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가 건넨 낯선 세계

2025년 8월 28일과 6년 전 오늘

by 세템브리니

“그 스케일의 방대함 때문에 백악관에서의 일상이 오히려 사소하게 느껴졌다.”

소설 『삼체』를 읽은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데에는 그의 발언이 준 자극도 있었지만, 당시 함께하던 독서 모임에서 공대 출신의 한 회원이 적극 권유한 것이 더 큰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넷플릭스 시리즈로까지 제작되어 제목만 말해도 누구나 아는 작품이 되었지만, 내가 읽기 시작할 무렵만 해도 일부 마니아들만 찾는 공상과학 소설, 이른바 오타쿠 취향의 책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책을 읽고 나니 오바마의 서평이 결코 호들갑이 아니었다. 『삼체』의 스케일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공간은 은하계를 넘어 전 우주로 뻗어 있고, 시간은 문화대혁명 시기(1970년대 전후)에서 무려 400년 뒤의 미래까지 이어진다. 특히 비극적인 정치운동 속에서 핍박을 받은 한 중국 과학자가 절망 끝에 외계 문명을 불러들이고, 그것이 지구 정복으로 이어진다는 설정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남은 400년 동안 인류가 어떻게 자신들보다 앞선 문명을 맞이할 준비를 할지, 나는 그 상상력의 전개를 따라가고 싶었다.

몇 개월에 걸쳐 세 권짜리 소설을 완독하고 나서 내 안에 남은 감정은 만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답답함과 화가 뒤섞여 소설을 읽고 얻는 기쁨을 압도했다. 재미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렇게 거대한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답답함, 그리고 부족한 기초과학지식에서 비롯된 자책이 내 불편한 감정의 원인이었다. 예컨대 빛의 속도로 비행하는 우주선에서 시간이 지연된다는 설정은 걸핏하면 배경으로 등장한다. 나는 그것이 왜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전제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먼 우주로 떠난 주인공이, 시간 차이로 인해 지구에서 자라난 자식들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느꼈던 그 갑갑함이 다시 떠올랐다. 소설 속에는 시간 지연뿐 아니라 차원, 중력과 같은 물리적 개념들이 수없이 등장했고, 그것들이 내 이해에 균열을 내는 순간마다 나는 부족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날부터 나는 과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나의 독서는 문학, 역사, 철학에만 머물러 있었다. 문과를 전공한 이유도 있었지만, 이해 없는 무조건적인 암기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을 그런 암기의 영역으로 오해했고, 그 탓에 학창 시절 이후로는 과학을 외면한 채 살아왔다.


우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펼쳤다. 오래전에 의무감으로 읽었을 때는 이해의 깊이가 100점 만점에 절반도 미치지 못했다. 이번에는 ‘항성’과 ‘행성’의 차이부터 다시 확인하며 차분히 책장을 넘겼다. 방대한 분량과 낯선 과학 개념 탓에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주를 향한 저자의 열광적인 찬가에 내 감정도 휩쓸려 들어갔다. 중년을 훌쩍 넘어서도 별과 우주의 아름다움에 가슴 뛰는 세이건의 열정을 본받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내게 첫 번째 과학 선생님이 되었다. 이후 나는 『코스모스』를 독서 모임에서 다시 읽었고, 세이건의 다른 저작들까지 찾아 읽으며 한동안 과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나의 과학책 읽기는 우주에서 양자역학으로 이어졌다. 박재용 저자의 『냉장고를 여니 양자역학이 나왔다』를 읽으면서 해가 질 때 노을이 생기는 이유, 문을 닫아도 전파가 수신되는 까닭, 양자컴퓨터가 작동하는 원리 등을 차츰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책을 통해 나는 학창 시절 내 인생을 ‘(수), (과)포자’라 단정 지었던 판단이 사실은 큰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했던 미적분은 사실 인간이 하늘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열망이 낳은 언어였고, “수헤리베…”라며 인도네시아 사람 이름처럼 외우던 주기율표는, 사실 우주의 질서를 작은 표 안에 접어 넣은 지도였다. 지루하고 따분하다 여겼던 수학과 과학의 공식들은 알고 보니 매혹적인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학창 시절에는 어설픈 범생이 같던 친구들이 졸업 후 세련된 정장 차림에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난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서른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였지만, 나는 그들과 다시 친해지고 싶었다.


“우리가 상대성 이론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시간과 공간의 개념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이 덜 뿌리내린 아이들에게는 상대성이 그리 낯설지 않아, 어른들보다 오히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2019년 오늘 읽은 제프리 베네트의 『상대성 이론이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때 나는 과학 공부에 한창 빠져 있었다. 나의 호기심을 처음 자극했던 것은 우주선에서 나타나는 시간 지연 현상이었고,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특수상대성 이론은 쉽게 말해 속력이 빨라질수록 시간이 느려진다는 원리다. 말로는 단순하지만, 그 이치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상대성 이론을 어렵게 느끼는 까닭을 설명한 위 문장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삼체』는 나를 과학의 세계로 이끌어준 낯선 통로였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더 컸지만, 그 감정이야말로 새로운 공부로 발을 옮기게 한 동력이었다.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우주의 장엄함을 알려주었고, 박재용의 책은 일상의 사소한 현상 속에서도 과학의 원리를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베네트의 『상대성 이론이란 무엇인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굳어진 내 사고를 흔들어 주었다. 그 과정을 지나온 지금 나는 단순히 과학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과학책을 자발적으로 찾아 읽는 단계까지 나아왔다. 더 나아가 과학은 문과생의 공부에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믿음에 이르렀다. 문학과 철학이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게 한다면, 과학은 그 내면이 놓여 있는 세계의 질서를 밝혀준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전공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과학적 문해력이 필요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여전히 과학에 서툴고 모르는 것이 많지만, 이제는 그 서툶조차 즐기며 낯선 세계에 다가가는 기쁨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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