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9)
이틀뒤 일요일, 워싱턴포스트가 미국정치계와 한국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코리아게이트사건을 게재했다. 뉴욕타임스는 최대 115명의 상·하원의원들이 연루됐을 것이라고 전파하였다. 하워드베이커상원의원은 최소 50여 명이 직접적인 뇌물수수와 연관되었다고 추정했다. 이 같은 보도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한미간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고 미국 전체를 휘감는 거대한 정치스캔들로 발전하였다. 미국 CIA, FBI, NSA와 국무부, 법무부 등이 총동원되어 코리아게이트 관련자들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미국하원에서도 국제관계소위원회, 이른바 '프레이저위원회'가 구성돼 청문회가 열렸다. 최종 프레이저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귀추가 주목되었다.
1970년대 들어 박정희대통령지시로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에게 친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매년 현금 백만 달러를 포함한 뇌물을 뿌렸다는 주장이었다. 미국행정부가 주한미군철수를 시작하면서 한국군의 현대화계획을 위한 군사원조는 의회의 예산승인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했었다. 이에 한국정부가 미국의회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로비를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코리아게이트로 알려진 한국 박동선과 중앙정보부의 로비사건은 박정희정권유신체제 인권문제와 함께 한미관계에 치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일주일 지난 11월 2일에 지미카터가 미국 제3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코리아케이트사건은 지미카터의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촉진시켰다. 한미관계가 최악 사태로 치달았다.
문승협이 은행에 다니는 큰고모 문희숙과 아침을 먹고 있었다. 3주 전 터졌던 코리아게이트사건이 언론통제로 잠잠하다 아침뉴스에 짤막하게 나왔다.
“큰고모, 백만 달러면 우리나라 돈으로 얼마예요?”
“뜬금없이 달러는 뭐 할라고. 달러가 480원 정도 된께, 한 4억 8천만 원 정도 된디, 왜?”
“방금 뉴스에 나와서요, 큰돈이에요?”
“고모월급을 한 푼 안 쓰고 800년을 모아도 될똥말똥한께, 무자게 큰돈이제.”
“우아, 800년이요?”
문승협은 큰고모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학교 갈 시간이 되어 서둘러 먹고 가방을 챙겨 대문을 나섰다. 등굣길 학생들 옷차림이 두툼하였다. 불과 며칠사이에 날씨가 쌀쌀해졌다
김철종이 혼자 구시렁거리며 교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문승협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야, 백만 달러믄 얼마냐?”
“한 4억 8천만 원 정도.”
“큰돈이냐?”
“아마도 너희 아빠월급을 한 푼 안 쓰고, 한 800년은 모아야 할걸.”
“뭣이어, 그렇게나 큰돈이라고? 근디, 니가 우리 압씨 월급은 어떻게 알고 그냐?”
“야, 대충 그렇단 애기지. 아무튼, 최소 조선왕조 오백 년은 걸릴걸.”
“너는 모르는 것이 없다잉, 존경해마지 않는다.”
“그럼 더 깍듯이 모시든가.”
“이 이상 얼마나 더 깍듯하게 모시 까요 승협씨? 형님으로 모실 까라?”
“오냐 동생아, 하하하.”
문승협은 큰고모에게 듣고 알았지만 시치미 뗐다. 마치 자기 지식인양 장난스럽게 우쭐댔다.
“그렇게 큰돈을, 순 도둑노무시끼들이네.”
“누구?”
“박통말이어, 매년 미국에 뽀찌를 찔러줬다잖애.”
“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선생님이 조회시간에 누누이 주의 줬잖아.”
“임금님 없으믄 다 욕하는 것이제, 내가 뭐 틀린 말 했간디.”
“경찰이 잡아간다잖아, 조심해야지.”
“와따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니가 몸 사리는 야그를 다하고잉.”
“어제말이야, 지나가던 경찰이 후문 문방구아저씨를 잡아갔대, 정부 비방했다고.”
“염병, 요즘은 말도 못 하게 지랄들이어.”
“스읍, 철종이 넌 특히 입조심하라고, 경찰서로 면회 가고 싶지 않으니까.”
“알았어, 알았단께. 이따 점심에 족구나 하러 가자.”
김철종이 점심을 먹자마자 문승협을 이끌고 교실을 나섰다. 문승협이 운동장에 다다라 동산구석 쪽에 모여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보았다.
