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올해 성과는 미흡합니다. 목표 대비 80% 이하로 달성했습니다.” 몇 해 전 인사평가 시즌, 직원들의 성과를 조정하는 자리에서 한 관리자가 말했다. 나는 HR팀에서 성과 관리를 맡아 그 회의에 함께 있었다. 자료를 확인하니 지표는 일치했고, 그는 올해의 저성과자로 성과개선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했다. 그 순간, 그는 한 사람의 이름과 얼굴이 아닌, 오직 숫자로만 남았다.
회의 결과를 들으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 그 직원은 묵묵히 동료를 돕고, 늦은 시간까지 남아 부서의 업무를 챙기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의에서 그런 모습이 언급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회사 평가 절차에 근무 태도나 팀 기여도를 반영하는 항목이 있긴 했지만, 이는 결국 성과 지표를 보완하는 부차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회사에서 ‘저성과자’라는 표식만 남게 되었고, 나는 그 낙인이 어떤 어려움으로 이어질지 예감할 수 있었다.
물론 평가의 목적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경쟁 속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조직은 도태되고, 그 결과는 곧 구성원 모두의 생존과 직결된다. HR은 그런 압박을 누구보다 먼저 체감하며, 직원들에게 목표를 향해 더 달리라고 요구하는 역할이었다. 나는 사측의 입장을 설명하고 방어해야 했지만, 동시에 성과만으로 개인을 재단하는 시스템에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회사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표어를 내걸었으나, 실제 평가에서는 사람보다 수치가 항상 우선이었다.
그 경험은 내게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조직은 이름보단 숫자를 선호했고, 나는 그 숫자를 확정하는 관리자였다. 그러나 사람은 단순히 효율을 내는 톱니바퀴가 아니었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시적인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 인간성도 품고 있는 것이었다. 성과는 명확하지만, 사람이 가진 목적, 잠재력, 그리고 동료와의 관계는 숫자로 환원하기 어렵다. 회사의 이런 평가 시스템 속에서는 인간성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직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질문을 품으며, 직장에서의 인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목적을 잃은 조직, 작용인만 남은 세계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네 가지 원인을 제시했다.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 그것이다. 여기서 ‘인(因)’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까닭을 뜻한다. 질료인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묻고, 형상인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작용인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하며, 목적인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이유를 밝힌다. 정리하면 질료와 형상은 ‘What’에, 작용인은 ‘How’에, 목적은 ‘Why’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물을 안다는 것은 이 네 가지 질문을 함께 고려하는 일이었다. 이 사유를 흔히 ‘사원인설(四原因說)’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머그컵을 생각해 보자. 질료인은 점토이고, 형상인은 손잡이가 달린 액체용 용기라는 구조이며, 작용인은 도공의 작업이고, 목적인은 마시기라는 쓰임이다. 동상으로 바꿔보면, 질료인은 청동, 형상인은 인물의 모습, 작용인은 조각가의 손길, 목적인은 기념과 전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사물을 설명할 때 네 가지 원인을 함께 엮어 보았다. 특히 형상과 목적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형상은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물이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기능적 구조이며, 그 속에 이미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말은 단순히 네 발 달린 동물이 아니라, 달리기 위해 태어난 동물이다. 인간 역시 단순히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 이성을 발휘해 삶을 완성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다. 탁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네 개의 다리에 판자가 얹힌 구조만이 형상이 아니라, 그 위에 물건을 올려두고 사람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목적이 본질 속에 들어 있다.
하지만 근대의 과학혁명은 세상을 보는 방식을 크게 바꾸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을 설명할 때 네 가지 질문을 두루 물었다면, 근대 과학은 그 가운데 작용인에 집중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What)”나 “왜 존재하는가(Why)”라는 문제보다, “어떻게 작동하는가(How)”라는 메커니즘만을 파고들었다. 갈릴레오는 운동을 수학 공식으로 기록했고, 데카르트는 세계를 크기와 움직임으로만 설명했으며, 베이컨은 실험을 통한 원인 검증을 강조했다. 심장은 “왜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해 피를 돌리는가”로 설명되었고, 씨앗도 “무엇을 향해 자라는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발아하는가”로 분석되었다.
이 전환은 세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크게 키웠다. 그러나 동시에 사물의 쓰임과 의미, 곧 형상과 목적이 함께 보던 시선은 끊어졌다. 남은 것은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라는 질문뿐이었다. 구조는 단지 기능으로만 읽혔고, 기능은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많이 산출물을 내는가로 평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은 회사와 같은 조직에도 적용할 수 있다. 조직을 이루는 ‘질료’는 사람과 자원이고, 이들이 맺는 관계와 구조는 ‘형상’이다. 조직을 움직이는 ‘작용인’은 리더십, 제도, 외부 환경의 압력이며, 조직의 존재 이유인 사명과 가치가 바로 ‘목적’이다. 조직을 움직이는 ‘작용인’은 리더십, 제도, 외부 환경의 압력이며, 마지막으로 그 조직이 존재하는 이유, 곧 사명과 가치가 ‘목적’이다.
