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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다시 만난 세계

인문철학잡지 원고 공모 제출용

by 세템브리니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지난겨울 계엄의 부당함에 분노한 시민들이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우고 불렀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가사 중 한 대목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려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한 민주 시민들은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추운 날씨에도 광장에 모여 서로를 북돋으며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반면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홧김 범죄’는 순간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벌어지는 참극이다. 같은 분노가 어떤 경우에는 변혁의 불씨가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광기로 번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얼굴을 가진 ‘분노’라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분노는 흔히 긍정보다 부정의 의미로 규정된다. 개인의 권리보다 가족, 학교, 직장 등 공동체의 ‘조화’를 더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분위기 때문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개인의 분노는 곧잘 공동체 질서를 해치는 감정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의로운 분노야말로 공동체를 일깨우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게 만든 힘이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라는 성취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분노’가 낳은 결과였다.


결국 분노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분노에는 서로 다른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그 성격에 따라 파괴적일 수도, 정의롭고 윤리적일 수도 있다.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분노를 탐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세네카, 아렌트와 레비나스까지,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분노를 정의하고 평가했다.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였던 셈이다.


철학에서 보는 분노의 종류


분노는 단일한 얼굴을 가진 감정이 아니다. 철학자들은 분노를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해 왔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진 사유 속에서 분노는 파괴적 분노, 정의로운 분노, 윤리적 분노, 그리고 억압된 분노라는 네 가지 얼굴이 드러난다.


먼저 파괴적 분노가 있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분노에 대하여』에서 분노를 “잠깐의 광기”라고 규정했다. 그의 눈에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인간을 짐승보다 잔혹하게 만드는 감정이었다. 전쟁, 살인, 폭정이 모두 분노에서 비롯된다고 그는 보았다. 니체 역시 분노의 어두운 면을 지적했다. 그는 직접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한 약자가 분노를 억누르고 내면화할 때, 그것이 ‘원한’으로 굳어져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파괴적 분노는 결국 삶을 갉아먹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반대로 정의로운 분노는 불의에 맞서는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분노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보복 욕망”이라고 정의했지만, 동시에 적절한 대상과 방식, 그리고 타이밍에 맞는 분노는 미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학대전』에서 같은 맥락을 강조했다. 그는 불의한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나태라고 보았다. 나아가 아렌트는 정치적 불의에 대한 집단적 분노가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분노는 파괴가 아니라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에너지였다.


여기에 더해 윤리적 분노라는 차원도 있다. 레비나스는 분노를 직접 논한 적은 없지만, 그의 사상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느끼는 분노를 윤리적 각성의 출발로 읽히게 한다.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타자에게 응답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다. 이 분노는 공동체를 지키는 연대의 힘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억압된 분노가 있다. 프로이트는 억눌린 분노가 무의식 속에 쌓여 신경증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표출되지 못한 분노는 병이 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터져 나와 자신과 타인을 해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홧김 범죄’는 억압된 분노가 비뚤어진 방식으로 분출된 대표적 사례다.


이렇게 분노는 그 종류와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다. 파괴적일 수도 있고, 정의롭고 윤리적인 힘으로 전환될 수도 있으며, 억압될 경우 병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노를 없애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분노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분노를 보는 대립적 관점


철학은 분노를 단순한 감정의 한 갈래로만 보지 않았다. 인간의 이성, 정의, 윤리와 맞닿아 있는 문제로 깊이 탐구해 왔다. 철학자마다 분류 기준은 달랐지만, 크게 두 가지 상반된 관점으로도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분노를 긍정적이고 유용한 감정으로 보는 관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가 인간의 존엄과 정의를 지키는 힘이라고 보았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전혀 화내지 않는 것은 무감각이며, 올바른 방식으로 화내는 것은 미덕에 가깝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는 “분노하지 않는 것은 잘못을 묵인하는 것”이라고 단언하며, 불의에 대한 분노를 신앙적·도덕적 책무로까지 보았다. 근대 이후 아렌트 역시 이 맥락을 계승했다. 그녀는 정치적 불의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 전통에서 분노는 사라져야 할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를 바로잡는 에너지다.