“철종아, 저긴 뭐 하는 거지?”
“김용남도 있고, 조동구도 있고, 선도부랑 선도부장 김일한도 있는디? 뭔 일이까?”
“선도부장 김일한이 있으면 별일 없겠다.”
“그래도 궁금한디 한번 가보자.”
그동안 선배 남강과 박현이 자의 반 타의 반 김용남뒷배경을 해주었다. 그러나 새로운 학생회가 조직된 데다 코앞에 닥친 중학교입학시험에 몰두하느라 학교에서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를 기다렸던 조동구일당이 힘의 권력을 호시탐탐 노렸다. 새로운 학생회장 김용남을 따르는 아이들이 득세하여 위세부리면서 두 세력 간 충돌은 불가피했다. 때마침 김용남을 추종하는 강모세와 조동구파 넘버쓰리 이진구간의 사소한 시비가 패싸움 양상으로 번졌다. 김용남이 선도부를 동원해 수적열세인 조동구일파를 제압하려는 상황이었다.
“이런 쪼잔한 시끼들, 인자는 선도부를 끌고 와?”
“야 짱구, 조동아리 닥쳐라잉, 확 조사불기 전에.”
“이씨 대갈팍 뽀개버리기 전에 너도 아가리 닥쳐. 아야 김용남, 우리 둘 맞짱으로 끝장 보자.”
“야 조동구, 나는 학생회장이어, 학생회장이 싸우믄 쓰겄냐?”
“쫄았냐? 엇다가 학생회장을 들이대?”
긴장감이 감돌았다. 김용남과 조동구가 입싸움으로 일촉즉발의 시간을 늦췄다. 김철종이 껴들었다.
“느그들 뭐더냐? 뭔 일인디 학교에서 패싸움이대?”
“야 쫑, 디질래, 어디서 찌꺼리 해파리가 깝치냐.”
“세모야, 고따구로 싸가지 없이 말하다가, 아구창 돌아간 놈 여럿 봤다잉.”
“쫑, 가서 똥이나 핥아. 니가 낄 데가 아닌께, 저짝에 찌그러져 있어라잉.”
“큭큭큭.”
김용남면박에 김철종이 위축돼 울그락불그락하였다. 주위 선도부아이들이 웃자 문승협이 제지했다.
“너희들은 선도부면서 웃음이 나오니?”
“뭐여, 쫑의 주인이 납셨네. 야 서울놈, 쓸데없는 간섭 말고 조용히 꺼져.”
“김용남, 철종이를 모욕하지 마. 난 철종이의 주인이 아니라 친구다.”
“씨발, 너도 오늘 디져 볼래?”
“친구를 개 취급하면, 너도 결국 개 취급받는 거야.”
“어허, 이 새끼가 진짜.”
“김일한, 넌 선도부장이잖아. 선도부장이면 싸움을 말리고, 공정하게 처리해야지 않아?”
“…….”
“학교 전교생의 선도부장이고 선도부원이지, 학생회장의 선도부가 아니야, 안 그래?”
“…….”
“물론 싸우면 안 되겠지만, 그래 싸울 수도 있어. 싸우려면 남자답게 정정당당 일대일로 하든가. 선도부까지 데려와서 열댓 명이 세 명을 상대하다니, 이건 비겁하잖아.”
“야 서울놈, 누가 누굴 데려왔다고 지랄 염병이셔.”
“김용남, 학생회장이면 양심도 회장다워야지, 안 부끄러우냐?”
“그래 승협아, 니 말이 맞어. 선도부장이면 이러면 안 되는디, 내가 실수했다야. ”
잠시 생각하던 선도부장 김일한이 문승협 지적에 잘못을 인정하였다. 그러고는 조동구일파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김용남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승협아, 학교 전교생의 선도부, 명심하께.”
“일한아, 내 말 들어줘서 고맙다.”
김일한이 선도부원들을 인솔하여 자리를 떠났다. 김용남이 잡아먹을 것처럼 문승협을 째려보며 자기 일당을 데려갔다. 문승협과 김철종도 운동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동구가 피식 웃으며 혼잣말했다.
“저 시끼 희한한 놈이네.”
“동구야, 누구 말이냐?”
“누구긴 누구여, 서울놈 이제.”
