봐, 내가 뛰지 말랬지.”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헉헉, 제발 뛰지 마라고, 대답해.”
“알았어, 어떻게 된 거냐고?”
“최선경, 진짜 약속해, 다신 안 뛴다고.”
“다신 안 뛸게, 진짜 약속해.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줘.”
“진숙이랑 헤어지자마자 너네 집 앞으로 갔는데, 이정주만 지나가고 너는 안 오더라.”
“그래서?”
“혹시나 해서 학교 앞으로 뛰어오는데, 네가 뛰어가더라고. 길거리라 큰소리로 부를 수도 없고.”
“왜, 내가 그새 보고 싶었어?”
“넌 여기 왜 왔어?”
“그새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 왜.”
최선경은 만화방에서 나와 헤어질 때 오늘만큼은 문승협을 집에 바래다주고 싶었다. 자신이 위로가 되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의식하는 문승협을 의식해 참았었다.
“가슴 괜찮아?”
“왜 이래, 대놓고 숙녀가슴을 묻다니, 매너 하곤.”
“진짜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내 심장은 걱정 붙들어 매셔요.”
“가자, 집에 바래다줄게.”
“아냐, 오늘은 내가 바래다 줄래.”
“다음에, 날 밝을 때, 오늘은 어두워서 안돼.”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여기.”
“싫어, 오늘은 진짜 내가 바래다주고 싶다고.”
“네 맘 알아, 아는데, 오늘은 너무 어두워서 안돼.”
“아 진짜, 내 맘 안다며.”
“네가 나를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갈 때면 칠흑같이 어두워져, 그럼 내 마음이 편할까?”
“아무튼 말로는 못 당해, 알았어.”
최선경은 원하는 대로 하진 못했지만 문승협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텔레파시가 진짜 있나 봐.”
“보냈어?”
“그래 보냈다. 꼭 그렇게 말해야 해?”
“아니, 아까 전에 너 뒤쫓아오면서, 뛰지 말고 멈추라고 내가 막 보냈었거든.”
“그럼, 없나?”
“아니, 있어.”
“뭐야, 이랬다 저랬다.”
“맞아, 텔레파시는 있는데,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야. 내가 아까 헤어질 때 텔레파시를 보내서 네가 여기 왔고, 너는 또 나한테 보내서 내가 여기로 왔고.”
“그럼, 멈추라는 거는?”
“나는 너에게 멈추라고 보냈는데, 동시에 너는 나를 찾아서 서로 엇갈리거나 부딪힌 거지.”
“하, 그럴듯하네. 죽어도 텔레파시가 있을까?”
“있지. 현실보다 강력하지만, 곁에 없어서 엄청 슬픈 게 흠이야. 그니까 죽음이란 말 함부로 하지 마.”
“호호, 너 점점 하지 마라는 말이 늘어난다.”
“내가 하지 마라는 것 중에 나를 위한 건 안 해도 돼. 그리고, 사랑의 시작은 구속이래.”
“푸하하, 구속? 그럼, 난 하라는 말을 해야겠다. 내가 선물한 일기장에 너의 마음을 써, 그리고 위로가 필요하면 나를 생각해. 슬프면 참지만 말고 울어, 기쁨도 슬픔도 나랑 나눠. 이건 날 위한 거니까 해. 이건 구속이야.”
“나는 너를 위해서 하지 마라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하래냐?”
“그래서, 싫어? 이게 너와 나의 차이야, 서로 다름을 인정하시게나.”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도 자신이 하기 싫으면 갈등이 된다. 아픔을 열어 놓아야 상처를 볼 수 있다. 사랑의 시작이 독점과 소유의 구속이다. 다른 가치관을 존중하거나 가치관이 같아지는 게 사랑이다. 둘은 그렇게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최선경은 설레었다. 직접이 아닌 간접표현이라 더 두근거렸다. 문승협입으로 사랑이라는 언어를 전해옴이 처음이라 심장이 얼얼했다. 이렇게 문승협 곁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지나가는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로 어두웠다. 둘은 손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걸었다.
“어둠이 이럴 때는 좋네, 가까이 걸을 수 있어서.”
“이래서 남녀마음이 가까워지면 밝음보다 어둠이 좋아지는 건가, 낯보다 밤을?”
“뭐야, 응큼하기 짝이 없군.”
