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용서하는가
살면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셋이 있다. 각각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만나 그 시기를 함께 보냈고 지금까지도 가까운 사이로 지낸다. 개별적으로는 흔한 사정일 수 있지만 우리 넷이 함께 모이면 드러나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아버지의 부재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친구 한 명을 빼면,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들은 우리 셋의 불완전한 가정의 이유였다. 그 사실은 대화의 끝에서 불쑥 떠오르곤 했다. 학창 시절의 기억을 나누다 보면, 성인이 된 이후의 선택을 돌아보다 보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빈자리가 문장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우리가 각자 닮은 듯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배경, 관계를 맺을 때의 신중함과 서툶, 책임을 대하는 태도까지도 그 빈자리와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최근 한 친구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학창 시절부터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로부터 온 소식이었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그 만남을 두고 그는 오래 고민하더니,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병상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갔다. 내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자, 그는 담담하게 검은 정장을 준비해 두고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는 아버지를 끝내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 그 말은 안타까운 여운을 남겼다. 그는 분노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설자리를 스스로 표시해 둔 것이다.
그 말은 낯설지 않았다. 사실 지금 그의 상황은 작년 봄 내가 겪었던 일과 비슷하다. 아니, 내 동생이 마주한 상황과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끝내 뵙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동생이 아버지를 찾아가 마지막을 지켜드리고 장례까지 치렀다. 그때 나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과 한 인간으로서의 분노 사이에서 적잖이 흔들렸지만, 결국 아버지를 완벽하게 용서할 수 없었다. 내 안의 감정은 오래 닫힌 방처럼 어둡고 차가웠다.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나조차 그 방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 선택은 나를 지키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나를 가두는 방식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용서’라는 말이 내 안에 다시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 필요성을 어렴풋이 느끼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경계로 해서 내 안에는 인식의 변화가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라는 문장과 함께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불완전성이라는 개념은 무거운 망치가 아니라, 감정의 골을 매만지는 손길이었다. 역사적 맥락에서, 철학적 맥락에서 ‘용서’라는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아버지를 평생 지워버리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용서’라는 개념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으로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결국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개인적 감정의 변덕이 아니라 ‘용서’라는 개념이 주는 힘이었다. 감정은 흔들렸지만, 개념은 방향을 잡아주었다.
‘용서’라는 개념을 처음 만난 것은 강남순 교수의 『용서에 대하여』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책은 용서를 상투적인 미덕의 언어로 소비하는 통념을 넘어서, 우리가 왜 용서를 사유해야 하는지 묻는다. 저자는 용서의 의미와 한계, 종교와 정치 속에서의 용서,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 때문에 용서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바로 그 대목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문장. 그 단순하지만 단호한 명제는 내 삶을 정면으로 겨누는 화살처럼 다가왔다. 그 화살은 누군가를 쓰러뜨리려는 무기가 아니라, 삶의 표적을 새로 지정해 주는 표식 같았다. 그 지점을 겨냥하지 않으면, 계속 같은 원망의 궤도로만 돌게 될 것 같았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말은 곧장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의 무책임한 선택과 부재로 인해 긴 시간을 원망 속에서 살았다. 가정을 책임지지 못한 채 포기해 버린 그의 그림자는 내 성장 과정 내내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그러나 그 문장은 동시에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상처받은 자의 위치에만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 역시 상처를 주는 자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회사에서 무심코 던진 말이 동료의 마음을 깊게 긁었을지도 모른다. 가정에서 내 고집이 아내에게 무게로 다가온 적이 있었을 것이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농담처럼 뱉은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하려 애쓰지 않았지만, 그 구절을 읽는 순간 마치 빛에 드러난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들에게 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아버지가 내게 그러했듯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었다. 결국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은 아버지 이전에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내가 저지른 실수는 때로 내 의도와 무관했고, 내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용서는 나와 아버지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직장 생활 속에서도 용서라는 주제는 불시에 나를 덮쳐왔다. 나는 한때 함께 일했던 선배와의 관계에서 깊은 불편함을 겪은 적이 있다. 그는 회사에서 연차도 많고 경험도 풍부했지만, 몇 차례의 승진에서 누락된 뒤 인사부서 수장이었던 나에게 원망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 또한 그가 자기 책임을 직시하지 않고 모든 화살을 나에게 돌린 데 분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역시 상처 입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 안에서의 실패는 종종 개인의 존엄을 뒤흔들고, 그 흔들림은 누군가를 향한 원망으로 쉽게 번져 간다. 불완전함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공통된 조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를 미워하고 있는 내 감정이 오히려 더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이해와 용서뿐이었다. 용서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갇혀 있던 분노와 억울함의 감옥을 벗어나기 위한 출구이기도 했다. 나는 내 안의 독기를 배출하듯 천천히 그를 놓아주었다.