“그란께 말이어, 뭔가 맘에 안 든디 밉지는 않은. 씨발, 말로 표현이 안 된다.”
“겁도 없고 편도 없으믄서, 누구 편도 안 들어.”
“나는 그래도 왠지 싫어, 저 새끼.”
조동구와 강덕구는 문승협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반감은 많이 누그러졌다. 반면 이진구는 여전했다.
김철종이 동산을 다 내려와서 문승협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승협아, 니 심장은 제대로 붙어있냐?”
“여기 이렇게, 뚜쿵뚜쿵 잘 뛰고 있다.”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단께. 일한이가 니 말 안 들었으믄, 우린 송장 됐어야.”
“하하, 사람은 쉽게 안 죽어. 그리고, 일한이는 생각이 바른 아이야.”
“니가 일한이를 어뜨크롬 아냐?”
“평소 행동 보면 알지, 뭐 다른 거 없어.”
사실 문승협도 큰 싸움이 되거나 몰매를 맞을까 봐 오금이 저렸었다. 확신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김일한을 믿고 용기 낸 것이었다. 반신반의했던 김일한이 싸움을 공정하게 수습하고 해산시켜 다시 보았다.
“하기사, 아까도 일한이가 서로 사과하지 않으믄 교무실에 보고하겠다고 한께는, 양쪽 다 두말없드만.”
“지나다니면서 몇 번 봤는데, 선후배나 친구들한테도 다 친절하더라고.”
“그나저나, 너 용남이랑 계속 척져서 으짤라고 그라냐, 진짜 걱정스럽다.”
“원수지간도 아닌데, 언젠간 풀리겠지.”
“니 생각멩키로 용남이 생각도 그라까?”
“둘이서 뭐가 그리 심각해?”
“오메 깜짝이야, 오늘 심장이 남아돌지 않그만잉.”
동산에서부터 뒤쫓던 최선경과 제갈민주가 살금살금 둘에게 다가가 불쑥 말을 걸었다. 김철종이 소스라쳤다.
“호호호, 뭘 그렇게 놀래, 너희들 무슨 일 있지.”
“아냐, 별일 없어.”
“느그들 아까 동산구석에 몰려있는 거 다 봤어, 언능 실토해라잉.”
“재잘아, 이 오빠가 해결했은께, 신경 꺼.”
“염병, 오빠귀신이 붙었나, 입만 열믄 오빠여.”
“문승협, 다음부턴 절대 저런데 끼지 마, 알았어?”
“선경아, 진짜 별일 없었어, 진짜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다음부턴 참견마라고, 응?”
“알았어, 그럴게.”
“음마? 아따 승협씨, 완전 순한 양이 됐네요잉.”
“철종이 너도, 알겄냐?”
“네, 알아 모시것슴돠 재잘님.”
“둘 다 꼭 약속 지켜. 그리고, 이거.”
“뭐시데, 편지여? 아따 말로하제 그러까잉.”
“이번 토요일이야, 늦지 않게 와.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그냥 오면 돼.”
“음마, 선경마님 귀빠진 날이그만.”
“올 거지?”
“응, 갈게.”
“참, 현아도 데려와.”
최선경은 문승협 의사를 확인하고 제갈민주와 교실 쪽으로 총총 뛰어갔다.
“아야, 오늘 족구는 틀렸는갑다, 아그들도 다 교실로 들어간다야.”
“우릴 기다렸을 텐데, 좀 미안하네.”
문승협도 김철종과 교실로 방향을 틀었다. 최선경생일초대장을 구김 없이 꽉 쥐었다.
문승협은 친구생일선물을 준비하는데 깊게 고심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이성친구생일선물이기에 며칠을 심사숙고하였다. 가장 큰 팬시점부터 안 가본 문구점이 없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여전히 뭔가 빈약하게 느껴졌다.
문승협남매는 하교하자마자 집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최선경집으로 출발했다.
문현아는 흰색블라우스에 빨간색체크무늬멜빵치마와 남색스웨터를 입었다. 문승협은 흰색셔츠에 회색멜빵바지와 체크무늬재킷을 걸쳤다. 나비넥타이와 헌팅캡은 과해 보여서 가방에 넣었다. 동생과 한 것 차려입은 이유는 최선경에게 멋있어 보이려는 바람도 있지만, 부모와 떨어져 살아서 처량해 보일까 하는 자격지심이었다.