“아냐, 네 생각을 그냥 해석해 본거야.”
“호호호, 이 어둠에서도, 당황한 너의 동공지진이 느껴진다.”
최선경집에 다다랐다. 문승협이 멈춰 서더니 최선경오른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지나가는 차량헤드라이트에 문승협의 눈과 얼굴윤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최선경눈에는 불빛과 무관하게 또렷이 보였다.
“진짜 다신 뛰지 마, 알았지?”
“알았어, 아까 약속했잖아.”
“잘 자.”
“응, 조심이 가고, 잘 자.”
문승협이 집에 도착해 최선경편지를 펼쳤다. ‘위로가 필요하면 나를 생각하고, 슬프면 참지만 말고 울어’라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나한테 만큼은 마음을 열어도 돼,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자’는 글로 마무리되었다.
박옥춘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문승협은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다가 깜짝 놀랐다.
“귀가 멀었냐? 밥 먹으란 소리 안 들려? 힘없어 죽겄는디, 쯔.”
“못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그거는 뭐다냐, 뭔디 그렇게 싸안고 있냐.”
“친구들한테 받은 거예요.”
“뭐 한디 너한테 준데? 너 느그 에미 마냥 거짓갈 하는 거 아니어?”
“아니에요 그런 거.”
“얼른 현아 깨워서 밥 묵어.”
문승협은 생일선물이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생일을 그냥 지나친 할머니가 미안해할까 봐 차마 설명하지 못했다. 엄마처럼 거짓말한다는 의심에 하마터면 사실대로 말할뻔했다. 문현아를 깨워 밥 먹으러 갔다.
문현아는 감기로 입맛이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문승협은 기분 탓에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참 밥도 이정스럽지 못하게 묵는다. 아그들이 정이안가, 꼭 즈그 에미애비 모냥.”
“…….”
“할머니 그만 먹을게요.”
“그럴라믄 첨에 덜어놓고 먹든가 하제, 이것이 뭐시냐 더럽게. 얼른 깨끗이 묵어.”
“네.”
문승협남매는 꾸역꾸역 밥을 먹어 치웠다. 쌀쌀맞은 할머니심기를 피해 서둘러 방으로 갔다. 남매에게는 이런 상황이 이미 생활화되었다. 이 정도는 화난 할머니를 소재로 남매의 대화거리에도 끼지 못했다.
“현아야, 이마 한번 짚어보자. 음, 아직 열이 있네.”
“오빠, 생일인데 미안, 아파서 선물도 못 샀어.”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되니까 빨리 낫기나 해.”
“맡겨 논 용돈기입장에 쓰고, 오빠가 필요한 거 사.”
“괜찮다니까, 자, 약 먹자.”
“응. 참,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
“엄마가 바쁜가? 그래도 오빠 생일인데.”
“그런가 보다, 전화할 틈도 없이.”
문현아는 약기운에 금세 잠들었다. 문승협은 즐거운 하루였음에도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친구들 덕분으로 고맙게 여겼다. 그동안 엄마 없는 생일엔 그냥 지나쳤었다. 친구들과 밖에서 보낸 생일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집으로 초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나름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중학교입학을 위한 신체검사와 체력장시험을 마친 6학년선배들이 필답고사를 치렀다. 남강선배는 덕일중학교에 박현선배는 홍인중학교에 응시하였다. 두학교 모두 명문사립학교재단이었다. 두 사람은 전액장학금을 받는 수석합격을 노렸다. 유선국민학교에서도 두 선배에게 최소 차석이상 성적을 기대했다. 명문국립중학교에 지원해도 합격에는 문제없었다. 다만 목포주변도시와 도서지역에서 난다 긴다는 수재들이 지원하기에 차석이상의 성적과 장학금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시험은 전교과목으로 기초적인 평이한 수준이었다. 교육감과 중학교장이 공동출제하거나 중학교장이 단독책임출제를 병행하였다.
“아야, 이번 겨울방학엔 뭐 하냐?”
“아직 모르겠어, 너는?”
“나는 추운께 집에 딱 엎드려있을란다.”
“그럼, 다음 주 크리스마스이브 때 교회에 갈래? 선경이도 가기로 했는데.”
“아야, 내가 느그 데이또 한디 뭐 하러 끼냐? 선경이도 벨로 안 좋아할 거 같은디.”