이처럼 개념은 경험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만약 내가 ‘용서’라는 개념을 붙잡지 못했다면,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선배에 대한 불쾌감은 그저 감정의 파편으로 남아 나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은 그 순간들을 다른 빛으로 비추게 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 단순한 정의 하나가 내 기억과 감정을 새롭게 구성했다. 나는 상처의 목록을 세던 사람에서, 상처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사람으로 옮겨갔다. 그때 나는 철학자 이정우가 말한 구절을 떠올렸다. “인간의 인식은, 나아가 삶은 개념을 떠나 있을 수 없다.” 경험은 지나가지만, 개념은 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다. 철학이란 결국 개념들을 명료화하고 종합하는 행위이기에, 철학적 개념의 학습은 삶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개념이 없다면 삶은 흩어진 파편으로 남겠지만, 개념을 통해 파편은 하나의 문장으로, 하나의 태도로 모여든다.
개념의 힘은 철학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단순한 과학적 발견을 넘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는 시간이 있고,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 공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 믿음을 깨뜨렸다. 시간과 공간은 고정된 틀이 아니라, 관찰자의 속도와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개념은 과학자들의 법칙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세계를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믿음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개념 하나가 감각을 재조정하고, 세계를 재구성한다. 내 삶에서도 ‘용서’라는 개념은 그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시간은 여전하지만 의미는 달라졌고, 사실은 같지만 해석은 바뀌었다.
칸트는 철학의 방향을 뒤집었다.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공간·범주라는 인식의 틀을 통해서만 세계를 만난다. 좌표가 바뀌면 지도가 달라지듯, 개념의 틀을 바꾸면 경험도 달라진다. 이 전회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 먼저 “내가 어떤 틀로 보고 있는가?”를 묻게 한다. 그래서 ‘용서’는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요령이 아니라, 사건을 비난의 틀에서 불완전성의 틀로 옮겨 읽는 개념의 전환이다.
헤겔 또한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에게 철학은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이며, 개념은 그 전개를 이끄는 매개였다. 개념은 현실을 추상화해 비워버리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반대로 들뢰즈는 개념을 고정된 정의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사건에 가깝다고 보았다. 철학은 그에게 “개념을 창조하는 행위”였다. 두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개념을 삶과 세계를 사유하는 핵심 도구로 본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개념은 우리를 정확하게 만들고, 새롭게 만들어진 개념은 우리를 창조적으로 만든다. 내게 ‘용서’는 두 성질을 모두 지닌 개념이었다. 오래된 원망을 정확히 보게 했고, 동시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창조하게 했다.
문학과 예술 속에서도 개념은 삶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회심은 법률의 심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죄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붙드는 방식이 바뀌는 순간이 있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도 그렇다. 피해자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가해자는 신에게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그 모순 속에서 관객은 묻는다. 용서는 누구의 것인가? 피해자의 권리인가, 신의 은총인가, 사회의 제도인가? 그 질문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감정보다 개념이다. 개념이 있어야 우리는 질문을 끝까지 붙든다.
나는 다시 묻는다. “용서를 말하는 내가, 정말로 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했는가?” 정직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기억은 가끔 예고 없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 나는 그 기억을 다루는 언어를 바꾸었다. 예전에는 원망과 비난의 언어로만 설명했지만, 지금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먼저 숨을 고른다. 그 개념은 변명을 제공하지도, 죄를 지우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용서는 특정 사건의 종결이라기보다, 불완전한 인간끼리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지속해서 수행해야 하는 태도에 가깝다.
삶은 수많은 질적 차이들로 다가온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구에게는 상처로, 또 다른 누구에게는 성찰로 남는다. 경험만으로는 우리는 그 다채로움을 붙잡을 수 없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감정은 왜곡된다. 그러나 개념은 그 흐름을 붙잡아 의미를 남긴다. 그래서 개념을 배우고 사유하는 일은 단순한 지적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곧 삶을 이해하고, 나아가 나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다. 우리는 개념을 통해 사건을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을 태도로 만든다. 태도는 다시 관계를 바꾸고, 관계는 삶의 방향을 바꾼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개념은 삶을 멀리서 관찰하는 추상적 도구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경험을 재구성하는 힘이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사에서의 갈등,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까지 개념은 내 인식을 새롭게 빚어낸다. 때로는 한 문장이 세계를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불완전하다.” 그 문장을 붙드는 동안, 나는 과거의 나를 견디고 현재의 타인을 이해하며 미래의 나를 준비한다. 철학이 결국 개념을 명료화하고 종합하는 일이라면, 철학적 개념을 배우고 사유하는 일은 단순한 학문적 선택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연이다. 용서는 그 필연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는 개념이다. 나는 오늘도 그 개념을 붙든다. 그것이 나를 자신과 타인에게로 조금 더 열어 주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