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을 읽다가 내가 쓰고 싶은 글

나는 진리를 쓰지 않는다. 진실을 쓴다.

by 세템브리니

세상에 진리가 있을까? 나는 진리를 쓸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진실을 쓰려는 욕망조차 의심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어떤 주장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들을 해체하고, 그 조각 위에 다시 내 삶을 얹어보는 일이다. 나는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의심과 흔들림으로 가득 차있다. 이런 의심과 흔들림이 나에게 글을 쓰게 한다. 너, 나, 우리, 언어, 가치, 정체성, 윤리, 인간, 세계… 이런 모든 개념이 슬며시 내 안에 들어와 있지만, 그 자연스러움이야말로 푸코의 지적처럼 오랜 권력의 작동 결과일지 모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내게 글쓰기는 해체다. 내게 글쓰기는 재구성이다. 누군가의 언어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낯설게 바라보는 일이다. 말은 내게 주어졌지만, 그 말은 언제나 권력과 시간, 문화의 흔적을 품고 있다. 그 흔적들을 무시한 채 문장을 쓴다는 건 결국 어떤 허구를 강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무의식을 경계한다. 쓰는 순간마다 말의 바깥을 보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나의 사유로 다시 구성한다.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다.

푸코는 말했다. “진리는 권력에 의해 생산된다.” 이 말은 진리란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우리는 흔히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진리는 그렇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병원, 학교, 감옥, 행정, 언론 같은 제도 안에서 ‘지식’은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지식은 단지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규정하고 사람들을 ‘길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진리는 ‘중립적인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다. 푸코는 담론 개념으로 통찰을 이어간다. 담론이란 단순한 말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을 생산하고, 규범을 정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프레임’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이 문장들조차도 어떤 담론의 틀 안에 있다. 그 틀을 인식하는 것이 글쓰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푸코가 말하고, 나는 동의한다.

이러한 푸코의 사유는 니체의 사유와 정확히 닮아있다. 니체는 진리를 해석의 산물로 본다.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힘의 작용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는 말한다. “사실은 없다. 다만 해석만 있을 뿐이다.” 이 한 문장은 나의 글쓰기에 방향을 제시한다. 나는 해석의 언어로, 다시 말해 해석의 해석으로 쓰고 싶다. 원본이란 없다. 우리는 모두 복사본으로 말하고, 쓰고, 살아간다. 니체에게 삶은 ‘권력에의 의지’다. 생명은 단지 살아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힘이다. 우리가 도덕이라 부르 것이나, 진리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힘의 결과다. 누군가의 의지가 힘을 얻고 체계를 만들면, 그것이 시대의 윤리와 진리가 된다. 니체는 이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 했다. 나는 그 작업을 글을 통해 해보려 한다.

나의 글쓰기란 나의 삶에서 열린 씨앗이다. 주어진 규칙을 따르지 않고, 그 규칙을 낯설게 만들어, 그 틈에서 새로운 사유를 열어보려는 시도다. 규칙의 균열은 세계의 균열이고, 그 틈에서 나는 규칙의 경계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본다. “이 말은 나의 것인가?” “이 생각은 정말 내 안에서 나온 것인가?” 끊임없는 자문은 시공간을 지연시키지만, 그 지연이야말로 사유의 시공간이다. 그러나 해체로만 끝낼 순 없다. 단지 파괴하고 의심하는 것에만 머무는 글은 나를 지치게 한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쓰고 싶은가. 이때 데리다의 ‘해체’ 개념을 생각한다. 데리다는 말한다. “해체란 어떤 개념이나 구조를 단순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고, 그 안에 감추어진 위계와 억압을 보여주는 일이다.”

내게 데리다를 소개해 준 강남순 교수는 데리다의 해체를 단지 철학적 도구가 아니라, 삶의 윤리적 태도로 읽어낸다. 그녀는 해체를 “타자를 존중하고, 중심의 폭력성을 경계하며, 침묵 속에 숨은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다. 그녀는 관조하는 철학을 믿지 않는다. 실천하는 철학을 따르고 알린다. 강남순 교수가 말하는 데리다의 해체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 역사에 대한 경각심, 언어에 대한 겸허함을 동반하는 실천이다.

나는 나의 글에 이 태도를 품고 싶다. 확신보다는 흔들림을, 정의보다는 질문을, 중심보다는 주변의 침묵을 중심에 놓는 글. 내가 하는 글쓰기는 어떤 사상을 전파하거나 감정을 토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스며든 언어와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를 들여다보는 행위다. 그 언어가 나를 어떻게 형성했고, 나 또한 그 언어를 어떻게 되받아 썼는지를 따라가 보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렇게 추적한 언어와 사유를 다시 나만의 결로 엮어내며, 그것을 나의 시선으로 다시 구성하는 것. 결국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자, 나의 사유를 세우는 방식이다. 글쓰기로 나의 사유는 생명을 다시 얻는다.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의 문장마다 자리를 다시 설정하고, 나의 입장을 유보하며, 다시 물음을 던진다. 글은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사유를 따라 움직이는 지도다. 나는 그 지도를 그리며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나를 마주하게 된다.

삶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나는 매번의 글쓰기에서 나를 멈춰 세우고, 그때의 나를 가장 솔직하게 통과시키는 문장을 찾고 싶다. 그것은 단단하지 않다. 언제든 수정 가능하고, 부정 가능하고, 철회 가능한 글이다. 그러나 그런 글만이 어떤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한 줄씩 해체하고, 한 줄씩 다시 세운다. 진리를 쓰지 않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게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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