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법대를 나오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내란수괴 윤석열은 과연 똑똑한 사람일까.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을 졸업하고 권력을 잡은 내란 관여자들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일까. 반대로, 그들보다 학력이나 자격은 부족하지만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은 똑똑하지 못한 걸까. 그렇다면 똑똑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의 발전 방향과 무관하게 지식을 빨리 습득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일까. 물론 어떤 개념이든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나는 작년 계엄 사태를 지켜보며 민주시민으로서의 가치와 자존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 경험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카투사로 군 생활을 했다. 당시 입대자들의 출신 학교는 대부분 서울 상위권 대학이었고, 그 때문에 얼토당토않은 관행이 ‘지적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로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첫날부터 강요되는 계급표 암기였다. 부대로 오는 한 시간 남짓한 차 안에서 신병은 20명 남짓한 선임의 소속, 주특기, 입대 순서를 정확히 외워야 했다. 암기를 잘하면 똑똑한 신병, 못하면 그렇지 못한 신병으로 분류됐다.
결과는 신기했다. 서울대학교 출신 신병들의 암기력이 대단했다. 대부분이 계급표를 완벽하게 외워 선임들을 놀라게 했다. 반면 체감되지 않는 정보를 암기하는 능력이 부족한 나는 두세 달은 지나야 겨우 외울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똑똑함이 학력이나 자격과 비례한다는 믿음을 강화했다. 암기를 빨리 끝낸 신병들이 심지어 부대 생활에도 더 빨리 적응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반전이 찾아왔다. 군대 생활은 계급표 암기처럼 단순한 정보 기억으로 버틸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작전 중 돌발 상황, 동료들의 예기치 못한 행동, 그리고 한국 정서가 통하지 않는 미군 부대의 문화는 늘 예측을 벗어났다. 정보와 지식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순간들이 쏟아졌다. 그 속에서 나는 지식을 넘어선 또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태도와 판단에서 비로소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무엇일까. 두 개념을 정확히 갈라놓는 것은 관념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나는 지식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싶은 의도에서 이를 네 가지 측면으로 나눠 보고자 한다. 그것은 인식, 시간, 의미, 불멸의 차원이다. 이제 그 첫 번째인 인식의 차원부터 살펴보자.
지식은 사실과 정보를 체계적으로 쌓아두는 능력이다. 학교 교육이나 독서를 통해 습득할 수 있고, 그렇게 쌓인 앎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으로도 평가받는다. 그러나 지식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외부에 저장하는 것에 머무른다. 그래서 시대가 바뀌면 낡아버리기도 하고, 권력과 결합해 지배의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윤석열과 그 일당이 저지른 사건들만 봐도, 혹은 역사를 되돌린 수많은 사례만 봐도 단순한 지식의 축적, 곧 ‘똑똑하다’는 평가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지식이 인공지능을 통해 빠르게 복제되고 소환되는 시대에는 우리가 그토록 높이 평가해 온 지식의 습득 자체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 점에서 똑똑함이라는 말 역시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다.
이에 반해 지혜는 단순한 앎이 아니다. 지혜는 반드시 경험과 결합된 앎, 다시 말해 삶 속에서 자기 몸과 마음으로 겪으며 체화된 앎이다. 같은 사실을 알아도 그것을 어떻게 살아냈는가에 따라 깊이는 전혀 달라진다. 책으로 배운 규칙이 실제 삶에서 혼란과 충돌을 거치며 비로소 의미를 얻듯, 지혜는 삶의 시간 속에서 길러진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머릿속에 쌓아두는 사람이라기보다, 경험을 곱씹고 그 안에서 다시 배우는 사람이다.
군대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계급도, 인종도, 학벌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호기심과 매력을 느껴 가까이 지내며 살펴보았다. 공통점은 분명했다.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지식이 시간과 경험과 만나야만 비로소 지혜로 변한다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두 번째 차원은 시간이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비시간적이다. 시험 답안이나 데이터처럼 지금 이 순간 즉시 호출되어야 가치가 있다. 마치 한 번 습득하면 고정된 채로 남는 것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지혜는 시간 속에서만 길러진다. 지식이 현재의 효용을 겨냥한다면, 지혜는 시간의 흐름을 통과하면서 의미를 얻는다.
나의 학창 시절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오랫동안 문제아였다. 공부와 담을 쌓고 지냈고, 주변 사람들은 아예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3 여름방학 무렵, 방황의 끝에서 나는 뒤늦게 공부에 눈을 떴다. 다른 친구들이 수년간 쌓은 노력의 결실을 거두는 시기에 나는 이제 막 씨앗을 뿌리는 셈이었다. 상식적으로는 무모한 선택이었다. 나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달라졌다. 늦게 시작한 공부는 오히려 나를 평생 배우는 태도로 이끌었다. 시간이 앎을 변형시킨 것이다.
그때 깨달은 사실은 분명하다. 지식은 순간의 습득으로 머무르지만, 지혜는 시간을 통과하며 무르익는다. 지식만으로는 내가 맞닥뜨릴 기회를 예측할 수 없었지만, 경험을 곱씹으며 얻은 지혜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지식의 앎은 정지해 있으나, 지혜의 앎은 시간을 살아내며 변화하고 확장된다.