“아냐, 민주랑 기정이도 올 거야.”
“그라믄, 한번 생각해 보께.”
“그럼, 5시까지 제일교회 앞으로 와.”
문승협은 목포에 와서도 큰고모 문희숙권유로 교회에 다녔다. 신앙에 대한 갈망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좋아서였다. 교회에 갈 때마다 빠트리지 않은 기도는 매번 똑같았다. 떨어져 사는 엄마아빠와 함께 살게 해 달라는 간절함이었지만 하나님은 아직까지 외면하였다.
겨울방학 이후 거리에는 며칠째 캐럴이 풍요롭게 울려 퍼졌다. 이틀 전부터 함박눈이 내려 화이트크리스마스를 예상케 했다.
문희숙은 청년부에서 계획한 칸타타와 가스펠송 준비를 위해 먼저 교회로 갔다.
문승협은 5시 조금 넘어 십자가가 주인공처럼 우뚝 솟은 교회 앞에서 최선경과 친구들을 만났다.
교회정원에 자리한 하늘높이 크리스마스트리가 각종 소품과 휘황찬란한 전구로 치장하고 반짝반짝 자태를 뽐내며 반겼다. 울려 퍼지는 성탄음악에 하얀 눈 덮인 세상은 보너스였다. 오후 6시부터 크리스마스이브행사가 시작되었다. 과자와 음료 등 간식과 식사를 준비하고 이날 특별하게 전도받은 잠재적 신자들과 교인들을 맞이했다. 교회본당무대에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쓰인 대형배경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근엄한 목사님의 기도에 이어 초등부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특별 찬송하여 갈채를 받았다. 중등부에서 ‘말구유 아기예수탄생과 재림’이라는 성극을 공연하였다. 고등부의 율동에 가스펠송과 칸타타로 이어진 청년부찬양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청년부찬양이 마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신도들이 단상으로 우르르 올라가 꽃다발을 전달했다. 그중에서도 문희숙에게 풍성한 꽃다발을 안겨준 낯선 남자가 눈에 띄었다. 9시가 훌쩍 넘겨 크리스마스이브행사가 모두 끝났다.
문희숙이 꽃다발을 준 남자와 문승협을 찾아왔다. 문승협과 친구들이 다 같이 인사했다.
“잉, 승협이 친구들이냐?”
“네.”
“으짜디, 재미있디?”
“네, 재미있었어요.”
“너는 누구냐?”
“저는 최선경이예요.”
“아, 니가 말로만 듣던 선경이구나, 그 피아노도 치고. 아따 깨끗하니 이쁘게 생겼다잉, 키도 크고.”
“감사합니다.”
“니가 승협이냐?”
“언능 인사해라, 요번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는 고모남자친구여.”
“안녕하세요.”
“그래 만나서 반갑다, 고모남자친구 이민현이다.”
“허허허, 남자친구가 아니라 애인이겄지라.”
“하하, 니 이름은 뭐냐?”
“김철종인디라.”
“아따 그놈 참 똑똑하다잉. 승협이는 밥 많이 묵어야 쓰겄다, 여자친구보다 클라믄.”
“네?”
“하하하, 호호호.”
“잉, 받어,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합니다.”
문희숙은 크리스마스선물로 사탕과 과자가 든 봉지를 하나씩 나눠주고 남자친구와 교회를 떠났다.
동방박사분장을 한 중등부학생들이 장난치며 교회를 휘젓고 다녔다. 교회는 축제분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교인들로 어수선했다.
문승협과 친구들은 교회를 빠져나왔다. 모든 전파사가 끊임없이 캐럴을 틀어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곳곳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메리크리스마스’를 인사로 외쳤다. 자선냄비 옆에서 구세군이 흔드는 종소리만 지나가는 사람을 쓸쓸히 지켜보았다.
문승협은 최선경을 집에 바래다주면서 성탄카드를 교환하였다. 졸려하는 문현아를 달래어 걷다 업기를 반복해 11시가 다되어 집에 왔다. 거리에는 여전히 통행금지해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1945년부터 저녁 12시에서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와 신정만큼은 임시해제하였다. 밤새워 다닐 수 있는 특혜의 날이었다. 해방감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거리에 구름 떼처럼 몰려다녔다. 번화가는 만취해 비틀거리거나 고성방가 하는 사람들이 넘쳤다. 거리곳곳에 토한 자국이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문승협은 새벽녘 집 앞에서 부르는 새벽송을 들었다. 나가볼까 하다 귀찮아서 뒤척였다. 고모들 방 쪽에서 나가는 인기척에 그냥 잠을 청했다.