최선경집 앞에 도착했으나 약국문이 닫혀있어 건물옆 계단으로 올라갔다. 2층 병원으로 보이는 곳도 불이 꺼져있어 당황했다. 3층에서 어렴풋이 제갈민주목소리가 들려와 올라갔다. 문이 조금 열려있었지만 불쑥 열고 들어가기 마땅찮아 초인종을 눌렀다. 최선경엄마가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아줬다.
“어서 와, 현아도 어서 와라.”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잘 왔다.”
“이거, 우리 집 담장에 핀 장미예요.”
“와, 현아 매력만점이네. 고맙다, 네가 꺾은 거야?”
“네, 꺾다가 가시에 찔려 아팠는데, 이젠 괜찮아요.”
문현아가 집정원담장에 져가는 장미들 중에서 성해 보이는 흰색과 빨간색 장미를 다섯 송이씩 꺾었다. 가시를 제거하고 색도화지에 싸서 끈으로 묶은 엉성한 포장이었다. 최선경엄마가 문현아손가락을 살펴주며 기특해하였다. 뒤이어 나온 최선경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문현아가 뒤춤에 숨긴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우리 현아 예쁘게 하고 왔네.”
“언니, 생일축하해요. 이거, 생일선물.”
“우아, 내 거도 있어? 향기 엄청 좋다, 고마워.”
최선경이 꽃내음을 맡고 과장되게 감동했다. 문현아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문승협남매는 최선경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김철종과 제갈민주를 포함한 운동회 때 같이 점심 먹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문승협은 뜻밖에 이정주가 있어서 다소 서먹하게 인사했다. 최선경이 금방 눈치채고 설명하였다.
“이정주네 사진관이 건너편에 있어, 부모님들끼리도 잘 아는 동네친구야.”
“으째 나 보고 놀란 거 같다.”
“놀란 건 아니고, 선경이랑 어떻게 아나 해서.”
“선경이를 알기로는 정주가 승협이보다 먼저제.”
“그것이 중하냐, 다 같은 친구라는 것이 중하제.”
이정주가 자신도 문승협을 보고 놀랐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짚었다. 문승협도 밀리지 않으려고 숨김없이 말했다. 김철종의 빗나간 답변을 제갈민주가 꼬집어 정리했다. 최선경엄마가 오렌지주스를 가져오면서 어색한 분위기가 풀렸다.
“자, 우선 주스 마시고 있어, 곧 식사하자. 참, 내년 봄에 우리 이사할 거야.”
“얼로 가신디라우?”
“학교 근처에 박동후회장집 있지? 그쪽이야.”
“와따, 거그는 집도 크고 부촌인디.”
“부촌은 무슨, 아마 거기서 제일 작은 집 일거야.”
“여그 병원하고 약국은 으짜고라?”
“여긴 그대로 하지, 집만 이사해.”
“그라믄 송별회는 안 해도 되겄소잉.”
최선경엄마가 넉살 좋은 김철종호기심에 일일이 답변해 주고 방을 나갔다. 박진숙이 지난 소풍 때 찍은 단체사진액자를 보았다.
“선경이 발목은 인자 괜찮하냐?”
“응? 아 그때, 그냥 타박상이었어, 지금은 더 튼튼해졌을걸.”
“고것이 다 백마 탄 왕자 땜시제, 안 그냐 승협아.”
문승협은 김철종에게 웃어 보이며 사진을 보았다. 맨 앞자리에 문승협과 발목에 붕대를 감은 최선경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문승협과 아이들이 액자사진을 보는 사이, 박진숙이 책장을 두리번거리다 앨범을 꺼내 들었다.
“선경아, 앨범 좀 봐도 되까?”
“응, 봐.”
여자아이들이 책장에서 앨범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박진숙이 펼친 앨범은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현기정이 보는 앨범은 가족사진이었다. 태어나서 국민학교입학 전까지 사진이 꽂힌 앨범을 보던 제갈민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야, 느그들 재미난 사진 한번 볼래?”
“뭔디?”
“최선경 나체사진, 깨복쟁이 최선경.”
“야, 그건 안돼.”
제갈민주가 발가벗은 최선경의 갓난아이적 사진을 손으로 반쯤 가리고 있었다. 최선경이 전광석화처럼 앨범을 가로채 꼭 움켜 안았다. 얼굴이 금세 홍당무가 되었다.