그런데 근대 과학의 전환은 이 균형 잡힌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과학혁명 이후의 시선은 네 가지 원인 중에서도 ‘작용인’에 압도적으로 쏠려 있었다.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포드주의적 경영 방식은 ‘어떻게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생산할 것인가’라는 질문 하나에 집중했다. 조직의 형상은 단순히 분업 구조로 축소됐고, 목적은 생산량과 이윤 극대화라는 목표로 바뀌었다. 효율과 성과라는 잣대는 오늘날에도 많은 경영학 이론과 HR 제도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시각에서 본다면, 조직은 단순히 작용인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이 빠진 조직 이해는 불완전하다. 사람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잠재력과 목적을 지닌 존재이며, 조직의 형상은 단순한 효율적 구조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의미가 엮여 있는 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구성원 모두에게 목적을 실현하는 데 있다. 따라서 오늘날 조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과학이 배제했던 형상과 목적의 차원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
성과 지표를 넘어: 에르곤·아레테·뒤나미스로 본 조직
근대 과학적 시각이 조직 경영에 적용되면서 사람은 성과를 내는 기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테일러주의가 보여주듯 노동은 시간과 동작 단위로 쪼개져 측정되었고, 포드주의는 노동자를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다루며 대량생산 체계 속에 투입했다. 이 전통은 오늘날 글로벌 기업의 제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일했던 다수의 다국적 기업에서도 이러한 관행은 동일하게 작동했다. 직원은 연초에 KPI를 부여받고, 연말에는 그 수치 달성 여부로 평가받았다. KPI는 매출 증대, 비용 절감, 프로젝트 완료율 같은 수치로 환산되었고, 그 결과 직원은 숫자로 정의되는 존재가 되었다. 예컨대 최근까지 몸담았던 영국계 회사에서는 본사에서 내려온 글로벌 지표가 그대로 각 나라와 부서에 적용되었다. 현지의 맥락과는 맞지 않아도 기준은 바뀌지 않았고, 직원 개개인의 잠재력이나 기여 방식은 평가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 근무했던 미국계 제조 회사에서는 숫자 달성만이 곧 승진과 보너스를 결정했다. 탁월한 아이디어나 장기적 기여보다 단기 실적이 우선시 되었고,
직원 스스로도 자신의 존재를 지표에 맞춰 축소해 나갔다. 실제로 한 동료가 팀워크 강화를 위해 새로운 협업 방식을 제안했지만, 매출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의록에도 남지 못한 채 사라진 일이 있었다. 결국 매출과 이익으로 환산되지 않는 활동은, 조직 문화에 아무리 도움이 되더라도 ‘불필요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사람들은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깊이 생각하기 어렵다. 오직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만이 남고, 직원은 조직이 요구하는 작용인으로 축소된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형상과 목적을 드러내기보다, KPI라는 숫자 틀 안에서 움직이는 도구로 변질된다. 그러나 인간을 단순히 기계적 성과의 산출자로만 이해하는 관점은 불완전하다. 사람은 단순히 무엇을 해내는 존재가 아니라, ‘왜’와 ‘무엇을 위해’라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시각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을 단순히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이해했다. 이때 핵심 개념이 바로 에르곤, 아레테, 뒤나미스다.
먼저 에르곤(ergon)은 각 존재가 가진 고유한 기능이나 역할을 뜻한다. 칼의 에르곤이 무언가를 자르는 일이라면, 인간의 에르곤은 이성적 사유를 통해 세계와 관계 맺고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조직의 맥락에서 본다면,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만의 ‘에르곤’을 지닌다. 단순히 직무기술서에 적힌 과업을 넘어서,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기능과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아레테(aretē)는 그 기능을 가장 탁월하게 수행하는 상태, 즉 덕(德)이나 탁월성을 의미한다. 칼이 잘 벼려져 날카롭게 베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좋은 칼’이라 불리듯, 직원도 자신의 에르곤을 잘 발휘할 때 아레테를 드러낸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역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태도와 습관,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모두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뒤나미스(dynamis)는 가능성, 즉 잠재력이다. 아직 발현되지 않았지만 미래에 실현될 수 있는 능력이나 성향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씨앗 속에 이미 나무로 자랄 가능성이 들어 있다고 말했듯, 직원도 현재의 성과 너머에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뒤나미스는 현재로는 미완이지만, 적절한 환경과 기회를 만나면 실제적인 성취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틀에서 본다면, 직원은 결코 KPI라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다. 그들은 각자의 에르곤을 갖고 있고, 그것을 가장 잘 발휘하려는 아레테를 추구하며, 동시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뒤나미스를 품은 존재다. 조직의 역할은 이 세 가지 차원을 어떻게 발견하고 키워낼 것인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HR 담당자의 에르곤은 단순히 채용이나 평가 같은 행정적 절차를 운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사람과 제도를 연결하는 중개자, 구성원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 탁월성(아레테)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단순히 규정을 정확히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조직에 맞게 작동하도록 개선하고, 직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며, 장기적으로 회사가 더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기여하는 능력이 곧 아레테다. 또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뒤나미스)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 HR 담당자가 단순 관리자의 틀을 넘어 전략적 파트너로 성장할 수 있는 여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몸담았던 글로벌 기업에서도 이 차이는 분명했다. 어떤 회사에서는 HR을 단순한 ‘프로세스 관리 부서’로만 정의했다. KPI 입력, 평가 등급 산출, 보상 수치 관리가 업무의 전부였고, 직원 개개인의 맥락이나 잠재력은 무시되었다. 그 결과 HR 담당자조차도 스스로를 단순 행정 처리자로 축소했고, 구성원들은 제도에 신뢰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회사에서는 HR을 전략적 파트너로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제도 도입 과정에서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려 했던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HR 담당자는 규정 집행자가 아니라 직원의 가능성을 제도로 연결하는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동일한 직무라도 조직이 사람을 단순히 성과 지표로만 보느냐, 아니면 에르곤과 아레테, 뒤나미스를 가진 존재로 존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직원은 ‘보고서를 생산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고를 구조화하고 지식을 확산하며 조직의 목적을 함께 만들어 가는 존재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직원이 가진 잠재력을 어떻게 끌어내고, 그 잠재력이 탁월성으로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을 조직이 마련하는가에 달려 있다.