세 번째 차원은 의미다. 지식은 종종 정보로 환원된다. 어떤 사실을 알게 해 주고, 새로운 내용을 빠르게 전달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지식은 대량 생산과 복제를 통해 손쉽게 소비된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채울 수 없다. 지식은 “무엇을 아는가”에 집중하지만, 지혜는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묻는다.
나는 카프카의 책을 좋아한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읽고 나면 의미가 남는다. 물론 그의 텍스트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당대 사회의 모순과 맥락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가 카프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사실 때문이 아니다. 그의 성찰이 남긴 의미가 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지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정보만을 전달하는 책에는 마음이 덜 간다. 모르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가치는 있겠지만,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에 또 다른 정보의 주입은 오히려 피로와 지루함을 준다. 반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일지라도, 그 속에 작가가 남기고자 한 의미가 담겨 있다면 그 여운은 훨씬 길게 남는다. 지혜는 바로 그 여운 속에서 자리를 잡는다.
마지막은 소멸과 불멸의 차원이다. 지식은 언젠가 소멸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나의 경험처럼 직접 겪어내지 않은 앎은 삶 속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과도 닮아 있다. 시험을 위해 외운 공식, 규정집에 기록된 절차, 시대의 상식처럼 보였던 사실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힘을 잃는다. 태양계의 아홉 번째 행성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명왕성이 어느 순간 행성의 지위를 잃은 일, ‘대한민국은 뚜렷한 사계절의 나라’라는 교과서적 지식이 기후 변화 속에서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는 일은 모두 지식의 소멸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지식은 이처럼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발견 앞에서 사라지고 대체된다.
반면 지혜는 소멸하지 않는다. 지혜는 시간이 지나며 풍화되지만, 오히려 그 풍화를 통해 의미를 남긴다. 지식이 사실의 지위를 잃으면 폐기되지만, 지혜는 경험과 의미로 스며들어 다른 사람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남는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멸을 갈망하며, 소멸하는 존재가 만들어낸 불멸의 흔적을 예술에서 찾는다. 셰익스피어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이 남긴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육신은 사라졌으나, 그의 삶이 남긴 진정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불멸의 지혜로서 우리 곁에 머문다.
나는 이 차이를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느껴왔다. HR 실무자로 일하며 수많은 제도와 규정을 익혔지만, 그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바뀌거나 폐기되었다. 그러나 동료와의 갈등 속에서 배운 경청의 태도, 실패한 프로젝트에서 얻은 성찰, 존경하는 인물의 삶을 지켜보며 배운 용기는 시간이 흘러도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지식과 지혜의 가장 큰 차이다. 지식은 사실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사라지지만, 지혜는 사람들의 경험과 의미 속에서 예술 작품처럼 남아 세대를 건너 살아남는다.
따라서 소멸과 불멸의 대비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식은 언제든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지혜는 인간의 삶 속에서 의미로 전승되며 불멸의 힘을 가진다. 결국 우리가 좇아야 할 것은 쌓였다가 사라지는 지식이 아니라, 시간의 풍화를 견디며 남아 다른 삶을 비추는 지혜일 것이다.
1999년에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예언자인 오라클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오라클은 네오에게 모피어스와 네오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모피어스가 요원들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자, 네오는 오라클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결과는 달라진다. 모피어스도, 네오도 죽지 않았다. 예언은 빗나간 셈이다. 이때 네오는 혼란스러워하지만, 모피어스는 중요한 말을 남긴다. “그게 바로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다.”
길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차원이다.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로 상황을 예측하고 계산할 수는 있지만, 그 길을 실제로 걷지는 않는다. 지식은 그래서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시험 문제의 답처럼, 데이터베이스의 기록처럼, 순간 소환되지만 삶의 구체적인 움직임과는 떨어져 있다. 앎은 있지만 의미는 빈약하고, 새로운 가능성 앞에서 쉽게 소멸한다.
그러나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 걷는다는 것은 몸으로 부딪히고 경험한다는 뜻이며, 경험은 시간 속에서만 축적된다. 길 위에서는 언제든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우연은 새로운 길을 열어젖힌다.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되돌아오며, 그 과정 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 지혜란 바로 이 길 위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지식은 머리에 머물지만, 지혜는 삶 전체에 스며든다. 지식은 기록으로 남지만, 지혜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이야기와 기억으로 남는다.
결국 오라클의 예언이 빗나간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길을 “알았을” 뿐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을 아는 것은 과거의 지식에 기대는 것이지만, 길을 걷는 것은 현재를 살아내며 미래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래서 지혜는 소멸하지 않는다. 시간을 견디며 의미를 남기고, 불멸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세기를 건너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노무현의 삶이 우리 안에서 계속 호흡하는 것처럼, 지혜는 살아 있는 발자취로 남는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길을 “아는” 똑똑함이 아니다. 끝내 길을 “걷는” 지혜다. 걷는 자만이 시간과 경험 속에서 의미를 창조하고, 그 의미가 불멸의 가치를 남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나는 길을 알고만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걷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