“오매 아까운 거, 최선경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는디, 흐흐흐.”
“알았어 알았어, 안보께. 그다음 거부터 보께, 그라믄 되제?”
“잠깐 기다려봐, 뺄 건 좀 빼고.”
“김철종, 음흉한 놈아, 그 능글맞은 웃음 좀 닥쳐라.”
“호호호, 하하하.”
최선경이 앨범을 넘겨가며 사진 몇 장을 빼내 숨겼다. 다시 한번 빠르게 확인하고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앨범을 내려놓았다. 아이들이 다시 앨범을 보려고 머리를 모았다. 김샌 표정을 짓던 김철종이 책장에서 작은 앨범을 꺼냈다. 최선경이 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재빨리 가로챘다.
“앗, 미안. 이것도 안돼.”
“아따, 사람 초대해 놓고 안되다고만 하믄, 실례 아니어? 으째 막 서운할라고 한다.”
“철종아 미안. 그치만, 이건 절대 안 돼, 진짜 안돼.”
다들 도대체 무슨 앨범이길래 저렇게 당황하고 정색할까 하는 표정으로 최선경을 쳐다봤다. 최선경이 김철종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문승협을 바라보았다.
“안 된단께 더 보고 싶은 것은 나만 그라까?”
“내가 찍은 풍경사진앨범인데, 정말 창피해서 그래.”
아이들은 최선경의 어설픈 변명에 속아줄 의향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최선경의 표정과 시선으로 보아 분명 문승협과 연관 있다고 의심하였다. 아이들의 집요한 관심을 돌린 건 구세주처럼 등장한 최선경의 아버지였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친구들 오셨나.”
“아 아빠.”
“안녕하세요.”
“어제는 반 친구들이고, 오늘은 어떤 친구인고?”
“제일 친한 친구들이야 아빠.”
“오호라, 그럼, 여기 우리 공주님 남자친구 있나?”
“…….”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니?”
“문승협입니다.”
최선경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딸남자친구 찾기를 하였다. 질문과 동시에 아이들 시선이 문승협에게 꽂혔다. 문승협은 아이들 시선에 못 이겨 얼떨결에 일어나 인사했다. 최선경아버지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문승협을 멋쩍게 하였다. 김철종과 가병수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는 반면, 이정주는 불편한 기색이었다.
“얘들아, 이제 밥 먹자.”
“네.”
“선경이 생일이 어제여서, 어제는 반친구들이 왔었거든. 선경이가 토요일에 해야 오래 논다면서, 너희들을 오늘 초청한 거란다. 그러니 많이 먹고, 재미나게 놀아.”
“네, 잘 먹겠습니다.”
“아줌마, 난 어제도 와갖고 눈치 보인디, 으짜까라.”
“호호, 민주야 괜찮아, 많이 먹어.”
“백금녀나 오천평되믄, 아줌마가 책임지쑈잉.”
“하하하, 호호호.”
“저기, 식사시작 전에 선물 줘도 될까요?”
“그래, 좋을 대로 하렴.”
“별거 아니야, 생일 축하해.”
“고마워, 그냥 오라니깐.”
“나도 별거 아니어, 축하해.”
“그러면, 나는 사진을 쫌 찍어줄까.”
문승협이 선물을 건네자, 아이들도 따라서 준비한 선물을 주었다. 최선경아버지가 카메라를 가지러 갔다. 문승협이 선물을 꺼낸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았다. 김철종이 문승협가방 안을 유심히 보았다.
“아줌마, 전에 소풍 때 주셨던 손수건이에요.”
“어머, 난 잊고 있었는데.”
“진작 전해드려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고맙지. 그러고 보니, 승협이가 선경이아빠랑 닮은 점이 있네.”
“뭔데, 아빠랑 승협이랑 뭐가 닮아?”
“아빠도 엄마랑 연애 때, 손수건주면 꼭 나중에 챙겨줬거든. 여보, 생각나요?”
“그럼, 손수건이 이별의 상징이라 꼭 돌려줬어. 엄마랑 헤어지기 싫어서, 하하하.”
“아빠도?”
“아마도, 그 손수건 안 돌려줬으면, 선경이가 안 태어났을지도 몰라. 헤어져서, 하하하.”
최선경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김철종이 갑자기 문승협가방에서 나비넥타이와 헌팅캡을 꺼내 쓰면서 장난쳤다.
