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일과 7년 전 오늘
대학교 3학년 가을학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치교육과에서 인턴을 했다. 2학년까지 영어를 전공하다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하고 처음 얻은 전공 실무 경험이었다. 정치교육과는 선거를 직접 관리하는 부서는 아니었다. 우리나라 정치 환경을 교육하고 알리는 일을 담당했다. 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맡은 교수에게 배정됐다. 첫 업무로 일본 오키나와의 류큐대학교 학생들을 맞이하게 됐다.
일본인과의 접촉은 처음이었다. 한국의 정치를 이해하겠다며 찾아온 그들이 누구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오전 일정은 독립문 기념관 방문이었다. 가해국의 후손인 그들이 그곳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오키나와 역시 일본 본토의 침략으로 편입된 역사가 있었다. 독립운동의 현장을 둘러보는 그들의 태도 속에서 우리 아픔을 공감하는 정서가 느껴졌다. 당시엔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그들의 관심과 반응이 내겐 뜻밖이었다.
강의실로 돌아와 발표가 이어졌다. 대부분 오키나와 출신이던 그들은 일본인으로서 반성과 미안함을 이야기했다. 동시에, 자신들의 선조 또한 일본 본토에 의해 피해를 겪었다고 말했다. 구한말 일제의 대한제국 합병,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까지 세세하게 언급하는 그들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오키나와의 위치조차 최근에서야 알게 된 수준이었다. 발표 이후엔 내가 좋아했던 오키나와 출신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웃음이 오갔다. 서로의 언어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이해와 우정을 나누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날은 또래였던 외국인 대학생과 하루를 보낸 평범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날을 쉽게 잊지 못한다. 당시 나의 세계는 내가 살던 응암동과 그 주변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특별히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웃나라 학생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세계와 마주하려 했다. 나와 같은 또래였지만, 훨씬 더 넓은 시야를 지니고 있었다. 예쁜 여학생을 쫓거나, 복수전공과 토익 점수에 매달리던 내 모습은 그들과 전혀 다른 차원에 있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우물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왔음을 자각했고, 좁은 세계에 안주하던 나의 오만을 마주했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경험은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다짐했다. 세상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려면, 단순한 언어 능력이나 예의 바른 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서 있는 역사와 문화의 토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말은 겉돌 수밖에 없고, 진정한 교류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세계사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막연했다. 고대사부터 읽어 내려가기에는 지금의 현실과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접근 방식을 바꿨다. 오늘의 정치 체제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들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었으니 프랑스 대혁명은 피할 수 없는 출발점이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치가 어떻게 군중의 열망으로 불붙어 절대왕정을 무너뜨렸는지, 그 불길이 어떻게 나폴레옹의 등장을 거쳐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는지를 읽었다. 나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시대를 움직인 인간의 욕망과 이상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책만으로는 때로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고전 문학을 곁들였다. 시대의 공기와 인간의 감정을 포착한 소설은 역사책이 보여주지 못하는 입체감을 주었다. 빅토르 위고의 글에서 프랑스 혁명기의 고통과 희망을 함께 맛볼 수 있었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제국 러시아의 불안과 인간 실존의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게 역사는 딱딱한 연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목소리로 다가왔다.
이런 습관은 군대에서도 이어졌다. 카투사로 복무하면서 미군 병사들과 같은 막사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다. 그 들과 처음엔 농담이나 스포츠 이야기로 가볍게 대화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주제로 나아갔다. 그들의 집안 이야기를 듣다 보면 미국 사회의 민낯이 드러났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 이라크전에 다녀온 형, 흑인 병사가 털어놓는 인종차별의 상처. 단순히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그들의 말에 진심으로 반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나라가 걸어온 길과 그 안에서 겪은 모순을 조금이나마 이해했기에 나는 그들과 함께 웃고 때로는 진지하게 침묵할 수 있었다. 내가 읽어온 역사와 문학이 언어 이상의 공통분모가 되어주었다.
사회인이 된 뒤에도 이런 경험은 계속 내 삶을 이끌었다. 독일 회사에 다니며 루드빅스하펜으로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화학 공장이 늘어선 도시였다. 현지 독일인 직원이 자신이 하이델베르크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책 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라인강가의 낭만적인 풍경,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거쳐 간 철학자들의 이름, 독일 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의 흔적. 나는 반가운 마음에 괴테와 만의 작품,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의 정신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는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자기 고향을 소개했다. 대화는 업무를 넘어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뿌리를 이해하려는 자리로 확장됐다.
중국 출장에서는 또 다른 경험을 했다. 어느 저녁 자리에서 한 직원이 루쉰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곧 루쉰의 ‘철의 집’ 은유를 떠올렸다. 창문도 없고 산소도 들어오지 않는 철의 집 안에서 사람들은 곧 질식해 죽을 운명인데, 모두 그 사실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들을 억지로 깨운다면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게 아닐까 하는 회의가 따른다. 하지만 루쉰은 주저하지 않았다. “혹시 깨어난 사람들이 문을 두드려 집을 깨뜨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며 글쓰기의 의미를 찾았다. 우리는 그렇게 그의 은유를 화제로 삼아, 밤이 깊도록 소설과 사상, 중국 현대사의 격동을 이야기했다. 루쉰의 문장을 인용하던 젊은 직원의 눈빛에서 나는 책으로만 접했던 세계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문학과 역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그들의 삶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헝가리 출장에서는 민주화의 경험이 대화의 중심이 됐다. 은퇴를 앞둔 현지 공장 직원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그들은 1956년 혁명과 동유럽 민주화의 물결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라는 말은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각인된 진실이었다. 그 순간 나는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을 떠올렸다.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으며 민주화를 외쳤던 세대의 이야기가 내 친지의 기억 속에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자유를 위해 거리로 나섰던 기억을 공유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금세 친구가 되었다. 술잔을 몇 번이고 부딪치며 밤은 깊어갔다. 그날의 대화는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캐나다 퀘벡에서의 경험도 또 다른 배움이었다. 현지 직원은 프랑스계 이주민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말하며, 영어권 캐나다와의 문화적 긴장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조상들의 이야기가 단순한 민속적 전통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정체성의 근원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부심과 독창성의 원천이기도 했다.
출장지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 만약 내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그저 회사의 일만 하러 왔다면, 우리는 날씨 이야기나 형식적인 인사로 대화를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어온 책들, 머릿속에 남아 있던 역사와 문학의 파편들이 그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언어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마음은 가까워졌다.
2018년, 나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며 어쩌면 이런 과거와 미래의 삶을 이미 어렴풋이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여러 만남 속에서 확인한 사실은 단순하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든든한 끈은 언어 능력이 아니라, 서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사회가 겪어온 시간을 존중하려는 태도다. 그 태도가 있어야만 대화는 깊어지고, 우정은 단단해진다. 몽테뉴가 말했듯, 다른 나라의 생활 형태와 사상, 풍속을 끊임없이 음미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다. 내 삶에서 이 말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수차례의 경험으로 입증된 진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그 배움을 따라가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