다른 하나는 분노를 부정적이고 반드시 통제해야 할 감정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입장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세네카는 분노를 가장 명확히 부정한 인물이다. 그는 분노가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부당하게 해를 입었다’는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분노를 “잠깐의 광기”라 부르며, 분노가 이성을 흐리고 인간을 짐승보다 잔혹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일단 불붙은 분노는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해를 끼치므로,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불교 역시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불교는 분노를 탐·진·치라는 삼독(三毒)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며, 수행자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근본적 장애물로 본다. 분노는 마음을 어지럽히고, 관계를 파괴하며, 윤회의 사슬을 끊지 못하게 하는 뿌리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분노를 긍정하는 전통과 부정하는 전통이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분노가 본질적으로 다층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회적 정의를 회복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인간을 파괴하는 광기로 변하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노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분노란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분노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본 철학자들의 논의는 분노를 이성, 정의, 윤리와 연결해 깊이 탐구한 성찰의 성과다. 하지만 일상의 언어로 분노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구분이 필요하다. 강남순 교수가 제시한 분노의 세 가지 양태는 이런 점에서 도움이 된다. 그는 분노를 본능적 분노, 성찰적 분노, 파괴적 분노로 나누었다.


본능적 분노는 외적 위협에 즉각 반응하는 감정이다. 동물에게서도 확인되는 이 분노는 우리를 위협에서 보호하지만, 성찰 이전의 반사적 반응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성찰적 분노는 불의와 부당함을 숙고한 끝에 나오는 이성적 분노다. 반면 파괴적 분노는 대상이 행위에서 행위자로 옮겨가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악마화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드러나는 두 얼굴의 분노 역시 성찰적 분노와 파괴적 분노다. 성찰적 분노는 불의와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모으는 시민적 분노이고, 파괴적 분노는 온라인 공간의 무차별적 혐오와 일상의 폭력으로 이어지는 왜곡된 분노다. 전자는 우리를 묶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후자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고립시킨다.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적 분노다. 그것은 불의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태도이며, 파괴적 분노로 흐르지 않도록 이성과 성찰을 동반한다. 당장은 즉각적 해소처럼 보일지라도, 지속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성찰적 분노에서만 나온다. 성찰적 분노는 정의 감각을 일깨우고, 행동의 동력이 되며, 연대의 기반을 만들고, 윤리적 책임을 자각하게 하며, 내적 성찰과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이 다섯 가지 힘은 우리가 분노를 단순히 억누르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성찰적 분노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그렇다면 성찰적 분노를 내면의 건강한 원동력으로 삼는 실천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방법을 자연과 예술에서 경험하는 숭고함의 체험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의 무한한 크기나 압도적인 힘이 감각 능력을 넘어설 때, 오히려 자신의 이성 ― 무한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도덕적 자유 ― 을 자각하게 되며, 이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숭고다. 숭고는 감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이성이나 상상력으로 넘어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정서다.


인간이 숭고를 경험할 때 내적 세계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거대한 자연이나 위대한 예술 앞에서 우리는 우선 자신의 유한성을 실감한다. 동시에 그 무한성을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록 작고 유한한 존재일지라도 인간 이성이 지닌 힘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스스로를 도덕적 존재로 확인하게 되고, 새로운 창작의 영감을 얻으며, 일시적이나마 일상의 분노와 불안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자연과 예술을 통해 숭고함을 느끼는 일은 성찰적 분노를 배우고 발전시키는 하나의 길이다. 숭고는 분노의 에너지를 파괴로 흐르지 않게 막아주고, 이성과 성찰이 분노를 책임 있는 응답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다. 거대한 풍경 앞에서 느끼는 겸허함, 음악과 예술 작품이 일깨우는 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순간의 충동적 분노가 아니라 깊은 사유와 책임 있는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연과 예술은 인간을 초월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성찰적 분노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통로인 셈이다.


김광석이 부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작사가 류근 시인은 학창 시절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던 자신이 시를 만나면서 비로소 그것을 제어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예술이 파괴적 분노를 성찰적 분노로 승화시킨 대표적 사례다. 필자 역시 혹독한 사춘기를 지나며 심리적 고립 속에서 자라난 분노를, 인간 존재의 심연을 파고드는 문학 작품을 통해 다스린 경험이 있다. 돌이켜보면 개인이나 사회의 성숙을 이끈 것은 언제나 성찰적 분노였다. 파괴적 분노가 소진과 단절을 낳았다면, 성찰적 분노는 이해와 성장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개인과 사회의 진보는 결국 성찰적 분노가 빚어낸 인내의 결실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성찰적 분노는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변화를 싹 틔우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길러야 할 분노는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의로운 분노, 레비나스가 강조한 타자의 고통 앞에서의 윤리적 분노, 그리고 강남순 교수가 구분한 성찰적 분노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 성찰적 분노를 우리의 실천 속에서 배양하는 방법이 자연과 예술을 통한 숭고함의 체험에 있다고 믿는다. 숭고의 순간은 분노의 에너지를 파괴로 흘러가지 않게 하고, 이성과 성찰이 그것을 책임 있는 응답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분노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지 않으며,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질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다. 파괴적이지 않으면서도 주저하지 않는 분노, 그것이야말로 나를 성숙하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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