“호호호, 야, 순사 같아.”
“내가 순사 같으믄, 승협이도 순사게?”
“승협아, 너도 나비넥타이랑 한번 해봐.”
“좀 쑥스러운데.”
“오, 승협인 영국신사 같다. 그렇지 엄마.”
“그러네, 멋있다.”
“사랑하믄 눈이 먼다드만, 여그서 확인 하그만, 칫.”
“호호호.”
“철종이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냐, 하하하.”
“자, 음식 식으니까, 선물은 이따 풀고 어서 먹어라.”
문승협은 부끄러워 몸 둘 바 몰라하며 나비넥타이와 헌팅캡을 벗어 가방에 넣었다. 이정주는 무덤덤하고 모두 유쾌한 기분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최선경이 문현아를 옆에 앉히고 자상하게 갈비찜과 생선을 발라주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갈 무렵 선물꾸러미를 풀었다.
“이게 승협이 선물이지? 뭐야, 편지는 없어?”
“안에.”
“음, 여기 있군.”
“뭐라고 썼냐? 아따 소리 내서 읽어봐라.”
“지난여름에 네가 아파서 너무 슬펐고 많이 미안했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할게. 진심으로 생일축하해, 문승협.”
“뜸 들이길래, 뭔 비밀이라도 썼나 했드만.”
“달랑 엽서야? 편지는 없어?”
“어? 어, 미 미안, 편지는 다음에 줄게.”
“근디, 선물은 뭐데. 다이어리 오브 파이브이얼스?”
“우아, 이거 내가 갖고 싶었던 그 일기장이네, 5년짜리 일기장.”
“아직 목포엔 안 왔다드만 어서 샀냐? 광주나 가야 있다던디.”
“오거리에 있는 팬시문구점, 며칠 전에 들어왔대.”
최선경은 내심 기대한 편지가 아닌 엽서라 섭섭했으나, 생각지 못한 문승협 선물에 기뻐하였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해 일기를 빠트리지 않는 최선경에게 안성맞춤 생일선물이었다.
문승협은 엽서에 아쉬워하다 다이어리를 들고 즐거워하는 최선경모습에 마음 놓였다.
최선경이 딴 선물포장을 뜯고 있었다. 문현아가 물을 찾았다. 최선경아버지가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여보세요 공주님, 선물에 신경 팔려 시누이 물도 안 챙기면, 나중에 시집살이당해요.”
“호호, 아빠가 따라줬으니까, 현아 아가씨가 이해해 주겠지 뭐.”
“이야, 아빠가 이런 말하면, 옛날엔 펄쩍 뛰며 화냈는데. 진짜 승협이를 좋아하나 보네?”
“아빠는 짓궂게 장난은, 내가 언제 그랬다고.”
“작년 정주네 가족과 식사할 때. 아빠들끼리 사돈 맺는다니까 싫다고 울먹였잖아. 여보 생각 안 나?”
“왜 안 나요, 식사하다 집에 간다고 해서 한참 달랬죠, 호호호.”
“어휴, 그땐 아빠장난에 장단 맞춘 거야.”
“어? 당황하면서 뒤늦게 부정하고, 얼굴도 빨개지고. 진짜 수상한데?”
“아이, 아빠 그만 좀 해요.”
“하하하, 호호호.”
다들 최선경행동을 재미있어하며 깔깔댔다. 문승협은 겸연쩍어하며 웃고 이정주만 썩소를 지었다. 최선경아버지가 딸 반응에 작심한 듯 문승협부모에 대해 물었다.
문승협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최선경엄마가 거들었다.
“승협이 할머니가 박동후회장 친동생이래요, 부모님은 서울에서 사업하시고.”
“당신이 어떻게 알아?”
“이번 학교가을운동회에서 승협이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때 들었어요.”
“태선화학 박동후회장? 그럼, 우리 공주님이 태선화학 손자며느리 되는 건가, 하하하.”
“어휴, 당신답지 않게 무슨 말이에요. 애들 앞에서 속물처럼.”
“하하,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도 좀 지나쳤어요.”
“그런가? 미안. 그럼, 승협이 아버지는 무슨 사업하시고, 어느 대학 나오셨나?”
“여보, 친구가 중요하지 왜 부모에 대해 물어요?”
