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본다. 오후 3시 30분. 두 시간쯤 후면 이곳을 나설 것이다. 계획은 오후 5시 반 퇴근이지만, 실은 딱히 퇴근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도서관에 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별다를 것 없는 동네 공공도서관이다.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았고, 동네 아이들, 어르신들, 몇몇 대학생들이 시간대를 나눠 가며 자리를 채운다. 지난 4월 초,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 뒤로는 두 달 가까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시간을 흘려보냈고, 얼마 전부터 이 도서관으로 매일같이 출근하듯 나서고 있다. 일찍 일어나고, 책으로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을 메고, 적당히 구겨진 옷차림으로 집을 나서며 다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제 이곳에서 빌린 이진경의 『삶을 위한 철학수업』을 읽고 있다. 책은 철학을 삶의 언어로 번역해 보려는 시도처럼 느껴졌고, 간결한 문장 안에 저자의 오랜 질문이 응축돼 있는 것처럼 읽혔다. 책장을 넘기던 중 ‘강자와 약자’라는 소제목이 붙은 부분에서 시선이 멈췄다. 약자는 비판이나 논평을 공격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며, 그 이유는 스스로의 약함을 알기에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반대로 강자는 비판이나 비난 앞에서도 쉽게 동요하지 않고, 칭찬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그런 말들을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건너야 할 일종의 풍경쯤으로 흘려보낸다. 비판은 좀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이정표이고, 비난은 올라가는 벽에 누군가 낙서한 지질한 문장일 뿐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문장을 따라가다가 문득 전 직장에서 만난 A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몸담았던 회사의 노동조합 대표였다. 나는 인사관리 부서의 수장이었고, 자연히 그와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생산직 노조의 수장이었는데, 조합원들을 대할 때는 자상하고 부드러웠지만, 회사와 마주할 때는 거칠고 막무가내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회사 측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 회의 자리에서 ‘근로자’ 대신 ‘노동자’라는 표현을 고집할 정도로, 나름의 노동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나의 이런 성향을 알고 있었고, 단둘이 있을 때는 내 판단이 균형 잡혀 있다고 종종 인정해 주었다. 문제는 공식 협상 테이블에서의 그의 모습이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 인사부가 시행한 정책으로 인해 조합원들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그 기억이 여전히 그의 불신을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용자 측에서 조합의 불합리한 행태를 비판하거나 불리한 자료를 제시하면, 그는 곧바로 ‘투쟁’을 선언하며 방어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조합원들을 상대할 때 보여주던 너그럽고 단단한 리더의 모습이 협상장 안에서도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늘 남았다. 그런 아쉬움 속에서, 책의 문장을 읽던 순간 불현듯 그가 떠오른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항상 강자였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약자의 기본 값을 마음속에 장착하고 있었지만 강자인 척 행동해 왔다. 누가 뭐라 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거나, 칭찬을 들어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긴 적이 많았다. 그게 나를 좀 더 단단하고 멋지게 보이게 해 줄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연기였는데, 그 연기를 반복하면서부터는 진짜로 그 모습이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느껴졌고, 때로는 그 감정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억누른 약자의 모습이 누군가에게서 드러나는 순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자신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나와 비교하며 우쭐해하는 기분에 스스로 만족해하던 지난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 장면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런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 잠시 멈칫하게 된다. 누구나 약자의 마음을 품고 있고, 또 누구나 강자인 척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양쪽 경계에 선 채 나는 여전히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조금은 강자 쪽에 가깝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단단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백수가 된 지금도 여전히 나를 움직이는 힘이다. 어제는 온라인 글쓰기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글쓰기가 내면을 치유하고,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쩌면 글을 쓰겠다는 선언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가장 설득력 있게 뒷받침해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퇴사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겠다고 하자, 몇몇 지인들이 걱정과 기대가 섞인 말을 건넸다. 겉으론 모두가 응원한다고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불안과 의심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더 단단해지고 싶었고, 어쩌면 그 마음이 도서관으로 향하는 매일의 걸음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남쪽 먼 곳에 책을 낸 지인이 있었다. 우리는 책과 글에 대한 관심으로 가까워졌고, 그는 내가 언젠가 책을 쓰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그가 소개해준 한 에세이 작가가 있었다. 그 작가 역시 비슷한 처지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들었고, 그의 책 속 문장들은 어딘가 어긋난 듯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솔직했다. 진심이 느껴졌고, 그 끌림은 망설임 없이 그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 신청으로 이어졌다.
어제는 그 수업의 두 번째 시간이었다. 수업 중 강사가 들려준 이야기 중 하나가 오래 남았다. 누군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유명 작가가 말했다고 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 말이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고, 오히려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어떤 문장이 내 앞에서 구체적인 언어로 발화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십 대 시절에 방황했고, 그때 책을 읽으며 겨우 중심을 잡았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얻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가 겪은 시간을 책이라는 형태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충동과 닿아 있다. 그럴 때 나는 노트를 꺼내 단어 몇 개를 적는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어떤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흐려지지만, 그 사이에 남는 문장만큼은 나를 붙잡아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어떤 글일까. 나를 표현하는 글이면서, 동시에 나를 드러내지 않는 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글이란 결국 형태를 갖춰야 하는 작업인데, 나는 여전히 그 형태를 고민 중이다. 어떤 형식이 나를 더 솔직하게 만들어주는가, 어떤 구조가 내 마음에 붙잡힌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줄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언젠가는 이 물음에 대해 나만의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아니 에르노는 『칼 같은 글쓰기』에서 글의 형태는 태도라고 말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그녀가 말하는 태도라는 단어에 잠시 머물렀다. 결국 어떤 글을 쓰느냐는 나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통과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도서관에 앉아 매일 조금씩 써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