보통 새벽송은 교인집을 찾아가 불렀다. 교인은 먹을거리나 선물을 주었다. 간혹 교인집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조용히 넘어가기도 하고 자는데 시끄럽게 떠든다며 욕하는 고약한 사람도 있었다. 일부 신자와 비신자들은 새벽송을 핑계로 외박하거나 탈선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느지막이 일어난 문승협남매머리맡에 선물로 보이는 두툼한 포장이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뜯었다. 털실로 짠 모자와 손 모아 장갑(벙어리장갑)이었다. 문승협은 산타클로스선물이라고 믿었다, 한 달 전부터 큰고모가 뜨개질한 기억을 지워서라도 절대 큰고모선물이 아닌 산타클로스선물이어야 했다. 일 년 동안의 생활평가로 받은 산타클로스선물이어야 산타클로스에게 인정받고 하나님에게까지 이른다는 오묘한 상상력이었다. 부모와 함께 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이루려면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절박감이었다.
“승협아, 으짜냐, 선물은 맘에 드냐?”
“네, 아주 맘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고모.”
문승협은 산타클로스를 부정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 속으로는 산타클로스에게 감사하다고 최면 걸었다.
“어제 교회에서 본 고모남자친구는 으짜디?”
“멋있어요, 공부도 잘하고.”
문희숙은 남자친구 이민현을 은근히 자랑하였다. 이민현은 목포에서 자라 명문국립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우리나라 3대 명문대학 중 하나인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다니다 군대도 다녀왔다. 이번에 졸업하면서 외국계은행에 취직까지 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며칠 뒤 이민현이 집으로 인사 왔다. 박옥춘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다는 말에 놀라면서도, 연세대졸업예정과 외국계은행에 취직까지 했다는 사실엔 흡족하였다. 보통 키에 마른 풍채로 종갓집장남이라는 점은 탐탁지 않아 했다.
문승협에게 예비 큰고모부인 이민현이 다녀가고 소란이 일었다. 박옥춘과 막내딸 문희경이 그동안 쌓인 감정이 서로 폭발하였다. 박옥춘이 문희경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민현이 내년이나 늦어도 내후년 봄엔 결혼하고 싶다는데, 마른 풍채와 종손이라서 맘에 안 들지만, 좋은 직장에 좋은 대학은 맘에 든다’고 하면서 사달이 났다.
“거보쑈, 엄마도 대학 대학하믄서, 으째 나 대학 가는 걸 방해하요?”
“아야, 내가 언제 방해했다고 그라냐? 느그 애비가 못 가게 했제 내가 그랬냐?”
“아부지가 그라믄, 엄마가 설득해서라도 보내야제, 가만히 보고만 있으믄 다요?”
“오메, 염병하네 참말로. 느그 언니 봐라, 느그 언니도 대학 안 가고, 은행 다니다가 시집만 잘 가냐.”
“내가 언니랑 같소, 언니는 언니고 나는 나여.”
“쓰잘데없는 소리 말어. 외숙회사에 들어가서 일하다가, 그냥 선보고 시집이나 가.”
“회사고 시집이고 뭐고, 나는 암것도 안 할란께 맘대로 하쑈.”
“그럴라믄 나가 뒤져 부러, 나한테 염병하지 말고.”
“알았소, 분명히 말했지라. 내가 뒤지든지 염병하든지 할 텐께, 나중에 후회나 마쑈.”
문희경은 ‘여자는 직장 다니다 좋은 남편 만나 결혼하면 된다’는 남성중심적사고에 사로잡힌 아버지 문재환을 설득하기에 벅차서 엄마 박옥춘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외면당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입학예비고사를 치른 상황이었다. 본고사를 앞둔 자기 인생을 위한 마지막 투쟁에 나섰으나 가망이 없어 보였다.
박옥춘과 문희경은 대학진학문제로 갈등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그 파편이 문승협남매에게 날아갔다. 문승협남매는 밥 먹다 벼락 맞은 마냥 눈치로 한 해를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1976년 국민학교5학년 문승협인생이 송구영신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과거로 사라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