“왜, 자식친구들 오면 다들 궁금해서 물어보잖아.”
“안 되겠다, 너희들은 선경이 방에 가서 놀아라.”
최선경이 앞장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도 따라가 앨범 주변으로 모였다.
문승협은 운동회 때 할머니와 최선경엄마가 대화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 엄마아빠에 대해 험담했을까 봐 염려되었다. 그러나 최선경엄마는 문승협걱정과는 달랐다.
“여보, 자식친구부모가 무슨 일 하고 어느 대학 나온 게 왜 중요해요, 자식이 좋아하는 친구가 중요하죠.”
“그렇긴 해도, 자식친구가 어떤 환경에서 자란 아이인지 다들 궁금해하잖아. 혹시나, 자식이 질 나쁜 아이랑 어울릴까 봐 걱정돼서 말이요.”
“당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선경이는 승협이 부모의 직업이나 교육 수준 같은 가정환경을 보고 친구가 된 게 아니에요. 그냥, 승협이가 자기 마음에 들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 거란 말이에요. 선경이에게 승협이의 가정환경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린 자식이 좋아한다고, 무턱대고 아무나 친구 하게 할 순 없잖아요?”
“왜 그게 아무나예요, 선경이가 선택한 거죠. 선경이 선택을 존중해 줘야죠, 당신도 지금까지 그래왔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래요?”
“그러게, 하나밖에 없는 내 딸이라서 그런가?”
“하긴, 딸 바보인 당신이니까 이해는 해요. 하지만, 자식이 좋아하는 친구에게 불필요한 질문을 해서 상처 주는 건 어른답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알아지는 일인데, 어린아이가 뭘 안다고 자꾸 부담스러운 질문을 하세요, 그러면 안 되죠.”
“상처를 준다고?”
“그럼요. 만약 당신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고 학교도 못 다녔는데, 당신 친구아버지가 당신에게 물어보면, 대답하는 당신 마음이 어떻겠어요. 어른시선으로 자식친구에게 지나친 사적 질문은 자칫 상처를 줄 수 있어요.”
“그러네, 내가 실수했네요.”
부모들이 자녀의 친구가 집에 오면 부모의 직업과 교육 수준뿐 아니라, 집은 몇 평에 가전제품은 뭐가 있는지 가정조사에 가까운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 실상이었다. 정작 아이들은 왜 물어보며 무슨 말인지조차 몰랐다.
문승협은 친구들과 사진을 넘겨보면서도 최선경부모대화에 신경 쓰였다. 부부가 다툼이나 목소리조차 커지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의견을 교환하는 다정함이 부러웠다. 아니 최선경의 가정이 부러웠다.
“선경아, 느그 엄니아부지는 안 싸우냐? 우리 집 같았으믄 난리 났다 난리 났어.”
“왜? 기정이 너희 엄마아빠도 잉꼬부부잖아.”
“염병, 남들 앞에서만 그래야. 판사의 위엄이 몸에 밴 울아부지 땜에, 엄마가 꼼짝 못 해.”
“아야, 선경이 집이 이상한 거여. 안 그냐 진숙아?”
“뜬금없이 날 끄집고 난리냐. 할무니병치레 땜시 심란해서 그라제, 요즘은 좋아야.”
“승협이 느그집은 으짜냐, 안 싸우제?”
“철종이 말에 동감이야, 우리 엄마아빠도 많이 싸워. 선경이네 집이 이상한데, 부럽다.”
“정상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부럽게 한 어른들 잘못인디, 죄는 꼭 우리가 진 것 같다잉.”
가병수와 제갈민주도 동병상련이라며 부모싸움성토에 참전했다. 이정주가 자기 부모는 절대 안 싸운다며 정색해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현기정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최선경에게 피아노를 청했다.
최선경이 피아노로 갔다. 모두 피아노에 앉은 최선경 옆으로 모였다. 문승협이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신청하였다. 최선경의 피아노학원에서 엿들은 이후 큰고모에게 조금씩 배우고 있는 곡이었다. 다들 몽글몽글한 감정으로 심취해 들었다. 최선경이 제갈민주앙코르에 문현아를 바라보고 가곡‘별’을 치기 시작했다. 김철종이 마침 방으로 들어오는 최선경엄마에게 문승협을 가리키며 입모양과 손동작으로 노래시키라고 하였다.