직장에서의 진정성
직장에서 진정성이 필요할까? 많은 사람들은 일터를 그저 생계를 위한 공간으로 여기며, ‘진정성’이라는 말은 사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직이 사람을 단순한 기능이나 수치로만 다루는 순간, 구성원은 곧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내는 듯 보이지만, 결국 사람을 소진시키고 조직을 소멸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직장에서의 진정성이란 사람을 하나의 형상과 목적을 가진 존재로 대하는 태도다. 형상은 각자가 지닌 고유한 가능성과 성향을 의미하고, 목적은 그 가능성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이다. 조직이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을 도구로 축소하지 않고 살아 있는 주체로 설 수 있다. 그렇기에 직장에서의 진정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렇다면 직장에서 진정성을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좋은 태도를 유지하거나 꾸밈없이 말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곧 사람을 형상과 목적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는 구체적 실천이다. 첫째, 구성원의 잠재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직무기술서에 적힌 역할만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뒤나미스(가능태)를 살피는 것이다. 예컨대 한 직원이 숫자 분석에 능숙하다면, 그 재능을 반복적 보고서 작성에만 가두지 않고 새로운 문제 해결에 적용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 잠재력 존중이다. 둘째, 단기 성과만이 아닌 장기적 성장을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조직의 관점에서 단기 목표는 늘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강조할 경우 사람은 반복 가능한 기능으로 전락한다. 반면 장기적 관점은 직원이 자신의 에르곤(역할)을 넘어 아레테(탁월성)에 이르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HR 직무에서 채용만 담당하던 직원이, 조직 문화 개선이나 교육 프로그램 설계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그 예다. 셋째, 조직과 개인이 서로의 목적을 교차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개인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갖고 있고, 조직은 그 나름의 사명을 갖는다. 두 목적이 충돌하지 않고 교차할 때, 직원은 조직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반대로 개인의 목적을 외면한 채 조직의 목표만 강요하면, 사람은 결국 ‘소진’되거나 떠나게 된다. 진정성 있는 조직은 이 교차점을 세심히 찾고, 구성원에게 “당신의 목적이 우리 조직의 목적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직장에서의 진정성이란 거창한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구성원의 잠재력, 성장, 목적이라는 세 가지 차원을 존중하는 구체적 방식 속에서 드러난다. 이때 관계의 성격은 단순히 급여와 성과를 교환하는 거래적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의 목적을 존중하며 나아가는 동반적 관계로 전환된다. 직원은 자신이 단지 일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조직 안에서 자기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체감하고, 몰입은 강요가 아니라 자발성에서 나온다. 조직 또한 사람을 수단이 아닌 주체로 대할 때, 단기 성과를 넘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힘을 얻게 된다. 결국 진정성은 조직과 개인을 동시에 성장시키는 토대이며, 사람을 도구로 보지 않는 태도가 조직의 신뢰를 가능하게 만든다.
사람을 목적으로 본다는 것
직장에서 성과와 효율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될 때 사람은 단순한 기능으로 축소되고, 관계는 거래적 차원에 머무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간은 단순히 ‘하는 존재’가 아니라 고유한 형상과 목적을 지닌 존재다. 그 목적은 단기적 지표 속에 환원될 수 없으며, 잠재력이 현실화되고 덕성으로 발현될 때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 그렇기에 조직이 구성원을 이해하는 방식은 숫자에 대한 관리가 아니라, 형상과 목적을 함께 바라보는 태도여야 한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이상적 구호가 아니라 실천 가능한 원리다. 구성원이 가진 잠재력을 존중하고, 장기적 성장을 지원하며, 조직과 개인의 목적을 교차시키는 구체적 노력 속에서 구현된다. 그럴 때 직장은 소진과 소외의 공간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무대로 변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한 명제 하나다. 사람을 도구로 보지 않고, 목적 그 자체로 대하는 것. 그것이 직장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