“소풍 때 보니까, 승협이 노래 잘하더라. 우리 선경이 피아노연주에, 승협이 노래 한번 듣자.”
“와, 짝짝짝.”
최선경이 문승협에게 준비할 시간을 잠시 주고 전주를 쳤다. 문승협이 최선경눈사인을 받아 노래했다. 최선경아버지도 와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 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도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브라보. 와따, 최근 본 공연 중에 가장 멋져부렀어.”
“진짜, 노래 너무 좋다.”
“야, 잘한다. 공주님 연주에 왕자님 노래, 하모니가 환상적이구나.”
“야 김철종, 남녀혼성일 때는 브라보가 아니라 브라비라고 하는 거여.”
다들 환호하며 박수를 쳤으나, 이정주가 김철종에게 한마디 하고 과외를 이유로 먼저 갔다.
“하하하, 정주가 승협이를 질투하나 보다.”
“무슨 소리예요?”
“이렇게 다들 눈치가 없어서야, 아까부터 승협이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더라고.”
“글고 본께, 아까 방에서 뜬금없이 정색하긴 했어.”
“정주가 평소 화를 잘 안 낸디, 오늘따라 이상하다 했드만은, 다 승협이 땜시였그만.”
“얼래리꼴래리, 얼라리꼴라리.”
“승협이 긴장해야 쓰겄다, 이정주가 경쟁잔가부네.”
“근디, 이미 기울어졌어야, 선경이 마음은 승협이한테 가부렀어.”
“니가 으째 아냐?”
“아야, 이미 알만한 가시나들은 다 알어, 모른체끼해서 그라제.”
“야 그만, 이상한 소리 그만해. 나 승협이한테 부탁이 있어, 내년 생일에는 승협이가 피아노 배워서 노래랑 불러줘. 어때, 해줄 수 있지?”
“오, 당돌한 내 딸. 과연 승협이의 대답은?”
“아 알았어, 열심히 배워볼게.”
최선경아버지는 딸바보라서 문승협에게 질투할 만도 했으나, 딸의 사랑과 관심을 뺏긴다는 서운한 마음보다 행복한 모습에 의미를 두기로 했기에 응원하였다. 최선경엄마가 친구들 놀림에도 아랑곳없는 최선경과 문승협을 보면서 남편의 소매를 잡아끌고 거실로 나갔다.
“선경이는 아파서 그런지, 연약하고 소극적이면서 수줍음 많은 아이인데, 승협이에게는 강해지고 적극적이면서 당돌해요. 놀랍지 않아요?”
“나도 놀랐어, 선경이에게 저런 모습이 있을 줄은.”
“아까, 승협이 엽서글 기억나요? 선경이가 여름에 아팠을 때, 서울에 가서 치료받는 걸 슬퍼하고, 자기 탓으로 미안해하며 가슴 아파하더라고요. 앞으로 건강하게 행복하길 기도 한다는 말에, 승협이 진심이 느껴져서 눈물 날뻔했어요. 저 아이는 뭔가 특별한 게 있어요.”
“어찌 보면 평범한 글인데, 나도 약간 울컥했어.”
“그리고, 당신 너무 서운해 말아요. 선경이가 승협이에게 신경 쓰면서도 아빠눈치 볼 때는, 아빠마음도 알고 이해한다는 뜻이니까요.”
“하하하, 그래. 그런데, 서운한 건 사실이요.”
아이들은 조금 더 놀다 저녁시간에 가까워 최선경집을 나섰다. 문승협은 동생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현아야, 오늘 어땠어?”
“재미있었어, 그리고 선경언니네가 부러웠어.”
“어떤 게?”
“엄마아빠랑 같이 사는 것도 부럽고, 다정한 엄마아빠모습도 부러웠어. 오빠는?”
“그렇지, 오빠도 좀 부럽더라. 많이 행복해 보였어.”
다정한 부모와 삶이 지극히 정상임에도 문승협남매에게는 특별해 보이고 부러움이었다. 문승협은 생각했다. ‘내게도 분명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을 텐데, 왜 그런 순간들은 기억에 없을까? 기억이 안 나는 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항상 뭐든 잊고 살아서 그런가? 앞만 보고 쫓아가느라 기억할 시간이 없어서일까? 그러고 보면 행복은 형태가 있는 물질이기보다는 무형의 감정을 통해 느끼는 것이구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